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성산군 이조년 묘지명(星山君 李兆年 墓誌銘)

야촌(1) 2012. 7. 31. 18:18

 유원 고려국 성근익찬 경절공신 중대광 성산군 증시 문열공 이공 묘지명

 (有元 高麗國 誠勤翊贊 勁節功臣 重大匡 星山君 贈諡 文烈公 李公 墓誌銘)

 

 이제현 찬(李齊賢 撰)

 

예로부터 묘소에는 지석(誌石)이 있어 왔다.

세대가 이미 멀어지면 혹 묘소가 무너질 수는 있으나 그 지석을 보면 누구를 위하여 간직해 둔 것인 줄을 알게 되니, 진실로 차마 폐할 수 없는 것이며, 사군자(士君子)가 그 어버이를 장사할 적에 뒤로 미룰 수 없는 것이다.

 

성산군 이공이 졸한 지 1년이 넘어서 내가 비로소 공을 위하여 묘지명을 찬술하는 것은, 대개 연유(緣由)가 있어서이다.

조적(曹頔)의 변란 때에 천자가 영릉(永陵-고려 충혜왕의 묘호)을 불러 입근(入覲)하게 하였는데, 승상(丞相) 백안(伯顔)이 숙감(宿憾)을 품고 영릉으로 하여금 조적의 무리와 마주 대하여 서로 변명(辯明)하게까지 하자, 공이 강개히 분발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승상과 면대하여 하소하면 그 뜻을 돌릴 수 있지마는, 창을 벌여 세우고 문을 지키니 각하(閣下)에 나아가 호소하지 못하겠도다.

 

다행히 백안이 성남(城南)으로 나아가 사냥한다 하니, 내가 마땅히 그 길가에서 상서를 하고 그 말발굽 아래 밟혀 죽더라도 주상의 입장을 밝히려 한다. 그대는 붓을 잡아 나의 상서를 써주게.” 하므로, 밤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닭이 울기를 기다려 출발하려 하였는데, 백안이 마침 이날 패(敗)하였다.

 

내가 공의 의에 감격하여 말하기를, “죽고 사는 일은 미리 기약할 수는 없으나 공은 나보다 20년 위의 어른이니, 돌아가시면 감히 비문(鄙文)을 아끼지 않고 유당(幽堂)의 명을 짓겠습니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허락하였다.

 

영릉이 본국으로 돌아온 다음해 겨울에, 왕이 북궁(北宮)으로부터 걸어 송강(松岡)에 이르러 참새를 잡으니, 공이 지름길로 나아가서 무릎꿇고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 명이(明夷)의 때를 잊으셨습니까?

 

이제 포악한 소년들이 위엄을 빌어 부녀자를 겁탈하며 재물을 빼앗으므로, 백성들이 삶을 즐기지 못하여 곧 화가 이르러 지난날보다 더할까 두렵습니다. 이를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사소한 오락을 즐기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영릉이 처음에는 심히 노하였다가 이윽고 사례하여 보냈다. 나가다가 종자(從者)가 포악한 소년에게 구타당하였으니, 그들의 일을 주상에게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은 곧 고향으로 돌아가 있으면서 인간의 일을 관계하지 않았다.

아! 경(經)에 이르기를, “제후에게 간쟁하는 신하 5인이 있으면 비록 무도(無道)하여도 나라를 잃지는 않는다. ”하였는데, 공이 떠난 뒤에도 계속하여 말을 할 수 있는 강직한 선비가 4~5명만 있었더라면 악양(岳陽)의 욕(辱)을 거의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이 졸하니 그의 손자 인복(仁復)이 복제(服制)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행장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할아버지께서 이명(理命)으로 저에게 전의 말을 증거하면서 명을 빌라 하였으나, 장사할 날짜는 가깝고 길은 멀어서, 아뢰지 못하였다가 이제 감히 여쭙니다.” 하므로, 이에 사양을 할 수 없어 삼가 그 행장을 보고서 짓는다.

 

공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조년(兆年)이며 자는 원로(元老)이니, 경산부 용산리(京山府龍山里) 사람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돈문(敦文)이요, 조(祖)의 휘는 득희(得禧)요 고(考)의 휘는 장경(長庚)인데, 모두 부리(府吏)를 지냈다. 고는 뒤에 모관(某官)으로 추증하였고 비(妣) 모씨(某氏)는 모군부인(某君夫人)으로 추증하였다.

 

공은 나이 17세에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안남부 서기(安南府書記)에 임용되었다가, 진주목사(晉州牧司)와 단은사 통문서(鍛銀事通文署)와 전참 강릉부(典籤江陵府)로 옮겼고,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승진되었다가 예빈 내급사(禮賓內給事)에 전보(轉補)되었으며, 나가서는 합천군수(陜川郡守)가 되었었고, 들어와서는 비서랑(祕書郞)이 되었다.

 

전 비서승(祕書丞)이었는데 기용되어 봉선대부 사헌장령(奉善大夫司憲掌令)이 되었다. 이로부터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에 이르고 벼슬은 정당문학 상호군(政堂文學上護軍)에 이르렀으며, 관직(館職)은 진현대제학(進賢大提學)에 이르렀는데,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의 호를 하사하였으며, 성산군(星山君)은 봉호요. 문열공(文烈公)은 시호다.

 

공의 위인(爲人)이 키는 작지만 재기(才氣)가 정한(精悍)하여 뜻이 확실하고 과감히 말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많았 으며, 그의 대절(大節)로 더욱 칭찬할 만한 일이 다섯 가지가 있다. 

 

대덕(大德 元 成宗,1307)의 연호) 말년에 공이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元)에 입조(入朝)하였을 적에 충선왕(忠宣王)이 와서 문안을 하니, 여러 신하가 실의(失意)하고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도 모두 의심을 품고 외축(畏縮)되어 달아나 숨었으나, 공은 신실하게 다른 생각 없이 오직 행동을 삼갔다.

 

예(例)에 의하여 먼 곳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와서 향리(鄕里)에 거처한 지 13년이 되도록 일찍이 한 번도 자기의 죄가 아님을 호소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요, 여러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충숙왕(忠肅王)을 참소하여 5년간 원에 억류되자 16명의 선비와 한 장 종이에 서명(署名)하여 대궐에 나아가 청하였고, 공이 마침내 혼자 4천리를 달려가 그 글을 바친 것이 둘이요,

 

처음에 영릉이 조칙을 받들고 원에 가서 숙위(宿衛)할 적에 춘추(春秋)가 젊으셔서 자못 삼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자, 공이 경계할것을 생각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됨을 인연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신, 귀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천자를 섬기시니, 마땅히 날마다 더욱 삼가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예의를 버리고 정욕을 방종(放縱)히 하여 누(累)를 부릅니까?

 

그러나 이것은 전하의 과실이 아니오라, 전하께서 아보(阿保 보모(保姆))의 집에서 성장하셨으므로 함께 노는 사람에 무뢰자(無賴子)가 많았고, 그 뒤에 박중인(朴仲仁)ㆍ이인길(李仁吉) 등이 실로 좌우에 있었으니, 전하께서 누구에게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았겠습니까?

 

대개 유자(儒者)는 비록 박졸(朴拙)하나, 모두 경서를 익히고 염치(廉恥)를 알거늘, 전하께서는 그들을 지목(指目)하여 사개리(沙箇里)라고 하시니 이 무슨 말입니까?

 

전하께서 영행(佞倖)의 무리를 멀리하시고 유아(儒雅)한 선비와 친하시어, 행실을 고치고 스스로 신칙하시면 가하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있으니 엄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영릉이 그의 말에 견디지 못하여 담을 넘어 달아났으나, 그 뒤에 자못 생각하였으니 셋이요,

 

백안에게 죽음으로 간절히 간하려 한 것과 용맹스럽게 가버린 것 등. 두 가지를 합하여 다섯이니, 아, 어질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은 지원(至元) 6년(1269) 모월 모일에 낳았고 지정 3년(1343) 5월 기사일(己巳日)에 졸하였다. 5월 신묘일(辛卯日)에 장사지냈는데, 묘는 그 고을의 부동(釜洞)에 있다.

 

부인은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감찰대부(監察大夫) 윤의(允宜)의 딸이며, 아들은 하나인데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인 포(褒)이고 손자는 7인이다. 큰손자는 곧 인복으로 우부대언 좌간의대부(右副代言左諫議大夫)이니, 일찍이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담(膽)은 몸보다 크고/ 瞻偉於身

질(質)은 문(文)보다 승하였도다./ 質愈於文

 

근면으로 정사에 임하였고/ 勤以從政

지성으로 임금을 섬겼도다./ 誠以事君

 

이미 봉작되고 천수를 누렸으며,/ 旣爵而壽

아들과 손자를 두었도다./ 有子與孫

 

하늘이 복주지 않았다 이를진대/ 謂天不賚

마을의 문(門)에 와서 볼지어다./來視里門。

 

[각주]

 

[주01] 명이(明夷)의 때 : 명이는 《주역(周易)》의 괘명(卦名)인데, 어진이가 뜻을 얻지 못하고 참소와 농간을 두

             려워하여 그 지혜를 나타내지 못하고 숨는 일. 여기서는 충혜왕(忠惠王)이 원(元)에서 돌아와 즉위하였다가

             (1331) 이듬해 충숙왕(忠肅王)이 복위(復位) 함에 따라 다시 원으로 들어가 1340년에 복위(復位)할 때까

             지 어려웠던 일을 말한듯하다.

 

[주02] 악양(岳陽)의 욕(辱) : 충혜왕(忠惠王)이 혼란한 정치를 하자 원(元) 나라에서 1343년 이를 응징하기 위하

             여 사신을 보내어 압송, 게양(揭陽)으로 귀양가던 도중 이듬해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를 말한다.

 

[주03] 사개리(沙箇里) : 당시 몽고어(蒙古語)로 유생(儒生)이라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물정에 어두운 서생(書生)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출전] : 익재난고 제7권

 

 

↑성산군 이조년 화상

   [생졸년] 1269년(원종 10)~1343년(충혜왕 복위 4).

 

성산군 이조년의 영정은 성주이씨 경무공파 종친회에서 2점이 전해왔는데 그 중 한 점(경북도유형문화재 제245호)은 2009년 9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위탁됐고, 또 한 점인 본 영정은 2010년 2월 3일에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위탁된 것이다. 

 

가로 79㎝×세로 135㎝의 이 이모본의 흥미로운 점은 왼손이 매우 어색하게 들려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조년의 후손 이문건『李文楗,1494년(성종 25)∼1567년(명종 22)』과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년(중종 11)∼1568년(선조 1)]은 1559년 이조년을 배향하기 위해 <영봉서원(迎鳳書院: 조선(朝鮮) 시대 선조(宣祖) 임인년(1602)에 세운 충현사(忠賢祠)의 후신)>을 건립했다. 

 

그러나 이조년의 초상화를 본 율곡 이이 등 유학자들이 이조년의 영정에 염주가 손에 들려진 장면을 보고는 "호불(好佛)한 인물을 후학의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며 서원 배향에 반대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1825년께 영정을 다시 그리면서 원본에 그려져 있던 염주가 삭제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대부분의 이모본은 영정을 똑같이 옮겨 그렸지만, 이번에 위탁받은 이조년 영정은 이모본이라기 보다는 개모본(改摹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고려 말 관복 고증에 좋은 역사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야촌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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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元高麗國誠勤翊贊勁節功臣,重大匡星山君。贈諡文烈公李公墓誌銘

 

익재 이제현 찬(益齋 李齊賢 撰)

 

墓之有誌。古也。世代旣遠。或有崩隳。見其誌。知其爲誰所藏。固有不忍不掩焉者。士君子葬其親。所不可後者也。星山君李公卒逾年。余始爲之譔銘。蓋有由焉。曹頔之變。詔徵永陵入覲。至則丞相伯顏蓄宿憾。至使與不臣臣。兩造而置辭。公慷慨發憤謂余曰。吾面訴丞相前。其意可回。列戟守門。莫叫其閽。幸其出田城南。吾當上書道左。碎首馬蹄之下。死明吾君。吾子其把筆書吾書。夜起沐浴。鷄鳴將行。伯顏適以是日敗。余感其義。語之曰。死生不可期。然公長我且二十歲。有不諱。不敢愛鄙文以銘幽堂。公笑許之。永陵復國。明年冬。嘗步自北宮。彈雀于松岡。公徑造跪曰。殿下寧忘明夷之時乎。今惡少假威。略婦女。攘貨財。民不樂其生。朝夕禍至。恐往者之不啻。此而不卹。顧玩細娛乎。永陵始甚怒。已而謝遣之。旣出。從者爲惡少所歐。以其言己事也。公卽歸臥故園。不交人間事。嗟乎。經曰。諸侯有諍臣五人。雖無道。不失其國。公之去也。若有骨鯁之士能繼而言之者四五輩。岳陽之辱。其亦庶乎免夫。公沒。其孫仁復。服闋如京。授行狀。且曰。大父理命。俾徵前言丐銘。葬近而塗遠不及相聞。玆敢告。於是乎無以爲辭也。謹受其狀而次之。公姓李氏。諱兆年。字元老。京山府龍山里人也。曾祖諱敦文。祖諱得禧。考諱長庚。皆爲府吏。考後贈某官。妣某氏。贈某郡夫人。公年十七。以鄕貢進士。登第丙科。調安南府書記。移晉州牧司錄錄事。通文署典籤江陵府。遷通禮門祗候。轉禮賓內給事。出知陜州。入爲郞祕書。以前祕書丞。起爲奉善大夫司憲掌令。自是階至重大匡。官至政堂文學上護軍。館職至進賢大提學。賜號誠勤翊贊勁節功臣。星山君。爵也。文烈公。諡也。公爲人短小精悍。確於志而敢於言。所歷多聲績。而其大節尤可稱者有五。大德末。公從忠烈王朝京師。忠宣王來問安。群僚素儻王宋。皆懷疑縮縮走匿。公恃無他。進退惟謹。例遠竄。歸而居鄕十三年。未嘗一出言自訟其非罪。一也。群不逞訟忠肅王于朝。見留五年。公與十六士署一紙。欲赴闕以請。公竟獨走四千里獻其書。二也。初。永陵奉詔宿衛。春秋富。頗以不謹聞。公思有以誡之。因告歸。進曰。殿下與大臣貴戚。比肩事天子。宜日愼一日。何乃棄禮縱情以速累乎。然此非殿下之過。殿下長於阿保之家。所共遊多無賴子。其後朴仲仁,李仁吉。實左右之。殿下孰從而聞正言見正事乎。夫儒者雖朴拙。皆能習經書識廉恥。殿下目之爲沙箇里。此何等語耶。殿下能遠佞倖之徒。而親儒雅之士。改行自飭則可。不然。天威咫尺。其嚴乎。永陵不能堪其言。踰牖走。後頗念之。三也。幷欲死於伯顏。切諫而勇去。二者而五也。嗚呼。可不謂賢哉。公至元六年己巳某月某甲子生。至正三年癸未五月己巳卒。葬以其月辛卯。墓在其鄕之釜洞。夫人草溪鄭氏。監察大夫允宜之女。一子曰褒。密直副使上護軍。孫七人。長卽仁復。右副代言左諫議大夫。嘗射策皇朝制科云。銘曰。

膽偉於身。質愈於文。勤以從政。誠以事君。旣爵而壽。有子與孫。謂天不賚。來視里門。

 

출처>益齋亂稿卷第七 /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