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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이’교수 천국 성공회대 해부 [월간중앙]

야촌(1) 2009. 6. 25. 20:40

‘삐딱이’교수 천국 성공회대 해부 [월간중앙]

 

“교수 임용 때 운동권 경력이 ‘우대사항’… 10년 만에 주류 대학으로” 진보 학자의 본산 vs 운동권 학자의 본산. 성공회대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다. 교수들의 옥살이 횟수를 모두 더하면 육십갑자를 넘는 대학이 바로 성공회대다.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성공회대 울타리 안에 모이게 된 것일까? 또 한 울타리 안에 모인 이들은 어떤 담론을 만들어 가고 있을까?

 

"또 성공회대야?”

 

지난 3월24일 후임 국무총리로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이 지명되자 터져 나온 말이다. 한 지명자의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겸임교수의 전력이 문제됐던 탓이다.

 

박 교수는 대학교 1년 선배였던 신영복(65) 교수에게 마르크스 <자본론>을 빌려 기독교 대학생 연합서클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돌려 읽게 했던 것이 문제가 돼 13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에게 책을 빌려 준 신영복 교수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면서 그도 엮여 들어갔기 때문이다. 신영복 교수 역시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20년을 복역하고 나와 현재 성공회대학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 교수와 신 교수뿐만 아니라 성공회대에는 ‘별’을 단 교수가 여럿이다. 1974년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연루돼 1년 가까이 옥살이한 권진관(54·신학)·이종구(53·산업사회학) 교수,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조희연(50·정치사회학)·이영환(49·사회복지학) 교수, 1990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에 연루됐던 임규찬(49·교양학부) 교수 등이 그들이다.

 

오늘날 성공회대를 이끌어 가는 간판 교수 중에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별을 단 이가 수두룩하다. 비록 ‘별’을 달지는 않았지만 기성 대학에서 ‘삐딱이’로 분류돼 임용을 꺼렸던 교수도 여러 명이 둥지를 틀고 있다.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위원장 출신의 진영종(45·영어학) 교수와 백기완 선생의 딸이자 노동운동가 출신 백원담(48·중국현대문학) 교수 등이 대표적 예다.

 

이처럼 비판적 학술운동은 물론 시민운동과 사회복지운동에 적극적인 마당발 교수가 대거 포진한 탓에 색안경을 끼고 성공회대를 바라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마디로 ‘운동권 교수의 총집합체’라는 평이다.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성공회대로 모여들게 된 것일까?

 

성공회대 교수들은 이구동성으로 오늘의 성공회대의 초석을 닦은 사람으로 이재정 전 총장(62·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을 꼽는다. 신학과와 사회복지학과 등 단 두 학과에 한 학년 학생이 100명에 불과했던 성공회신학교(성공회대의 전신)에 부임해 종합대학으로 키운 주역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학교인데 강의 좀 부탁한다”

 

1970년대 반유신 인권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던 이 전 총장은 어떤 대학에서도 받아들이기를 꺼리던 비주류 지식인들을 당국의 따가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공회대로 끌어들였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8년 20년 만에 출소한 정치범 신영복 교수를 전격적으로 강사로 초빙한 것도 이 전 총장이었다.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88년 귀국하자마자 성공회신학교에 부임했죠. 그 무렵 신 교수님도 8·15광복절 특사로 출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신 교수님을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어 그분의 생각이나 사상은 익히 알고 있었죠. 마침 주위 분들이 신 교수님 생계를 도와 주기 위해 고민하던 차였기에 저 역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봤죠.”

 

이 전 총장은 “죄 없는 사람이 20년을 감옥에 있다 나왔는데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원상회복이었다. 감옥에 가기 전에 숙명여대와 육사에서 강의했던 만큼 학교는 다르지만 다시 강의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보상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1988년 10월께 마당 세실극장 이영윤 대표의 소개로 만나 전국에서 제일 작고 보잘것없는 학교인데 강의 좀 해 줄 수 있느냐고 제안했죠.” 이렇게 시작된 강의가 신영복 교수의 ‘경제원론’과 ‘한국사상사’ 강의다. 이 전 총장은 복권이 안 된 상태여서 당국의 감시 대상에 올라 있던 신 교수에게 연구실까지 제공하며 매일 출근하도록 독려했다.

 

신 교수에 이어 이 전 총장이 두 번째로 영입한 교수는 사회과학부 조희연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인 조 교수는 1980년대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의 정점에 서 있던 소장파 신진학자였다. 그러나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던 탓에 대학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어 이 전 총장은 손규태(66·기독교윤리학)·최영실(57·성서해석학)·권진관·이영환 교수 등 소장파 신학자들을 잇따라 영입했다.

 

1992년 성공회신학교를 정규 대학교로 승격시킨 이 전 총장은 이사회를 설득해 1994년 종합대학으로 변모시켰다. 과도 종교사회학과(현 사회과학부)·선교영어학과(현 영어학과)·컴퓨터정보공학부·일어학과·신문방송학과 순으로 차근차근 늘려 갔다.

 

학과가 늘어나는 만큼 교수도 활발하게 영입했다. 김동춘(47·정치사회학)·고병헌(45·교육학)·김창남(46·신문방송)·이영환 교수 등이 성공회대에 합류한 것도 이 즈음이다. 대부분 주류 교수사회에서 왕따당할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 지식인이었다. 고려대 81학번인 고병헌 교수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운동권 출신이었으며, 김창남·이영환 교수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에 갔다 왔다.

 

성공회대는 신임교수 임용시 서류심사 후 인사위원회 면접과 총장 면접을 거친다. 여기서 이 전 총장은 1970~80년대 감옥에 갔다 오거나 저항운동을 했던 지원자에게 가산점을 줬다. 과거 청춘을 다 바쳐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사회가 응분의 보상을 해 줘야 하다는 이 전 총장의 철학에서였다.

 

여기에는 ‘인권과 평화’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한 진보 학문분야에서 성공회대가 일정 정도 학파를 형성했으면 하는 그의 바람도 작용했다. 조희연·손태규·이영환 등 교수로 구성된 인사위원회의 평가도 총장 인터뷰와 거의 일치했다. 그렇다 보니 임용 과정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적지 않았다. 영어과 진영종 교수가 대표적 예다.

 

진영종 교수는 전국 대학을 통틀어 도저히 임용이 불가능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전국대학강사협의회 공동의장이자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했던 탓이다. 진 교수는 과감하게도 버젓이 그 경력을 이력서에 써 넣었다. 보다 못한 인사위원회 소속 조희연 교수가 이력서를 받아들고 “이런 것을 왜 써? 서류전형에서 탈락하면 어쩌려고!”라고 물었다.

 

그러나 진 교수의 답이 걸작이었다. 시간강사생활에 신물이 났을 법한 그가 “운동 경력이 우대사항이라고 해서 썼다”며 “운동 경력을 숨기면서까지 취직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던 것이다.

 

이 전 총장은 “성공회대는 지원자의 학문적 업적보다 우리 학교 학풍과 더불어 연구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초창기 교수들의 경우 어떤 유형을 설정해 놓고 여기에 맞춰 뽑은 경우는 없다”고 강조한다. 단지 운동권 차별, 국내파 차별을 안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학교가 워낙 작다 보니 유명한 사람들이 몰려 오지도 않았다”며 “그래서 상대적으로 좌파 학자들에게 기회가 돌아간 것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5·16 군사 쿠데타의 주체세력이었으며 전두환 정권에서 장관을 지냈을 정도로 보수색이 짙은 유양수 전 장관 등 보수 일색이던 이사회도 이 전 총장의 행보를 별반 문제 삼지 않았다.

 

학교가 워낙 작아 제대로 된 종합대로 성공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전 총장은 오늘날 ‘성공회학파’라고 불리는 교수진을 마음껏 구성해 나갈 수 있었다. “1970~80년대에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학생이 운동권에 많이 투신했습니다.

 

이들 중 몇몇은 졸업 후 전문 활동가로 나섰지만 다수는 학술운동 차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죠.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 공부를 마친 이들은 받아 주는 곳이 없어 학계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았죠. 그런 이들을 받아 준 곳이 성공회대였습니다.”

 

2000년에 임용된 한홍구(47·교양학부) 교수의 설명이다. 한편 양권석 부총장은 성공회대가 개방적 학문 풍토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나라 대학은 식민지시대와 분단의 역사를 거치며 학문적으로 많은 제약을 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계가 보수 일색으로 경도됐죠. 다행히 성공회대는 우리 사회가 외형적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인 1990년대 종합대로 성장했습니다. 때문에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고민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고, 진보학자를 모셔 와 이에 대한 대안을 찾는 노력을 할 수 있었죠.”

 

그는 또 “농담 삼아 한 번 우리 학교 교수님들의 옥살이 햇수를 다 더해 봤더니 너끈히 60~70년은 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성공회대에는 진보적 교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 성향의 교수도 있다”며 “중요한 것은 서로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성공회대 주요 비판적 지식인 그룹]

 

사회과학부

신영복 서울대(경제학)_통혁당 사건으로 20년 투옥

조희연 서울대(정치사회/산업사회학)_참여연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김동춘  서울대(정치사회학)_'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워원회' 상임위원,前참여사회연구소장

김진업 연세대(사회이론)_서구 마르크시즘 사상사

박경태 연세대(소수자학 ·인구학)_인종문제 및 외국노동자문제,혼혈문제에 정통

정해구 연세대(한국정치)_'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장

교양학부

고병헌 고려대(교육철학)_진보주의 교육운동가, 평화교육 자문위원

임규찬 성균관대(현대비평)_카프 및 프로문학 전문가

한홍구 서울대(한국현대사)_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베트남전진실위원회,군대인권 ·사병인권 ·양심적병역거부운동

신문방송학과

김창남 서울대(매스커뮤니케이션/대중문화이론)_문화평론가 ·서울대 노래동아리 '메아리'출신이자 '노래를 찾는 사람들'창단 멤버

최영숙 민언련 정책위원 및 편집위원장

박창길 연세대 촤파생태학자,동물학대 방지연합 간사

김서중 서울대(언론법제/저널리즘)_민주교수협의회 총무간사 및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

영어학과

진영종 연세대(영문학)_참여연대 합동사무처장

일본어과

권혁태 고려대(경제사)_일본교과서 왜곡 저지 운동 주도

중국어과

백원담 연세대(중국현대문학)

이남주 서울대(정치학)_서울대총학생회장 출신

신학과

손규태 한국신학대학교(기독윤리학)

권진관 서울대(조직신학/민중신학)

최영실 이화여대(신약학/성서해서학)

사회복지학

이영환 서울대(사회복지정책)_前 참여연대 사회복지 위원장

이가옥 외국어대(노인복지)

정원오 서울대(사회복지정책/빈곤문제)

김용득 서울대(장애인복지)

NGO 대학원

조효제 옥스퍼드대(국제 NGO연구)_치과의사 출신 인권운동가/現 제 3기 법무부 정책위원회 위원/前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조사과 연구위원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