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정정표암지(訂正瓢巖誌)/1931년간

야촌(1) 2010. 8. 13. 03:22

■ 정정표암지(訂正瓢巖誌) - 1931년 간

 

↑책의 크기 : 20Cm x 20.3Cm 

 

↑필자 소장본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에 관한 사적 및 그에 대한 추모 사업의 내력을 서술함으로써 시조에 대한 추모의 정을 선양하고 동종(同宗) 사이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재단법인 표암재 기성회(財團法人瓢巖齋期成會)에서 편찬한 책이다.   

 

모두 3편 1책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권두에는 본서의 편찬 목적을 밝힌 외손 조경섭(曺競燮)의 서문과 범례(凡例)·목차(目次) 및 경주군 천북면 동천리 석탈해왕릉(慶州郡 川北面 東川里 昔脫解王陵) 옆 표암재사(瓢巖齋舍) 부근의 개략적인 지도인 표암재사도(瓢巖齋舍圖)를 비롯하여‚ 표암재사(瓢巖齋舍)를 중심으로 경주부(慶州府)의 주요 시설과 유적을 표시한 경주읍 부근약도(慶州邑附近略圖)가 있다.  

 

상편(上編)은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에 관한 사적 및 경주의 연혁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흥지승람(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역사서를 인용하여 경주의 연혁을 밝힌 진한기(辰韓紀). 경주부 건치연혁(慶州府建置沿革).신라직관지(新羅職官志)와‚ 하늘로부터 경주 표암봉(瓢巖峰)에 강림한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촌장 李謁平이 선도성모(仙桃聖母)의 도움으로 六村의 촌장과 함께 라정(蘿井)에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얻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며‚ 그러한 공으로 인하여 아찬(阿飡)에 임명되고 A.D.32년(신라 유리왕 9)에 李氏의 성을 내려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시조 사적(始祖事蹟)등 4편의 글이 그것이다. 

 

그밖에 <분적도(分籍圖)>에서는 경주(慶州).흥양(興陽).원주(原州).재령(載寧).아산(牙山).가평(加平).합천(陜川).차성(車城)·우계(羽溪) 등 始祖 李謁平에서 유래하여 慶州李氏에서 나뉘어진 제파(諸派)의 연원과 분파된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였으며‚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지은 동종계서(同宗稧序)는 B.C. 69년(漢地節元年) 이래 이어져 온 李氏의 유구한 내력을 서술하고 同宗間의 화합과 친목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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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中編)에서는 시조 이알평(李謁平)을 기념하여 비각( 碑閣)을 건립하고 중수(重修)하게 된 연유와 과정을 서술한 류허수비시답종인원구서(遺墟竪碑時答宗人元龜書).유허비문(遺墟碑文).수비건각유감운(竪碑建閣有感韻). 표암명(瓢巖銘). 비각중수후납토지(碑閣重修後納土誌). 비각중수기(碑閣重修記). 수문창설기(水閘創設記). 비각중수기(碑閣重修記). 비각중수시개기고유문(碑閣移建時開基告由文). 비각이건상량문(碑閣移建上梁文). 비각이건기(碑閣移建記). 비각이건기후서(碑閣移建記後叙). 단소상향축문(壇所常享祝文). 예조관문(禮曹關文). 비각수설직(碑閣修稧識). 화수계첩서(花樹稧帖序). 화수계첩 발(花樹稧帖跋)등 17편의 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의하면‚ 1787년(정조 11) 후손 이집성[李集星 : 1741년(영조 17)~1704년(정조 18)]이 영천(永川-오늘날 영주, 영양)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표암(瓢巖)이라는 두 글자를 바위에 각자(刻字)하고‚ 1806년(순조 6)에는 부근에 세거(世居)하던 당령(掌令) 이진택(李鎭宅 : 1738-1805)과 오은공 이경일(鰲恩公 李敬一 : 1734-1820)·, 파서공(琶西公)  이집두(李集斗 : 1744-1820) 등이 종중에 건의하여 비(碑)와 비각(碑閣)을 세우고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거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846년(헌종 12)에는 동천공 이계조(桐泉公 李啓朝 : 1793-1856)가 비각(碑閣)을 중수(重修)하고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 : 1814-1888)등이 그 경위를 기록하였으며‚ 1878년(고종 15)의 수해로 말미암아 비(碑)와 비각(碑閣)이 피해를 입게 되자 이듬해인 1879년(고종 16)에 연산현감蓬山縣監) 이한정(李漢井)이 중심이 되어 비(碑)와 비각(碑閣)을 표암(瓢巖) 정상으로 이건(移建)하였다.   

 

하편(下編)에는 그간의 사적을 정리하고 1900년대 이후 표암재사(瓢巖齋舍)가 건립되기까지의 과정 및 ≪訂正瓢巖誌≫의 간행 과정을 서술한 표암재사창건취지서(瓢巖齋舍創建趣旨書).표암재사창건통고문(瓢巖齋舍創建通告文).재사건축시개기고유문(齋舍建築時開基告由文).상량문(上樑文).수리기(修理記).재사기(齋舍記)3편. 보원당기(報遠堂記).서표암지후(書瓢巖誌後).발(跋)3편. 후직(後識)3편 등 모두 1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비각(碑閣)의 보수와 제사 등에 소요되는 경비를 추렴하고자 결성된 화수계(花樹稧)가 근간이 되어 1921년에 5가(架) 15간(間)의 재실(齋室)을 건립하고 표암재(瓢巖齋)라 이름 하였으며, 1929년 9월 이래 그간의 사실을 종합·정리하여 ≪訂正瓢巖誌≫의 편찬 사업을 시작하여1931년 慶州에 서활자본으로 간행하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부록으로 수록된 부 경주고적도(附慶州古蹟圖)에는 표암재(瓢巖齋)‚ 시조발상지(始祖發祥地)‚ 나정(蘿井)‚ 오릉(五陵)‚ 숭덕전(崇德殿)‚ 숭신전(崇信殿)‚ 숭사전(崇惠殿)‚ 무열왕릉(武烈王陵).구부(龜趺).월성(月城)‚ 계림(鷄林).포석정지(鮑石亭址).박물관(博物館).임해전지(臨海殿址).안압지(雁鴨池).첨성대(瞻星臺).불국사(佛國寺).석굴암(石窟庵)등 경주에 소재한16개의 주요 유적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사진이 첨부되어 있으며‚ 마지막의 <財團法人 瓢巖齋期成會 任員錄>에는 會長 이기영(李耆榮)을 비롯한 33인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