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광무제(光武帝). 마원(馬援)

야촌(1) 2006. 7. 16. 00:25

■ 광무제(光武帝, AD 25~AD 57) - 後漢을 재건한 황제

 

 

재상 왕망(王莽)에게 찬탈당한 한(漢)나라를 재건한 황제(25~57 재위)이다, 자는 문숙(文叔).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광무(光武). 이름은 유수(劉秀)이다. 


그는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전한은 1세기 초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왕망은 신(新)이라는 왕조를 세웠다.


  그신의 말년에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거병(擧兵)하였을 때, 유수(劉秀)도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의 호족(豪族)과 손을 잡고 봉기하였다. 각지로 전전(轉戰)한 끝에 허베이[河北]·허난· 후베이[湖北]에서 세력을 폈으며, 허난의 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년 허난의 뤄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漢王朝)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세력범위는 허베이· 허난· 산시[陝西]뿐이었으며,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농서의 외효(隗浴), 하서(河西)의 두융(竇融) 등이 할거(割據)하고, 또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 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었다.

 

즉위한 후 10년 동안 이들의 세력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하였다.

왕망(王莽)의 가혹하였던 정치를 폐지하고 전조(田租)를 인하하는 한편, 간전(墾田)의 측량 등을 행하여 통일국가의 충실을 기하였으며, 군병(郡兵)을 내어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를 꾀하였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고 명예와 절조를 중히 여기는 유교존중주의(儒敎尊重主義)를 택함으로써, 후한의 특색이 되는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기초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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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원(馬援(AD14 ~AD 49)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후 후한(後漢)의 건국(建國)을 도모한 장군이다. 처음에는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나 왕망의 정책에 반대하는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자 왕망의 정적(政敵)들과 손잡았고 결국에는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25~57/58 재위)의 신하가 되었다.


35년 화남(華南)지방의 태수(太守)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지금의 북베트남에 이르는 지역까지 중국의 지배권(支配權)을 다시 확립(確立)했다. 45년에는 북방 국경지대로 파견(派遣)되어 중앙 아시아의 흉노(匈奴)족을 제압(制壓)하는데 힘썼다.

 

마원(馬援)은 죽은 다음 신(神)으로 받들어졌고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중국 남부의 광시[廣西] 지방에서는 파도를 잠재우는 해신(海神)으로 받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