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박항 신도비명(朴恒 神道碑銘) - 춘천박씨 시조

야촌(1) 2012. 1. 27. 14:14

高麗□□功臣[1면] 春城[2면] 府院君文懿公神[3면] 道碑[4면](篆額)

<전면>
高麗佐命功臣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 春城府院君 贈諡文懿公神道碑

春川朴公諱恒字革之初名東甫

<후면>
新羅始祖王 二十九世景明王, 諱鼎英, 七男, 江南大君彦智公之十一世孫 文懿公, 高麗高宗丁亥生. 登文科, 官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 元勳封春城府院君. 忠烈王辛巳八月乙酉卒, 葬于春川市 北二十里水芝洞 艮坐原, 享年五十五 配大匡夫人, 墓失傳. 有二男, 長元宏 官平章事, 次元庇 官判事. 元宏男安具, 官集賢殿大提學, 元庇男光先光祐光廷光衍, 女適安東權慤. 公 忠孝特立於當世, 才德卓冠於百代, 事見麗史, 名在邑誌. 如無平日實行之有孚, 則那至如此耶. 余聞文懿公之忠孝德行, 未嘗不欽慕矣. 公後孫圭鉉修其譜乘, 以其遺蹟徵余一言, ?實記于樹阡之石, 以圖不朽, 余不敢以不文辭, 遂爲銘. 曰

 

文懿公之 忠孝兩全, 百世遠芳 回仰賢圍. 山高水長 有斐有新, 永懷不忘
司憲大夫行弘文館直提學知製敎 申錫覲撰 歲祀 十月一日
檀紀四三○三年庚戌十月日(1970) 謹具 春川朴氏 宗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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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춘천 신북읍 발산리 삼한골


·인 물 : 박항(1227년[고종 14]∼1281년[충렬왕 7])은 고려시대 인물로 춘천박씨(春川朴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삼한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시조로 모시게 되었다.

 

휘는 항(恒), 초명은 동보(東甫)이고 자는 혁지(革之)이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고려 고종 38년(1261) 몽고군이 침입하여 춘천이 함락되 었을 때, 그가 개성에서 달려와 부모의 시신을 거두려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다른 사 람의 시신 300여구를 찾아 예를 다하여 묻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동면 감정2리에 있었던 구봉서원(九峰書院)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신도비에 의하면 박항의 아들로 박원굉과 박원비가 있다고 하나, 동시대 무렵 최해(崔瀣)가 지은『졸고천백』권2에는 박항의 아들로 박광정(朴光廷) 신도비에는 원굉의 4남 중 3남을 들고 있으니 상고할 만한 일이다.


·현 황 : 박항의 묘는 신북읍 윗샘밭 농민교육원을 지나 삼한골 입구 왼쪽 산밑에 자리 잡고 있다.

1989년에 묘역을 정비하여 구신도비, 신신도비, 신도비명, 묘궁치수기를 단장하였다.

 

신도비는 신석근(申錫覲)이 지었는데 6·25 전란 때에 파손되어 1970년에 새로히 세웠다.

신도비명은 1989년 이춘근(李春根)이 짓고 황재국(黃在國)이 전(篆)하였으며 묘궁치수기는 1989년에 춘천 박씨 종중에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