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성오당집(省吾堂集) - 이개립(李介立)

야촌(1) 2010. 9. 13. 06:56

■ 이개립(李介立)

  

성오당집(省吾堂集)은 1776년(영조 52)에 乾. 坤의 3卷 2冊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도서내용]

1776年 간행된 임란의병장 이개립(李介立)선생의 문집《성오당집(省吾堂集》>목판본 3卷, 의 乾 . 坤 2冊이다. 

크기는 23 × 29.5cm이다.

 

[성오당집 해제]

임란 의병장 성오당 이개립(省吾堂 李介立, 1546~1625)의 시문집이다.

이개립의 자는 大中, 호는 성오당(省吾臺), 본관은 경주(慶州), 제정공 달충(霽亭公 達衷)의 8대손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正三品) 준(竣)의 아들이다.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86년(선조 19)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從九品)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퇴하고, 1591년(선조 24)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4~1637)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는데 부족한 식량과 군량의 조달에 공이 컸다. 

이러한 공에 의하여 수령을 감당할 인재 30명이 천거된 중에 포함되어 1594년 자여찰방(自如察訪)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남천현감(狼川縣監/강원도 남천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6년 산은현감(山隱縣監)에 임명되고, 정유재란을 당하여 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黃汝一, 1556-?, 호는 海月軒)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으나, 병마절도사 김경서(金景瑞, 1564~1624, 시호는 襄毅)가 의병을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은 데에 사감을 품자, 고향에 돌아가 오로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성오당집(省吾堂集)》은 모두 3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권1에는 五言絶句 32수(白雲洞翠寒臺卽事, 次姜德叟韻 외), 五言四韻 44수(在渚谷阻雨口號, 次謝鄭淸風子允穆 외), 七言絶句 56수(萬曆庚辰冬陪嘯皐先生遊凝石寺伏次詩 외) 등이, 권2에는 七言四韻 24수(留別朴景一惺同年詩 외), 賦 4편(神明舍 외), 書 14편(上天將李如松書 외) 등이, 권3에는 雜著 2편(伯氏遺事 외), 序 1편(贈別鄭子靜序), 祭文 1편(祭伯氏文), 遺墨, 補遺로 書 1편(上巡察使鶴峰金先生誠一書) 등이 수록되어 있고, 그 뒤에 附錄으로 상권에 行狀․墓碣銘․墓誌銘․師友錄․祭文․奉安文 등이, 하권에 輓詞․省五堂入詠․養拙堂序․養拙堂八景․敬呈省五堂․跋 등이 실려 있다.

 

한편 권말에는 ‘附歸溪先生誄徐涵齋文’이 부기되어 있는데, 귀계선생(歸溪先生)은 이개립의 맏형(李中立)으로 세간에 전해지는 유문을 취하여 合刊한 것이다. 권말에 수록되어 있는 발문에 따르면, 《省吾堂先生文集》은1700년대 초반 후손(葛坡公)들이 저자의 유문을 수집하여 간행하려하다가 미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후손 구경(龜鏡) 등이 다시 힘을 모아 저자와 왕래한 사람들의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유문을 일부 발굴하였는데, 趙普陽. ․張泰祺 등이 義山書院에서 문집의 편차를 정하고, 大山 李象靖(1711-1781)은 서문을 지었다. 1776년(영조 52)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필자 소장본/간행연도 : 1937년(소화 12) 

 

 

 

 

 

 

 

 

 

 

 

 

성오당집(省吾堂集)은 1776년(영조 52)에 간행된 후 161년 후인 1937년(소화 12) 아래와 같이 재간(再刊) 되었다. 

[인쇄]  1937년(소화 12) 08월 10일

[발행]  1937년(소화 12) 10월 05일

[저작 겸 발행인]  경북 영주군 장수면 갈산리 787번지 이재호(李宰虎)

[인쇄인]  경북 영주군 장수면 갈산리 12번지 이종성(李鍾星)

 

■ 성오당 이공의 문집서문(省吾堂李公文集序)

 

이상정(李象靖)  撰

 

유자(有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근본에 힘쓰나니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긴다. 효도와 공손은 인(仁)을 행하는 근본인저!”라고 하였다. 대저 사람의 본성에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이 있으니 인이 으뜸이다.

 

인의 활용에 백 가지 행실과 만 가지 선행이 있지만 효도와 공손이 근본이니, 근본이 확립되면 불이 타오르듯 샘물이 흘러가듯 자신의 몸에서 일가로 미치고 마침내는 만물에까지 미치게 될 것이다. 

 

진실로 그 근본을 확립하지 않고 한갓 작은 행실과 사소한 예절에 연연한다면 어찌 군자의 도를 말하기에 충분하겠는가. 성오(省吾) 선생 이공(李公)은 곧고 성실한 자질을 타고나서 각고의 노력을 더하셨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경각도 잊지 않았으니, 어버이가 병이 들었을 때는 하늘에 기도하고 변을 맛보아 병세를 헤아려서 검루(黔婁)의 정성이 있었고, 돌아가시자 피눈물을 흘리며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자고(子羔)와 이련(二連)의 행실이 있었다.

 

맏형을 아버지같이 섬겨서 살아 계실 때에는 우애와 공경을 다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슬픔과 아픔을 지극히 하였으니, 그 정성이 종종 신명과도 통하였다. 아! 몸을 닦아 집안에서 실행한 효도와 공손이 이와 같으니, 인을 행하는 근본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 도가 생겨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임진왜란을 만나서는 의병을 모아서 사우들을 창도(唱導)하셨다. 선조대왕의 애통한 조서(詔書)를 읽어 주니 밭 가는 농부도 흐느껴 울었고, 둔전(屯田)의 임무를 맡아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조치하였다.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되어서는 신음이 변하여 노랫소리가 되도록 하였고,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것같이 곤경에 처한 백성들을 편안한 방석 위에 있는 것처럼 해 주었다. 위난 속에서 충성과 의리를 드러내고 실행으로 재주와 업적을 드러낸 것에서도 근본이 확립된 효과를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혼탁해지자 초연히 자신을 다스려서 지붕을 바라보며 남몰래 탄식하였고,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재능에 따라서 과정을 설정하여 포상을 하면서 부지런히 배우게 하였다. 출처(出處)와 은현(隱顯)의 의리며 효도와 교육의 공로는 정성스레 군자가 자신을 지키고 사물을 완성하는 도리였다.

 

험난한 지경을 겪고서도 행동에 흠이 없고 수명이 팔순을 넘기고도 덕이 더욱 높아서, 아름답게도 태평성대의 일민(逸民)이 되었고 유림(儒林)의 모범이 되셨다. 그러나 그 도는 효도와 공손에 근본을 두었을 뿐이었고, 효도와 공손의 실제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바탕을 둔 바가 있었다.

 

공은 어려서 학봉(鶴峯) 김 선생을 따라 배워서 학문을 하는 큰 방도를 얻었다. 

과거 보는 일을 달갑잖게 여기고 경전에 침잠하여 방과 책상을 깨끗이 치우고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읊고 외웠으니, 충분히 무젖어서 갈고닦은 나머지 길러진 그 깊은 조예의 공력은 반드시 남들이 모르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일상의 평범한 행동에 나타난 것이 모두가 학문의 힘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촌구석에서 오로지 한 가지 절개만 줄기차게 지키는 사람과는 다른 것이었다. 당시 학생들의 믿음이 몰리고 고을 선비들이 다투어 사모하며 우러러 존경하였는데,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돌아가시고 나서도 여러 차례 조정에 소문이 올라가서 아경(亞卿 판서)에 증직되고 서원에 모셔져서 영원토록 제사를 받게 되셨으니, 사람들에게 심어진 떳떳한 본성과 덕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로 이와 같았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과 아름다운 행실이 내면에 축적되어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면 또한 어찌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남긴 글이 흩어져서 평소 공부에 힘쓴 순서를 상고할 수는 없고, 다만 제현이 기록한 문장에 의지하여 그 기상과 풍채의 만에 하나만을 상상하여 그려 볼 수 있을 뿐이다. 아, 개탄스러운 일이로다!

 

잔결되고 남은 시문 몇 편만을 겨우 얻었으니, 태산에 털 한 올도 되기에 부족하건마는, 그 말이 충후하고 간절하여 들뜬 아름다움이나 예쁘게 꾸민 모습이 전혀 없고, 시 또한 충담(冲澹)하고 한원(閒遠)하며 마음의 참모습을 그대로 풀어낸 것이라서 참으로 어진 사람의 말이다.

 

5대손인 기성랑(騎省郞 병조 좌랑) 이광배(李光培)와 그 족질(族姪) 이귀경(李龜鏡)이 이것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잘못된 곳을 교정해 달라고 하면서 책머리에 서문을 하나 써 달라고 청하였다.

 

스스로 생각하니 늦게 태어난 보잘것없는 학도가 어찌 이 일에 참여할 수가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하니 맏형이신 구계(龜溪 이중립(李中立)) 선생께서 일찍이 이 고을에 우거하실 때에 선생께서 때때로 왕래하며 성문(省問)하셨으니, 실로 고운(孤雲)과 남수(南水) 사이에 자취가 남아 있다.

 

어려서부터 마을의 부로(父老)들로부터 그 고상한 기풍과 심원한 운치를 익히 들어 왔으므로 말채찍을 잡고 모시고 싶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의리상 어찌 감히 끝내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행장과 묘갈문을 바탕으로 하고 나의 개인적 소감을 덧붙여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길잡이를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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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省吾堂李公文集序

 

有子曰君子務本。本立而道生。孝弟也者。其爲仁之本歟。夫人之性。有五常而仁爲之長。仁之用。有百行萬善而孝弟爲之本。本之立焉則火然泉達。自身而家而及於物。苟無其本而徒規規於細行疎節。曷足以語於君子之道哉。省吾先生李公。稟貞愨之資。加刻厲之工。事親至孝。頃步不忘。病而禱天嘗糞。有黔婁之誠。沒而泣血廬墓。有子羔二連之行。事伯兄如事嚴父。生盡友敬。喪極哀痛。其誠意往往交於神明。噫。其孝弟之修於身而行於家如此。爲仁之本。在玆矣。其道之生也。孰將禦焉。當龍蛇之亂。糾合義旅。爲士友唱。讀哀痛之詔而感涕甿隷。受耕屯之任而盡瘁措畫。及膺百里之命則變呻吟爲謳歌。濟溝壑而袵席。其忠義之著於危難。才猷聲績之見於施爲者。亦足以見其本立之效。而世昏則超然自靖。仰屋而竊欷。斅學則隨才設科。式穀而蛾述。其出處隱顯之義。錫類育英之功。恂恂乎君子守身成物之道矣。備經險阻而行不玷。壽躋大耋而德彌卲。粹然爲聖世之逸民。儒林之儀表。然其道則本乎孝弟而已矣而能盡乎孝弟之實。則抑又有所本者矣。公少從鶴峯金先生游。得聞爲學之大方。不屑擧業。沈潛典訓。簾几蕭然。端坐諷誦。涵淹飽飫之餘。其玩養深造之功。必有人不能與知者矣。然則其見於日用常行者。皆本諸問學之力而非如鄕里一節篤行之士也。當時學子之信嚮。鄕士之趨慕而歸仰焉。自有不期而然者。旣沒而屢聞于朝。褒贈亞卿。俎豆畏壘。永享百世之祀。秉彝好德之心。其在人者固如此。而非至誠懿行有以積中而彪外。亦烏能久而不渝哉。今遺文散佚。無以攷其平日用功之次第。而只憑諸賢紀載之文。想慕其氣象風範之萬一而已。嗚呼其可慨也已。詩文若干篇。僅得於殘朽爛脫之餘。不足以備岱泰之芒豪。然其言忠厚懇惻。絶無浮艶嫺飾態。詩亦冲澹閒遠。陶寫性靈。藹乎仁人之言也。來孫騎省郞光培。與其族姪龜鏡。攜以過象靖。俾攷訂其訛謬。且徵一言以識其卷首。自惟晩生蔑學。何足以與此。竊念伯子龜溪先生。嘗寓於是邦。先生時往來省問。實有遺躅在孤雲南水之間。幼從村父老。習聞其高風遠韻而致執鞭之慕焉。今日之役。義何敢終辭。遂以狀碣文字爲按本。而竊附以所感於心者。爲讀是卷者引路云。

 

[각주] 

[주01]성오당(省吾堂) 이공(李公)의 문집 : 이개립(李介立, 1546~1625)의 《성오당집(省吾堂集)》을 말한다. 후손인 이광배(李光培)가 편집 간행하였으며, 모두 3권 2책이다

 

[주01]군자는……근본인저 :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유약(有若)의 말이다.

 

[주02]검루(黔婁)의 정성 : 검루는 육조 시대 남조 양(梁)나라의 효자인 유검루(庾黔婁)를 말한다. 아버지인 유이(庾易)가 병들었을 때 의사가 병세를 알려면 변을 맛보아야 한다고 하니 바로 변을 맛보아서 병세를 가늠하였고, 매일 밤 북두칠성에게 자신이 대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하늘이 감동하여 유이의 수명을 그달 말일까지 연장해 주었다고 한다. 《梁書 卷47 孝行列傳 庾黔婁》

 

[주03]자고(子羔) : 공자의 제자인 고시(高柴)를 말한다. 공자가 그의 효성을 칭찬한 말이 《대대례기(大戴禮記)》 〈위장군문자(衛將軍文子)〉에 보인다.

 

[주04]이련(二連) :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을 말한다. 춘추 시대의 효자들로 공자가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禮記 雜記下》

 

[주05]지붕을……탄식하였고 : 누워서 천정의 대들보만 바라본다는 뜻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형편을 말한다. 

후한의 한랑(寒朗)이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입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천정을 바라보며 남몰래 탄식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41 寒朗列傳》

 

[주06]아경(亞卿)에……모셔져서 : 이개립은 숙종 때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영주(榮州)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주07]고운(孤雲)과 남수(南水) 사이 : 고운은 의성의 고운사(孤雲寺)를 말하고, 남수 역시 구촌(龜村) 부근의 절이었던 것 같다. 《성오당집》 권1 〈차남수승사운(次南水僧舍韻)〉 시의 서문에 “갑술년 가을 7월 1일에 나는 구촌에 인사하러 왔다가 여러 날 머물렀는데, 남수의 승사에서 더위를 피하였다.

 

이곳은 곧 소년 시절에 노닐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 시는 성오당의 맏형인 구계(龜溪) 이중립(李中立, 1533~1571)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