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춘헌 최문도 묘지명(春軒 崔文度 墓誌銘)/全州崔氏

야촌(1) 2012. 7. 31. 22:28

 유원 고려국 광정대부 도첨의 참리 상호군 춘헌선생 최양경공 묘지명

(有元 高麗國 匡靖大夫 都僉議 參理 上護君 春軒先生 崔良敬公 墓誌銘) 

 

이제현 찬(李齊賢 撰)

 

춘헌(春軒) 최 양경공(崔良敬公)의 휘(諱)는 문도(文度)요, 자(字)는 희민(羲民)이다.

54세 되던 지정(至正) 5년(1345) 6월 계축일(癸丑日)에 졸하였으며, 그해 8월 임신일(壬申日)을 택하여 옥금산(玉金山)기슭에 장사하여 선영(先塋)에 부(祔)하였으니 예(禮)다.

 

아들 사검(思儉)은 먼저 죽었고 손자는 모두 어리며, 맏사위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정보(鄭誧)는 경사(京師)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둘째사위인 판도정랑(版圖正郞) 민선(閔璿)이 나 부인(羅夫人)의 명으로 나에게 글을 빌어 돌에 새겨 광중(壙中)에 넣으려고 하였다.

 

나는 이미 늙어 글을 찬술하는 데에 나태하나, 스스로 생각건대 평생의 지기(知己)였으니 의리에 사양할 수 없으므로, 붓을 잡아 첫머리에 「춘헌선생 묘지(春軒 崔文度 墓誌銘」라고 썼더니, 어떤 사람이 나에게 힐문하기를, “춘헌이 장관(將官)으로부터 일어났고 또 그의 나이가 그대보다 6년이나 적은데, 그대가 그를 선생이라 하니 어떤 뜻이 있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춘헌은 광양군(光陽君) 성지(誠之)의 아들이요, 찬성사 대제학(贊成事大提學)으로 치사(致仕)한 비일(毗一)은 그의 왕부(王父)요, 호부상서 한림학사(戶部尙書翰林學士)로 치사한 소(佋)는 그의 증왕부(曾王父)요, 찬성사 대사학(贊成事大司學)으로 치사한 훤(晅)은 그의 외왕부(外王父)이니, 진실로 유아 진신(儒雅搢紳)의 후손이다.

 

그런데 광양군이 덕릉(德陵: 고려 충선왕의 묘호)의 알아줌을 만나 기밀(機密)을 맡고 선거(選擧)를 오로지 한지 20여년에 성세(聲勢)가 대단하였으며, 춘헌은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할 적에 몽고(蒙古)의 말과 글을 익혀 부귀한 집의 자제들과 함께 거처하고 고관 대작들과 놀았으니, 마땅히 교만할 것이로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수기이인(修己理人)의 도에 그 문을 찾아 들어가서 도리어 나가면 무예를 익히고 들어오면 책을 읽었다.

 

주염계(周濂溪)ㆍ정명도(程明道)ㆍ정이천(程伊川)ㆍ주회암(朱晦庵)의 글을 모두 모아 읽었으며, 밤이 깊어서야 자고 새벽녘에 일어나 반드시 절목(節目)을 자세히 구분하여 깊은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몸소 행한 뒤에야 그쳤다.

 

온화하기는 봄볕과 같고 맑기는 가을 물과 같아서 복첩(僕妾)들도 일찍이 그가 갑자기 성내거나 갑자기 기뻐함을 한번도 못 봤다. 덕릉이 서번(西蕃-중국 서방지역)으로 귀양가 있을 때에, 춘헌이 광양군을 받들고 조롱(洮隴)으로 달려가 위문하였는데 왕복이 만리(萬里)였지만 온화한 몸가짐과 기쁜 얼굴로 더욱 공경하였으므로, 광양군이 편안하기가 집안에 있는 것과 같았다.

 

충숙왕(忠肅王)이 입조(入朝)하니 심왕(瀋王)의 용사자(用事者)들이 혁장(鬩墻)의 화(禍)를 일으켜 참소하는 말이 비등(沸騰)하여 거개 온전한 사람이 없었으나, 춘헌은 몸으로는 충숙왕을 모셨고 뜻은 그 의(義)를 따랐으며, 정직하되 능히 공경하였으므로 피차(彼此)에 유감이 없었다.

 

두 어버이를 여의고 3년의 복제(服制)를 마친 다음 가묘(家廟)를 세워 죽은 사람을 섬기기를 산 사람을 섬기듯 하였다.

자식은 남녀가 모두 먼저 부인 김씨(金氏)의 소출이었으나, 나 부인 섬기기를 또한 계모가 아닌 것같이 하였다. 그가 전법사(典法司)를 맡았을 적에는 폐행(嬖幸)이 능히 그의 간사함을 이루지 못하였고, 평양(平壤)과 쌍성(雙城)에 봉사(奉使)하였을 적에는 완악한 사람들이 함부로 속이지 못하였다. 

 

밀직(密直)에 들어가 첨의(僉議)에 올랐을 적에는 온 나라의 선비들이 그의 병용(柄用 전선(銓選)의 권리)을 즐겨하였고 백성들도 그 혜택을 입었는데, 하늘이 나이를 더 주지 않아 갑자기 서거(逝去)하였으니, 책상을 치며 차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 춘헌은 자기 도리를 다하여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고, 집에서 행하여 나라에 미쳤으며, 살아서는 창생(蒼生)의 소망이 매여 있었고 죽어서는 진췌(盡瘁)의 슬픔을 일으켰으니, 이제 세상에는 절대로 없을 것이며 세상에 어쩌다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내가 늙었다고 자처하고 유자라고 자만하여 춘헌을 선생이라 부르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유자이면서도 유자가 아닌 사람이 / 儒而匪儒

세상에는 진실로 많으나 / 世則是繁

유자가 아니면서도 유자인 사람은 / 匪儒而儒

우리 춘헌뿐인가 하노라./ 獨吾春軒

하였다.  

 

[각주]

[주01] 혁장(鬩墻)의 화(禍) : 형제간의 싸움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충숙왕(忠肅王)과 심왕(瀋王)의 알력을 말한

            다. 어원(語源)은 《詩經》 小雅 常棣에 “형제는 집안에서는 싸울지언정 외모(外侮)는 함께 막는다.” 하

           였는데, 여기서 온 말이다. 

 

[출전] 익재난고 제7권

 

 옮긴이 :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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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元高麗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護軍春軒先生崔良敬公墓誌銘

 

익재 이제현 찬(益齋 李齊賢 撰

 

春軒崔良敬公諱文度。字羲民。年五十有四。至正五年六月癸丑卒。卜得八月壬申。葬于玉金山之麓。以附先塋。禮也。子曰思儉。先歿。孫皆幼。長女壻左諫議大夫鄭誧。在京師未歸。次女壻版圖正郞閔璿。以羅夫人之命。丐文於予。將鑱石納壙。予老矣。懦於紀譔。自以平生相爲知己。義不可辭。把筆題其端曰。春軒先生墓銘。或詰之曰。春軒起自將官。且其齒下於子六年。子乃先生之。豈有說乎。答曰。春軒。光陽君諱誠之之子也。贊成事大提學致仕諱毗一。其王父也。戶部尙書翰林學士致仕諱佋。其曾王父也。贊成事大司學致仕金諱晅。其外王父也。固儒雅搢紳之胄也。然而光陽君遇知於德陵。典機密。專選擧二十餘年。聲勢藉甚。春軒宿衛中朝。習蒙古字語。綺襦紈袴之與處。韋韝毳帽之與遊。是宜富驕。而於格物致知修己理人之道。莫得其門而入焉。顧能出則手弓劍。入則目簡編。濂溪二程晦菴之書。皆彙而觀之。夜分而寢。鷄鳴而起。必將詳節目極蘊奧。心得躬行。然後乃已。溫然如春陽。湛然如秋波。雖僕妾。未嘗一見其卒怒而遽喜也。德陵遜于西蕃。春軒奉光陽君奔問洮隴。往返萬里。惋容愉色。不懈益虔。光陽安焉若在庭闈之中也。忠肅王入朝。瀋府用事者。煽起鬩墻之禍。讒口交騰。擧無全人。春軒身從其居。而志從其義。直而能敬。彼此無憾。喪二親三年。立家廟。事亡如存。子男女皆先夫人金氏出。事羅夫人。亦莫知其爲繼母焉。其判書典法司也。嬖幸莫能遂其姦。奉使平壤,雙城也。頑獷莫能肆其欺。及乎入密直。升僉議。一國之士。喜於柄用。而民蒙其惠。天不假年。奄爾淪逝。莫不彈指驚嗟。或至霣涕。嗚呼。春軒之道。盡於己而信於人。行於家而及於國。存係蒼生之望。歿興殄瘁之悲。求之於今。蓋絶無而僅有者也。予以老自居。以儒自私。而不先生春軒。可乎哉可乎哉。其銘曰。

儒而匪儒。世則寔繁。匪儒而儒。獨吾春軒。

 

출처>益齋亂稿卷第七 /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