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옻골 마을
문창공 영정에서 길을 물어 옻골 마을로 향했는데, 가다 보니 천년기념물 1호라는 달성 측백수림이 나왔다.
측백수림은 나지막한 야산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무성한 가지를 펼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도동의
달성 측백수림은 그 남한지로 큰 의의가 있다고 했는데, 별로 특이하지는 않아 사진은 찍지 않았다.
단지 야산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울창한 숲을 이루는 게 특이해서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듯...
↑달성 측 백 수림 맞은편에 있는 나무.
↑부근 서양풍 건물의 ‘꽃 뫼 어린이집'
표지판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옻골마을의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이 나왔다.
토요일인데도 해설사께서 상주하고 계셨고, 나는 그냥 해설지만 받으려고 했는데 상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곳 '옻골마을'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소재한 경주최씨 광정공 최단(崔鄲)의 후손 칠계파(漆溪派)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동성촌락(同姓村落)으로 현재 20여 호의 고가들로 어우러져 있으며,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 대구의 병장으로서 왜적을 격파하고 많은 전공을 세워 공신이 된 태동공(台洞公) 최계(崔誡) 선생의 아들이며 효종 임금의 잠저시 사부인 대암(臺巖) 최동집(崔東集,1586~1661) 선생이 장래 자손의 세거지(世居地)로서 1616년에 정착한 이래 380여 년간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마을의 북쪽은 팔공산 내룡으로 병풍처럼 둘러 대암이 우뚝 솟아 있고, 동으로는 검덕봉이 높이 서있고 서쪽에는 긴능선이 내려와 못 안골로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느티나무 고목들이 숲을 이루며 연못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시냇가에는 옻나무가 많이 있어 칠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병풍처럼 둘러싼 팔공산과 대암.
거북이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생구암(生龜巖)'.진짜 거북이처럼 생겼다.ㅋ
↑마을 서쪽 입구에 있는 연못이다. 거북이가 물에서 놀라고 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연못이다.
↑연못가의 느티나무 숲. 풍수지리학 상 서쪽은 음의 기운이므로 이 음의 기운을 막기 위해 조성된 느티나무 숲.
↑마을 남쪽에 조성된 복숭아 밭
남쪽으로는 이 마을지대가 조금 높은 관계로 앞에 흐르는 금호강의 지류가 보여, 여기로부터 액운이 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느티나무 숲과 함께 복숭아밭을 조성했다고 한다.
↑마을입구에 옻 골 마을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수령 350여년의 높이 12m, 둘레 2.9m의 회화나무.
유서 깊은 서원이나 명문가의 정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회화나무는 영문으로 'Chinese Scholar Tree'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는 괴수(훼나무 괴, 나무 수)라 하며 길상목(吉祥木)의 하나로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정승의 벼슬을 한다는 것을 기원하는 의미로 여겨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예전에 대구 사대부고 교장선생님을 역임하신 분의 생가라고 함.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숙종 31) ~ 1786(정조 10) 선생의 효자 절려각.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0호로 지정되어있다. 마을 제일 앞쪽에는 정려 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조선 정조 임금 때, 세자의 익찬(임금의 정사를 잘 도와서 인도함) 이었던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효자 비각으
로, 선생의 사후인 1789년 나라에서 세운 것이라 한다. 각 안에는 정조 대왕이 하사하신 홍 편액이 걸려 있다.
↑옛 토담길이 잘 보존되어 있는 옻 골 마을. 토담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종택이 나
온다.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종택 대문.
보통 명문가의 옛 가옥을 보면 대체로 입구 쪽의 문은 솟을 대문인데(가마를 타고 지나다녀야
하므로...) 이곳은 '-'자 대문이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미덕으
로 삼았던 것이 가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라고.....
↑건물 안쪽에서 본 대문이 있던 건물.
↑백 불 고택의 수구당(사랑채 :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
경주최씨 칠계파 종가 백 불 고택의 사랑채 격인 수구당은 ‘-‘자형으로 지어진 건물로 음의 상징인 서쪽에 배
치되어 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동산서원이 훼철될 때 나온, 목재의 일부를 사용해 1866년에 중건
한 건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붕의 높이가 다른 것은 '장유유서(長幼有序)' 정신을 살려, 윗대를 공경하라는 정신이 깃든 흔적이
라고 하고, 지금은 9대 종손인 최진돈 씨 부부와 모친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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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흥원(崔興遠)
1705년(숙종 31)∼1786년(정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 일찍이 이상정(李象靖)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는데, 1778년(정조 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교관(參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 從六品의 郞官)를 거쳐 1784년(정조 8)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 正五品衙門/왕세자를 배종하여 호위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원) 좌익찬(左翊贊 : 世子翊衛司에 두었던 正六品의 관원)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문연구에 열중하여 후에 칠계(漆溪) 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백성들의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하여 규약을 세워 강학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하고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생활 안정을 얻게 하였다. 이것이 당시의 유명한「부인동규(夫仁洞規)」였다.
사후(死後)인 1789년(정조 13) 효행으로 정문을 세웠고, 이듬해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百弗庵集)」이 있다. 그런데 왜 그는 환갑 때 호를 백불(百弗-일백 백, 아닐 불)이라고 지었을까?
여기서 백불(百弗)이란 ‘백부지(百不知) 백불능(百弗能)’ ‘모든 것을 하나도 알지 못하고, 또 아무 것도 실천하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서 조선 후기 학문과 그 실천에 누구보다 헌신했던 올곧은 학자의 정도를 넘은 겸사(謙辭)가 강하게 담겨 있다고 한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에는 "입춘대길,건양다경"이라는 입춘 방이 붙어 있다.
↑백불고택의 안채(정침)
경주최씨 칠계파 종가의 안채로 건축된 ‘ㄷ’자 형의 고색창연한 이 건물은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선생이
1630년(인조 8)에 건축한 가옥으로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의 특성을 고려해 사랑채와 함께 서쪽에 배치
하였다고 전한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연결되는 작은 문.
옛날에는 대감이 노비가 잠이 들고 나면 조용히 이 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왔다가, 다음
날 아침 노비가 잠이 깨기 전에 이 문을 통해 사랑채로 돌아갔다고 한다. 부부가 합방 하
는 것도 눈치를 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ㅋ
↑안채를 나오면 대묘와 별묘 그리고 보본당으로 연결된다.
↑백불암 선생의 불천위 사당건물이다. 1711년(숙종 37)에 세워져 가묘(家廟)로 사용되고 있다고 함.
↑1737년(영조 13)에 지어진 대암 최동집 선생을 모신 별묘(別廟).
이처럼 별묘가 종가의 동쪽에 배치된 것은, 조상과 관련한 공간은 양의 상징적인 의미인 동쪽에 배치하는
음양오행사상을 따른 것이다.
↑보본당(報本堂 : 대구광역시 지방문화재)
이 건물은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오대조이신 대암 선생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1753년
(영조 29년)에 건립하였으며, 부조위 사당과 재실, 음식을 장만하는 묘사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반계 류형원(磻溪 柳馨遠,1622~1673) 선생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조선 영조
임금의 명으로 최흥원 선생이 제자들을 데리고 교정하였던 곳이기도 하단다. 그 때 교정
했던 반계수록 초고가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보본당에서 보면 생구암과 별묘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보본당의 건축물이 일자로
일자로 배열되어 있다.
↑보본당 양쪽 벽 위에는 조그만 다락문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전쟁 때 이곳에 중요 서재들을 숨겨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보본당에서 바라본 전경.
↑제례용 집기를 보관하는 창고
이곳에는 백불암 선생이 처가에서 전해 받아 후손들에게 물려준 놋쇠제기가 있다고 한다.
처음 백불암 선생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은 세 가마니쯤 되는 많은 양이었지만, 일제시대 때 두 가마니 분량은 일본군에게 공출을 당하고 나머지 한 가마니 분량은 땅속에 숨겨 묻었다가 꺼낸 것이라 한다.
종가에서는 지금도 불천위 제사 때 이 제기를 사용한다. 아울러 이 종택에는 퇴계선생의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든 '성학십도병풍'과 임금께서 하사하신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수백년 간의 책력 등 많은 고서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특히, 인상 깊은 것은 ‘경자패(敬字牌)’라는 것인데, 이것은 선생의 제자인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이 나무에 ‘공경 경(敬) 자’를 새겨놓은 것으로 백불 선생은 평생 머리맡에 이 경자패를 걸어두고 경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동계정(東溪亭)
종택 동쪽 개울가에 세워진 이 건물은 사고로 백불암 선생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인 동계 최주진 [東溪 崔周鎭, 1724년(경종 4)∼1763년(영조 39)]선생의 학문을 기려 세운 정자로서, 자손들의 강학 장소로 이용되어 왔으며, 주변의 풍광이 마을에서 가장 절묘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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