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국의전통문화

비문(碑文). 행장(行狀). 묘지명(墓誌銘). 묘비문(墓碑文). 묘갈문(墓碣文). 묘표(墓表)에 대하여

야촌(1) 2012. 2. 10. 15:48

■비문(碑文). 행장(行狀). 묘지명(墓誌銘). 묘비문(墓碑文). 묘갈문(墓碣文). 묘표(墓表)에 대하여

 

1. 비문(碑文)

유협이 이르기를, “비(碑)란 돋운다[埤]는 뜻이다.

상고(上古) 시대에 제황(帝皇)이 처음으로 호(號)를 기록하고 봉선(封禪)을 할 때에 돌을 세워 산악 위에 도드라지게 하였으므로 비라고 한 것이다.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엄산(弇山)의 바위에다 사적(事跡)을 기록하였다.” 하였고, 진시황(秦始皇)은 역산(嶧山) 꼭대기에 명(銘)을 새겼는데 이것이 비의 시초이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사혼례(士婚禮)의 “문에 들어서서 비를 맞닥뜨리게 되면 읍을 한다.”라는 글의 주에 “궁실(宮室)에 비를 세워 두고서 해의 그림자를 표시함으로써 시각을 안다.” 하였고, 제의(祭義)의 “희생을 들여와서 비에다 묶는다.”라는 글의 주에 “옛날에 종묘(宗廟)에다 비를 세워 희생을 매어 두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궁궐이나 종묘에 모두 비를 세워서 그림자로 시간을 표시하고, 희생을 매어 두는 용도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인하여 그 위에다 공덕을 기록하였으니, 비의 유래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모방하여 명(銘)을 새긴 것은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에서 시작되었을 뿐이다. 후한(後漢) 이후로는 작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산천(山川)의 비가 있고, 성지(城池)의 비가 있고, 궁실(宮室)의 비가 있고, 교도(橋道)의 비가 있고, 단정(壇井)의 비가 있고, 신묘(神廟)의 비가 있고, 가묘(家廟)의 비가 있고, 고적(古跡)의 비가 있고, 토풍(土風)의 비가 있고, 재상(災祥)의 비가 있고, 공덕(功德)의 비가 있고, 묘도(墓道)의 비가 있고, 사관(寺觀)의 비가 있고, 탁물(託物)의 비가 있게 되었으니, 이들은 모두 용기(庸器) -이정(彝鼎)과 같은 유이다.- 가 점점 없어짐으로 인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른바 돌로 금속을 대신한 것인데 썩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서는 같다 하겠다.

그러므로 비(碑)는 실로 명(銘)을 쓰는 기물이고, 명은 실로 비를 채우는 글인 것이다.

따라서 그 서(序)는 전(傳)에 해당하고 그 문(文)은 명(銘)에 해당한다. 이것이 비의 체재이다.

 

또 비의 체재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는데, 그 뒤로 점점 의논을 곁들인 것은 잘못이다.

사실을 서술하는 것을 위주로 한 것은 정체(正體)이고, 의논을 위주로 한 것은 변체(變體)이며, 사실을 서술하면서 의논을 곁들인 것은 변체이지만 그 정당성을 잃지 않은 것이며, 사물에 가탁하여 생각을 나타내는 경우의 글은 또 다른 별체로 구분할 수 있다. [문헌자료 : 文體明辯 권49 碑文]

 

 

2. 행장(行狀)

유협(劉勰)이 이르기를, “장(狀)이란 묘사하는 것[貌]으로 본원(本原)을 그대로 묘사하여 사실을 취하는 것이다.

선현(先賢)의 묘표(墓表)나 시장(諡狀)에 모두 행장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은 장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다.” 하였다.

 

한(漢)나라 승상부의 창조 참군(倉曹參軍)인 부조간(傅朝幹)이 처음으로 양원백(楊元伯)의 행장을 지었다고 했는데, 후세에 이것을 따라 하였다. 대개 죽은 사람의 세계(世系), 이름과 자, 벼슬, 살았던 마을, 행적과 치적, 살고 간 나이 등을 상세하게 갖추어서, 혹은 고공(考功)과 태상(太常)에 이첩(移牒)하여 시호(諡號)를 의논할 수 있게 하고, 혹은 사관(史館)에다 이첩하여 편록(編錄)을 요청하기도 하고, 혹은 작자에게 올려서 묘지(墓誌), 묘비(墓碑), 묘표(墓表) 등과 같은 유의 글을 요청할 때에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 글은 대부분 문하생이나 수하의 관속들이나 친구들의 손에서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이 아니면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사장(逸事狀)의 경우는 다만 그 빠뜨린 것만을 기록하고 이미 수록한 것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하지 않았다. 이는 행장(行狀)의 변체(變體)이다.

 

[문헌자료 : 文體明辯 권52 行狀]

 

 

3. 묘지명(墓誌銘)

지(誌)는 기록한다[記]는 뜻이고 명(銘)이란 이름하는 것[名]을 말한다.

옛사람에게 덕이 있거나 선이 있거나 공렬이 있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 만한 경우에는 그가 죽고 난 뒤에 후세 사람이 그를 위해 기물(器物)을 만들고 거기에다 명을 새겨서 영원히 전해지게 하였다. 이를테면 채 중랑(蔡中郞)의 문집(文集)에 수록되어 있는 주공숙(朱公叔)의 정명(鼎銘)이 그것이다.

 

한(漢)나라 두자하(杜子夏)에 이르러 처음으로 글을 새겨 묘소의 곁에다 묻음으로써 드디어 묘지(墓誌)가 있게 되었는데, 후세 사람이 이것을 따랐다.

 

대개 장례를 치를 때에 그 사람의 세계(世系), 이름과 자, 벼슬, 살았던 마을, 행적과 치적, 살고 간 나이, 죽은 날, 장사한 날과 그의 자손들의 대략을 기술하여 돌에다 새기고 덮개를 덮어서 광(壙) 앞 석 자[尺] 되는 곳에 묻어서 훗날 능곡(陵谷)이 변천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였으니, 지명(誌銘)이라고 했을 경우 그 사용한 의도가 심원하고 옛 뜻에도 저해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에 문사(文士)의 손을 빌어 오늘날에 신뢰받고 후세에 전하겠다고 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미화한 자가 이따금씩 있었으니, 글은 비록 같지만 의미는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반듯한 사람에게 쓰게 한다면 필시 사정(私情)에 치우쳐 남들을 따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을 가지고 논하면, 묘지명(墓誌銘)이라고 한 경우는 지(誌)도 있고 명(銘)도 있는 경우를 말하며, 묘지명 병서(墓誌銘幷序)라고 한 경우는 지도 있고 명도 있는 상태에서 또 앞에 서(序)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지명(誌銘)이라고 하였으나, 지만 있고 명이 없는 경우도 있고, 혹은 명만 있고 지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별체(別體)이다. 묘지(墓誌)라고 한 경우에는 지만 있고 명은 없으며, 묘명(墓銘)이라고 한 경우에는 명은 있고 지는 없다.

 

그러나 또 오로지 지(誌)라고만 했는데 도리어 명(銘)이 있는 경우도 있고, 오로지 명이라고만 했는데 도리어 지가 있는 경우가 있으며, 또 제목은 지라고 하고서 내용은 명인 경우가 있고, 제목은 명이라고 하고서 내용은 지인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모두 별체이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 가매장[權厝]한 경우를 권조지(權厝誌) 또는 ‘아무의 빈에 쓰다[誌某殯]’라고 하고, 후장(後葬)을 하면서 재차 쓰는 지문(誌文)인 경우에는 속지(續誌) 또는 후지(後誌)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 죽어서 귀장(歸葬)하는 경우에는 귀부지(歸祔誌)라고 하고, 다른 곳에다 장사하였다가 뒤에 천장(遷葬)하는 경우에는 천부지(遷祔誌)라고 한다.

 

덮개에다 새기는 것을 개석문(蓋石文), 벽돌에다 새기는 것을 묘전기(墓磚記) 또는 묘전명(墓磚銘)이라 하고, 목판에 쓰는 것을 분판문(墳版文) 또는 묘판문(墓版文)이라고 한다. 이 밖에 장지(葬誌), 지문(誌文), 분기(墳記), 광지(壙誌), 광명(壙銘), 곽명(槨銘), 매명(埋銘)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불가에서는 탑명(塔銘)이니 탑기(塔記)니 하여 모두 20개의 제목이 있는데, 혹은 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혹은 명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바, 이것은 모두 지명(誌銘)의 별제(別題)이다. 그 문체는 정체(正體)와 변체(變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체는 사실만을 서술하고, 변체는 사실을 서술하고 의논을 덧붙인 것이다.

 

또 순전히 야(也) 자만 써서 단락을 삼는 경우도 있고 허위로 지문(誌文)을 짓고서 명(銘) 내에 비로소 사실을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도 모두 변체이다. 명(銘)의 체(體)로 말할 것 같으면 삼언(三言), 사언(四言), 칠언(七言), 잡언(雜言), 산문(散文)이 있고, 문구 가운데에 혜(兮) 자를 사용하는 것도 있고 맨 끝에다 혜 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맨 끝에다 야(也) 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운자(韻字)를 쓰는 데도 한 구에만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두 구에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세 구에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앞에는 운자를 사용하고 끝에는 운자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앞에는 운자가 없는데 끝에만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한 편 안에 이미 운자를 사용하고 한 장(章) 안에서 또 각각 따로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한 구절씩 걸러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어조사에 운을 두는 경우가 있고, 한 글자를 한 구절씩 건너 거듭 사용하여 스스로 운자로 삼는 경우가 있고, 전체 다 운자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운자를 바꿀 경우에 두 구절마다. 한 번씩 바꾸는 경우도 있고 전편에 걸쳐 바꾸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각 편 중에 섞여 나온다. [문헌자료 : 文體明辯 권52 墓誌銘一)]

 

 

4. 묘비문(墓碑文)

옛날에는 장사 지내는 데 풍비(豐碑)가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서 곽(槨)의 앞과 뒤에다 세우고, 그 가운데를 뚫어서 녹로(鹿盧)를 만든 다음 동아줄을 꿰어 하관하는 것이다. 한나라 이후로 죽은 자의 공업을 맨 처음에는 그 위에다 새기던 것을 점점 바꾸어서 따로 돌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유협이 이른바 “원래 종묘에 세워졌던 비(碑)가 무덤에도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晉)나라와 송(宋)나라 시기에 처음으로 신도비(神道碑)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대개 풍수가(風水家)들이 동남쪽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그곳에다 비를 세웠던 것인데 이것을 인하여 이름을 삼은 것이다.

 

당(唐)나라 비의 제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5품(品) 이상인 관원만 사용하였는데, 근세에는 높이와 너비에 각각 차등을 두었으니 제도가 세밀해진 것이다.

 

대체로 장사를 치른 자가 지(誌)를 만들어서 유택(幽宅)에다 보관하고 나서 또 비(碑)나 갈(碣)이나 표(表)를 만들어 밖에다 내걸었던 것은 모두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차마 선조의 덕을 은폐시키지 못하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 문체가 문(文)도 있고 명(銘)도 있고 서(序)도 있는데, 혹은 사(辭)라고 하고 혹은 계(系)라고 하고 혹은 송(頌)이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모두 명(銘)을 이르는 것이며, 거기에는 또 정체와 변체가 있다.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에서 장례 지낼 때도 역시 비를 세워 참람스레 품관처럼 하였으니, 아마도 역대로 서로 인습에 젖어 이교(異敎)를 숭상하고 금지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 듯하다. [문헌자료 : 文體明辯 권55 묘비문 상(墓碑文上)]

 

 

5. 묘갈문(墓碣文)

반니(潘尼)가 반황문(潘黃門)의 갈(碣)을 지었으니, 갈이 지어진 것은 진(晉)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唐)나라의 묘갈 제도를 보면 부석(趺石)은 네모나고 수석(首石)은 둥글었는데 5품 이하의 관원만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비와 갈을 본래 서로 통용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관직의 등급 문제로 인하여 그 명칭을 구분하였지만, 사실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문체도 비와 유사하다.

 

그러나 명(銘)이 있고 없고는 짓는 사람이 하기 나름이다.

오로지 갈이라고만 하고서 도리어 명을 쓰는 경우도 있고 혹은 명까지 겸해서 말하고서 도리어 명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은 지(誌)나 조(詔)처럼 확고부동한 표준을 내세울 수 없는 것들이다.

 

[문헌자료 : 文體明辯 권56 墓碣文]

 

 

6. 묘표(墓表)

묘표는 동한(東漢)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안제(安帝) 원초(元初) 원년(元年)에 알자(謁者)인 경군(景君)의 묘표를 세웠는데, 그 뒤로 계속 이어졌다.

그 문체는 비(碑)나 갈과 동일한데, 벼슬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다 쓸 수 있었으니 비나 갈에 등급의 제한이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또 천표(阡表), 빈표(殯表), 영표(靈表)가 있는데, 대체로 천(阡)이란 묘도(墓道)를 말하며, 빈(殯)이란 장사하기 전을 지칭하며, 영(靈)이란 막 죽었을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영으로부터 빈을 하고, 빈으로부터 묘를 쓰고, 묘로부터 천을 만들게 된다.

 

[문헌자료 : 文體明辯 권56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