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민족의 뿌리

韓民族의 言語⋅文字 및 道敎-이시영

야촌(1) 2012. 2. 27. 18:32

 

韓民族의 言語⋅文字 및 道敎 

 

韓族의 言語는 三國이 分立되어 있던 時代를 前後해서 大體로 統一되어 있었다. 그러나 土話는 統一하지 않은 말이 조금 있었다. 滿洲의 淸나라 乾隆皇帝①(1711~1799)는 『滿洲源流考』라는 冊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卽 金나라의 根源은 滿洲와 高麗이며 根本은 서로 同一한 것이다. 各 地方에 土話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으나 三韓 (馬韓⋅ 辰韓⋅ 弁韓)의 官制 一稱에는 新羅 中葉 以前까지도 韓의 文字를 써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陳壽(西晉사람 233~297)가 쓴 『三國志』(二十五史의 하나)에서는 三韓의 官制가 牛馬와 같은 六畜의 이름을 딴 것이 있어(例 牛加⋅ 馬加) 鳥類의 名稱을 딴 中國 官制와는 다르다고 했으며, 發音을 音譯함에 있어서 傳會와 侮辱(모욕)을 加한 點이 대단히 많다. 

 

中國이 文化先進國이라 하나 殷나라 湯임금(BC 1600年代) 以前의 歷史를 바라볼 때, 이는 神話에 屬한다고 볼 수 있으며 湯임금 以後의 歷史라야 겨우 믿을 만한 것이다. 우리韓國은 나라를 享有한지 四千餘年이요. 三韓時代 以後부터는 신빙성(信憑性)이 있는 歷史가 始作되었다 볼 수 있다. 

 

四千年의 悠久한 歷史 속에서 外國 異民族의 侵略을 繼續 當하여 禍를 입었으니 어찌 痛恨스럽고 수치(羞恥) 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歷代의 經籍과 文字 等이 입은 禍도 한, 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 입은 화액(禍厄)으로서 燕나라(漢의 諸侯國)의 綰王(BC 247~?)의 亂을 들 수 있는데, 이 때문에「箕子朝鮮」의 歷史 記錄이 모두 탕화(湯火)되고 殘存한 것이 없게 되었으며, 

 

두 번째의 禍厄으로서 唐將 李世勣이 高句麗에 對해 저지른 것과

세 번째의 變으로서 견훤(甄萱)의 禍厄을 들 수 있는데, 이때 新羅의 舊史와 經籍은 한 가닥의 횃불이 되어 잿더미로 化했다. 

네 번째의 變厄으로서 모고(蒙古)의 홀필열(忽必烈)(1260~1294)에 依한 산삭(刪削)이라 할 수 있으며,

다섯 번째의 變厄은 日本에 依한 禍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온갖 古典이 禁書處分 되고 假本이 眞本으로 바뀌고 다음과 같은 진적(珍籍)이 自取를 감추게 되었다.

 

◇신지비사(神誌秘詞)

◇대변설(大辨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동천록(動天錄)

◇곤중록(壼中錄)

◇지화록(地華錄)

◇서운관비기(書雲觀秘記)

◇안함노(安含老)⋅ 원동중(元董仲)의 『三聖記』 等 多數이다. 

 

또 高興이 지은 『百濟史』, 李文眞이 지은 『高句麗史』, 거칠부(居柒夫)가 지은 『新羅史』 그리고 『渤海史』에 이르기까지 여러 書籍들이 단지 그 冊名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文藝品으로 神誌(檀君時代의 글을 管掌한 官吏)가 쓴 『비사(秘詞)』가 있는데 그 글씨 모양이 기이(奇異)하고 意味가 심오(深奧)하여 讀者가 解得가 어려운데 高句麗의 大弘英이가 이 『秘詞』를 漢文으로 飜譯하고 이울러 序文에 註譯을 붙인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九變은 國都의 變遷을 뜻하며 震檀은 朝鮮을 일컬음이다)가 있다. 

 

韓人은 文字를 아주 上古時代부터 가지고 있었다. 저 황제헌원(皇帝軒轅)(BC 2692~2592)이 동쪽의 나라 靑邱(韓)國으로부터 몸소 「三皇內文」을 「紫府仙人」에게서 받아 왔다고 하는데 이는 아득한 神代에 속하는 일로 더 以上 仔細한 內容은 알 수 없다. 

 

그러나 文化 柳氏의 族譜에 쓰여 진 王文(扶餘朝)의 書法을 보면 篆字를 닮기도 하고 符籍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 平壤의 法首橋에 있는 古碑나 南海②島의 岩壁에 刻印되어 있는 글자가 혹시나 徐市(秦始王 때 長生不死藥을 캐러 온 사람)가 남겨놓은 흔적(痕迹)이 아닌가 疑問도 해보지만, 이미 秦始王 때 쓰던 篆字도 아니오 梵字도 아님이 明明하게 밝혀졌으니 韓人의 古代文字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또 『三國史記』의 『新羅本紀』 憲康王編에 보면 憲康王 12년(886)에 寶露國이라는 나라 使臣이 黑水國을 通하여 新羅에 通和를 要請하였는데 이때 나무 조각에 古文字로 사겨진 글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돌아갔다는 記錄이 있고 또 『李太白全書』의 『玉塵叢談(옥진총담)』이란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渤海國에서 唐나라에 國書를 보냈는데 唐나라 朝廷에서 이 글을 解得하는 者가 없었다.그런데 오직 李太白(701~762 唐詩人)만이 이를 解得 할 수 있어 答狀을 써 보냈다....... 高麗國의 4代王인 光宗(949~975)時 張儒라는 사람은 接賓使로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처음 그는 亂을 避하여 中國 揚子江 南쪽인 吳⋅越地方에 사는 錢氏라는 사람 집에 묵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好事家가 있어 거문고 밑바닥에 「東部寒松亭曲」이라는 글을 새겨 海波에 漂流케 하였던바 越나라 사람이 주어 그 바닥에 새겨진 文章을 解得할 수 없었다. 

 

때마침 張儒가 그곳에 가 있었기에 越나라 사람이 그에게 이 글의 뜻을 물었더니 張儒는 卽席에서 이를 解得하여 漢詩로서 對答해 주었다. 卽 그 內容이 月白寒松夜 : 달빛은 교교히 외로운 소나무에 내리고波安鏡浦秋 : 파도조차 잠이든 경포대의 가을哀鳴來又去 : 지저귀는 새소리만 슬프게 오고 가는데有信一沙鳴 : 모래 위 수리개는 어떤 소식을 가져 왔는고 거문고 바닥에 새겨진 글은 新羅때의 漢字로서 우리말을 表音式으로 나타내던 이른바 鄕札이었던 것이며 다름 아닌 韓의 古文인 것이다. 

 

世上을 保全하며 百姓들에게 敎訓이 되는 眞倧大道(卽 大倧敎를 뜻함)와 敎化의 진수(眞髓)할 國仙⋅ 조의(皂衣)仙人⋅ 花郞風月主 등은 世上에서 둘도 없는 獨特한 歷史인 것이다. 杜佑(735~812 唐國人)의 『通典』③⋅ 『冊府元龜』 및 『隨唐新書』 等에서는 그 名稱만을 簡略하게 擧論하였을 뿐 그 內容은 記載하지 않았는데 다만 剛直하고 씩씩하며 節介를 爲해 죽음을 아끼지 않은 氣風과 어질고 무던하며 끝도 없이 너그러운 美德, 그리고 高潔하고 그윽한 발자취들이 보잘 것은 없지만 그 편린(片鱗)만이라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저 檀君時代에 撰述하였다고 하는 『天符經』이 後世에서 傳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新羅人 崔致遠이가 古碑 하나를 얻어서 그 碑文을 漢文으로 飜譯하고 거기에 跋文으로 數十字를 그 뒤에 붙였는데 이를 妙香山의 어느 石壁에다 刻하여 後世에 남겨 두었다. 

 

檀紀 4250年 丁巳年 黃海道 계정수(桂廷壽)라는 사람이 이 글을 妙香山 숲속에서 發見하여 이것을 印刻하여 世上에 傳하였는데 아홉 줄로 된 아홉字의 글로 되어 모두 81字인 것이다. 모두 章을 나누고 句를 끊어 三編 九章 七十六句가 되나 뜻은 깊고 그윽하여 解得하기 어렵다.

 

그 本文을 紹介하면 일시무시일석삼극무(一始無始一析三極無)진본천일일지일이인(盡本天一一地一二人)일삼일적십거무궤화(一三一積十鋸無匱化)삼천이삼지이삼인이(三天二三地二三人二)삼대삼합육생칠팔구(三大三合六生七八九)운삼사성환오칠일묘運三四成環五七一妙)연만 만래용변불동(衍萬 萬來用變不動)본본심본태양앙명인(本本心本太陽昻明人)중천지일일종일(中天地一一終一) 最近에 『天符經』을 序文에 註譯을 달고 이를 解釋한 사람이 있는데 말하기를 이 『天符經』은 처음에 『하나』라는 理致의 極致를 첫 머리에 敍述하고 中間에 가서는 萬事 萬物의 說明으로 擴散하였다가 末尾에 가서는 다시 『하나』의 理致로 統合하였다. 

 

宇宙의 全體를 빠짐없이 여기에 記載하였다.卽 삼라만상(森羅萬象)과 宇宙의 은비(隱秘)를 또 성주양공(成住壤空)하고 호급변환(浩劫變幻)과 人生本然의 性命原理를 그리고 道門의 秘藏과 圓覺의 妙諦(묘체)에 이르기까지 不備한 것이 없다 할 것이라고 하였다. 

 

痛嘆스럽도다. 韓人은 이와 같이 奇異한 災禍와 기구한 恥辱을 입어 왔거늘 아직도 자화자예(自悔自艾)하는데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하물며 敢히 他人의 長短點을 들먹이겠는가? 한걸음 더 나아가 故事를 과장(誇張)해서 남을 현혹(眩惑)케 하여 他人의 비방(誹謗)을 招來할 이을 하겠는가! 

 

中國人들은 恒常 自國의 文化가 일찍 開發되고 政敎가 發達되어 隣國까지 善察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 戰國時代(BC 402~221) 以前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詳考할 수 없으나 中古時代 以來로는 隣國의 政治를 觀察하는 것을 무중(霧中)에 꽃구경하듯 하여 至近至密한 터에 있는 우리에게 對하여 一切 事情을 깊이 생각하거나 硏究하려 하지 않고 하였으니 이 어지 異常한 일이 아니겠는가. 

 

『二十四代使』를 諸家들이 記述하였는데 어찌 이를 熱讀⋅細考하지 않고 처음부터 어찌하여 서둘러서 망령(妄靈)된 評을 내리는가. 그러나 저들이 아는 것만을 들어 論하는 것을 보면 中國人의 韓國觀은 대개가 길가에서 주워들은 所聞에서 비롯된 것이고 소루(疏漏)하고 不精한 것이어서 探究熱考(探究熱考)한 흔적(痕迹)이 보이지 않는다. 

 

그 中에서 比較的 眞義를 잃지 않고 事實에 가깝게 記錄을 적은 것이 있는데 司馬相如(BC 179~117)가 『漢書』에서 漢武帝(BC 141~87)에게 한 말이다. 폐하(陛下)께서 겸양(謙讓)하시어 미처 말씀하시지 않으시오나 「三神」의 환심(歡心)을 사시는 일이 오니이다(여기서 三神이라 함은 곧 「上帝」를 뜻함이다). 

 

또 『東方神檀史』에 이르기를 箕子가 東쪽에서 와서 神의 理致를 欽敬하면서 敎理와 經典을 譯讀하고 阿斯達山에 祠堂을 지었으며 그 祠堂은 紫檀木(자단목)으로 建造하고 三神位를 모시었다. 

 

三神은

 

첫째 桓因(고어로 天父「하느님」을 뜻한다)이요, 

 

둘째 환웅천사(桓雄天師)요, 셋째 환검(桓儉)인데 이 모두가 天君을 일컫는 것이다. 

         이른바 箕子의 三八政 가운데

 

세 번째가 祭祀이니 이는 報本追遠 卽 先祖의 恩惠에 感謝 報答한다는 뜻이다.

「韓」이나 『桓」이 모두가 우리말로는 大(큰 것)을 뜻하는데 滿洲말로는 『한(汗)」으로 일컫게 되는데 이 『汗」은 「韓」과 同音이다. 「儉」은 「君」(임금)을 뜻하는 것인데 환검(桓儉)이나 왕검(王儉)은 모두가 같은 뜻이다. 明나라 사람 왕엄주(王弇洲=本名 王世貞 1529~1593)가 쓴 「속완위여편(續宛委餘編)」이란 책에 다음과 같은 記錄이 있다. 

 

東方의 檀君님은 特出한분으로 神聖한 가르침을 펴서 百姓을 溫厚하게 하고 勤勉하게 하였으며, 이리하여 堂堂하고 强力한 民族이 되게 하였으며, 檀君의 가르침을 扶餘에서는 「代天敎」라 하였고, 新羅에서는 「崇天敎」라 하였으며, 高句麗에서는 「敬天敎」라 하였고, 高麗때에는 「王儉敎」라 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三神을 祭祀지내는 것이며 해마다 十月이면 하늘에 敬拜하였다.檀君의 開天建國하심도 亦是 十月三日이다. 

 

『遼史(요사)』 神冊元年에 보면, 묘사(廟社)를 목섭산(木葉山)에 세우고 東쪽을 向하여 天神에 위패(位牌)를 設하고 廟社의 庭園에 檀木을 심고서 神樹라고 名稱을 붙였다. 요(遼)의 皇帝는 親히 이 곳을 觀察하고 또 出師를 할 때에는 반듯이 이 곳을 먼저 찾아와 廟社에 告 하였다. 

 

마침내 드디어 三神位까지 모시게 되었다. 『金史』 大定 十二年(1172) 十二月에는 興國 영응왕(靈應王)을 존숭(尊崇)하는 禮를 다하였다. 고 하였으며  昌明(年號未詳) 四年 十月에는 또 다시 弘聖帝를 개천한 帝王으로 冊立하였다. 고하였다. 

 

『前淸滿洲誌』에는 拜天敎의 일에 關하여 詳述되어 있으며, 韓國의 儒生 李星湖와 丁茶山의 著書에도 倧敎(大倧敎)와 三神說에 관하여 記述한바가 있다. 

 

『註 1』 乾隆皇帝(건륭황제)(1711~1798), 淸國 第6代王 十丈武功을 稱頌한 「御制十全記」를 撰述하였다.

『註 2』 南海郡 二東面 良阿里에 있는 큰 바위에 새겨진 글자이다.『註 3』 唐나라 社佑(734~812)가 지은 史

                 書.

 

出典 : 感時漫語(李始榮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