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민족의 뿌리

한민족의 혈통형성과 몽골지역

야촌(1) 2010. 7. 20. 18:30

■ 한민족의 혈통형성과 몽골지역

 

세상의 어느 민족이고간에 순수한 혈통임을 내세우는 것처럼 어리석은 주장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고대에 복잡한 민족 형성과정을 거쳐서 대략 고려초기에 현재의 혈통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90년대 동구제국이 개방되고 난 후, 한국의 사학계에선 이전부터 한민족의 뿌리로 여겨졌던 몽골지역에 대한 관심이 들끓었던 적이 있었다.

 

여러 학계와 언론등에서 한민족 혈통루트를 예상하는 답사의 정점으로 몽골과 중앙아시아지역을 꼽고 이들 지역과 주민들의 혈통을 우리 민족과 꿰맞추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대부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이하곤 이들 지역과 한민족의 고대사 연루에 대한 의문은 미제상태로 남겨졌다. 아니 오히려 이 지역과 한민족의 공통성이 크게 후퇴하는 결과가 빚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산권 해체와 개방후 한국의 많은 언어학자와 사학자들은 몽골유역에서 한민족의 시원을 밝혀보려 했으나, 오히려 이들 지역과 한민족의 공통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논리만 쌓여가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지금까지의 성과를 압축해보면,

 

첫째, 몽고와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어와 한국어는 그 연관성이 매우 희박하다.

 

우리가 20세기까지 배워온 한민족의 언어분류는 우랄.알타이어, 특히 알타이 언어군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터어키에서 중앙아시아와 몽골을 거쳐 만주(퉁구스), 한국, 일본어가 동일계통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80년대부터 일본 언어학계로부터 일어의 알타이계설에 대한 부정이 제기되더니, 90년대의 언어학 연구에 의해 한국학계로부터도 한국어의 알타이어설이 강력히 부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알타이계통의 언어와 한국어는 극히 일부의 문법적 유사성을 제외하곤 도저히 같은 계통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이(相異)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90년대 부터는 한국어를 독립된 언어로 분류하는 경향이 강해졌다.(일본어도 마찬가지다.)

 

둘째, 몽골과 중앙아시아인들의 DNA와 한국인의 DNA는 크게 다르다.

 

현대에 와서 혈통의 근친관계 분석에 가장 신뢰받는 새로운 학문이 유전자(DNA)구조의 분석이다. 그런데 90년대부터 최근까지 거듭된 한국 및 외국학계의 DNA 샘플분석은 한민족과 몽골인(중앙아시아인 포함)은 동일 조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유전자 구조를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인의 유전자는 일본과 중국 화북지역인들과는 서로 동일 조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유사하며, 몽골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계통으로 추정될 정도로 유사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셋째, 몽골지역의 고대 유적에서 발굴되는 백인계 인골DNA와 유적들

 

몽골지역의 최초거주민으로 확실히 역사에 기록된 종족을 꼽으라면 단연 흉노족일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선비, 투르크(돌궐), 위구르등이 있는데, 이들의 고대 조상으로 추정되는 몽골지역의 유골에서 모두 백인계 DNA가 검출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조상은 이제까지 알고 있던 황인종이 아니라 유럽계 아리안족이었단 사실이다.

 

고대에 중국을 위협하거나 정복했던 기마민족들이었던 흉노, 선비, 위구르가 유럽계란 주장은 이미 60년대부터 서구학자들로부터 제기되어 왔었다. 그 계기는 5세기 유럽(로마)을 지배하다시피했던 훈족의 정체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거주하던 백인계임이 유물등을 통해 드러나고, 이들과 유사민족이었던 흉노족의 루트를 따라 연구한 결과 몽골지역에까지 연계된 동일한 계통임이 밝혀지게된 것이다.

 

(고구려 각저총 씨름벽화. 고구려인과 胡族(선비, 또는 돌궐)으로 추정되는 백인이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제까지 밝혀지거나 연구된 성과만 따져도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중앙아시아나 몽골인들이 아니다.

국제적인 연구성과에 의하면, 최초의 기마유목민족이었던 스키타이족(이란계 아리안족)이 대략 기원전 7,8세기경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 지역으로 이주해왔고, 그중 일부가 서기 4세기경쯤 신라지역으로 정착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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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정복자 흉노(선비)족 모용씨

 

현재의 사학계 최대의 논란중 하나는 신라인들의 연원문제다. 그들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

 

1790년경쯤 경주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된 문무왕릉비에 의하면, 자신들(김씨왕족)은 고대 중국의 황제(중국인의 조상) 때부터 제사관을 맡아오던 신분이라고 씌여있다.

 

또한 자신들은 중국의 고위계층이었고(흉노족이란 소린 한마디도 없다.) - 휴도왕(그는 한때 흉노계의 영역에서 흉노귀족의 신분으로 있었던 자였으나, 漢무제때 토벌군에 항복하여 중국의 명문귀족이 되었다.)의 후손으로 신라에 정착한 것처럼 씌여있다.

 

물론 이 내용은 모두 날조한 것이다. 이 비문을 썻던 문무왕대의 김씨정권은 그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서기 4세기는 한때 크게 약화되었던 흉노족이 대 부흥을 하던 시기였다. 범흉노계를 이루던 선비족계열의 호전적인 기마집단이 내몽고지역으로부터 황하강 유역으로 물밀듯이 몰려왔다. 마치 동시대 게르만족의 대 이동과 같은 현상이었다.

 

그들은 한(漢)의 뒤를 이어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晉)를 남부로 밀어내고 중원을 정복했으며, 한때 고구려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동부의 선비족들은 고구려를 밀어내고, 태조왕이래로 지배지로 두었던 유주(幽州 : 북경유역)와 요동을 점령하여, 후연등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고구려를 위협하던 모용씨(慕容皝)은 고구려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패주시키고 개선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수의 선비계 기마무사집단이 신라까지 남하하였는데, 이 무리의 수장이 내물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워낙 소수여서 비록 석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하였으나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였는데, 광개토왕비문에서 보여지듯이 고구려의 배경으로 내정을 장악함과 더불어 외부의 적들인 백제, 왜, 가야를 물리친 것으로 보인다.

 

이 때에 이르러 북방 흉노족 특유의 문화가 깃들인 유물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게 바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금관이다. 지난 80년대 후반 4~5세기 경주의 고분군에서 대규모의 토용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이 토용중에 백인의 모습을 한 토용이 대대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5세기 신라의 귀족 토용. 움푹한 눈에 오똑한 콧날과 구렛나루. 전형적인 아리안

    족의 형상이다.

 

이 토용의 발굴을 통해서 당시의 신라 지배층이 백인계 정권이었고, 이전 70년대부터 서구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스키타이계의 대 이동의 최종 정착지가 신라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분석한 글이 언론에 오르기도 했다. 아마도 당시 신라를 정복한 흉노무사집단은 완전한 백인계 혈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왕들은 내물왕때부터 법흥왕에 이르기까지 모(慕)씨를 성씨로 사용했다(법흥왕의 이름은 慕泰). 이는 중국 사서의 여러 곳에서 입증이된다. 진흥왕때에 이르러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중국측과의 혈연적 관계를 과시하기위해 김씨로 성을 바꾸고 김진흥(金眞興)이란 이름으로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낸다.

 

이 과정은 중국의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문무왕릉비문의 가장 큰 목적은 김알지 후손으로 자신들의 혈통을 위장함과 아울러 같은 계통(선비족)인 당나라 이씨정권과의 유대성을 강조한 내용이다.

 

확실히 신라정권은 고조선-->부여-->고구려, 백제로 이어지는 다수의 예맥족과 더불어 북방으로부터 투입된 백인계 혈통을 우리 민족의 유전자에 남겨준 독특한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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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유전자 루트

 

마지막으로 최근의 언론 보도에 의해서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민족형성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민족의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음을 간추려 본다.

 

최근의 한중일 학자들의 공동 연구결과, 이들 삼국의 공동조상(DNA구조상 가장 중심이 되는)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시작 되었음을 밝혀냈다. 동남아시아에 머물고 있던 한무리가 오랜세월동안 중국 동해안 루트를 따라 북부로 이동해왔고, 대략 중국 화북지방에 정착했음을 확인 하였으며, 이들중 일부가 분열돼서쪽과 북쪽으로 계속 이주하여, 훗날 티벳이나 내몽골 지역의 황인종의 시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내몽골지역은 후에 이주해온 아리안계(흉노)에 의해 접수되지만.황화강 유역에 살던 종족은 그후 산동과 요녕, 한반도, 일본등으로 확산되어 나간 것으로 확인이 되었고, 이들이 오늘날 한국과 중국, 일본조상의 중심적 DNA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이들 삼국(중국 남부지역민은 제외) 인의 DNA구조가 가장 유사하게 나오는 것이다.

 

*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시의 전체 인구중 1/3정도가 한족(漢族)이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 건국의 기틀이 되었던 6부는 중국 이주민이었음을 삼국사기나 중국사서가 증명하고 있다. 진짜 김씨 정권의 조상인 김알지도 한족이었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우리민족의 형성은 큰 줄기가 예맥족 한족(漢族) 해양민족(인도) 극소수 흉노족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유전자와 유물 유적 등의 발굴은 우랄 알타이어계 민족으로만 알고 있어왔던 한민족의 혈통형성과정이 의외란 사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인들은 우리민족에 많은 DNA를 남겨줬다. 그 별로 웃기지도 않는 가슴아픈 옛일을 잠깐 들춰보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의 기록에 따르면, 몽고가 고려의 항복을 받은 후 몽고 병사들에 의한 행패는 전 고려인들에게 재앙이 되었다.

 

어느날 고려정부의 정승을 하던 고관의 저택 앞을 몇명의 몽고병사가 키득거리며 지나가다가 다짜고짜 집안에 들어섰다. 그 집안에선 갑작스럽게 닥친 이들 몽고병사들을 극진히 대접했는데, 실컷 쳐먹고 난 이 오랑캐들은 집안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이 집안의 안주인과 며느리를 발견하고 우루를 몰려들어 가족들이 보는데서 윤간을 하곤 떠났다.

 

수치에 못이긴 며느리는 자살을 했고, 이런 일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 고려인들에게 수시로 발생하는 끔찍한 일상이었다. 수많은 여인들에 대한 성폭행으로 인해 집안파탄과 자살이 이어지자, 결국 정부는 칙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몽고병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집안의 여인들을 가족들이 박해하는 행위를 엄히 금지하며, 몽고병사가 원하면 누구든지 그들의 요구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 떠그럴....

 

이후의 상황은 여러분이 예상한 대로다. 이 나라의 모든 여성은 언제든지 몽고병사들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몸을 허락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했고, 이 현상은 더 나아가 고려에 이상한 풍습까지 몰고 왔다.

 

즉, 더이상 여성들에겐 몽고병사와 관계하는게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영광으로까지 인식이 되었으며, 일부 남편들은 출세를 위해 자기 마누라를 몽고병에게 소개팅 시켜줘서 근사한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신혼 첫날밤엔 인근의 몽고 주둔부대를 찾아가 초야를 대신할 몽고병을 찾기도 했다.

 

또한, 집안 여자가 몽고병사의 아이를 낳으면, 경사로 여겼다. 왜냐하면 힘있는 몽고아빠가 그 집안과 여자를 보호해 줄테니까....또한 주부들이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이 눈치라도 채는 날이면, 자기 애인이 몽고병이라고 둘러 대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몽고놈들의 유전자가 존나게 유입되고, 우리들의 엉덩이에 반점이 새겨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이 후에 결국은 고려에 의해 몽고(원나라)가 망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참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