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수량 백비(朴守良 白碑) 이야기
전라남도 장성(長城)은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옛날에는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고장으로, 조선의 전기 문신인 조종생(趙從生)은 장성(長城)을 일컬어 "산이 둘러 있고 물이 굽이쳐 스스로 하늘을 이루었다(山回水曲 自天成)"라고 했고, 암행어사 박문수는 장성은 산수가 좋기로는 조선제일의 고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장성의 백양사(白羊寺)에는 대한 8경 중 일경이 있으며 물이 좋기로는 오동촌(梧桐村)의 방울샘(鈴泉), 옥정약수(玉井藥水), 청류암(淸流庵)의 남천감로(南泉甘露)와 같은 약수터가 있고, 누각과 정자도 많은 학자의 고장 장성을 선비들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자랑하며 살아 왔다.
이와 같이 산수 좋은 장성은 풍수지리적으로도 천혜의 길지로써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예로부터 '장성에서 글 자랑을 하지 마라(文不如長城), 한양에 있는 만개의 눈이 장성에 있는 눈 하나만 못하다(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라는 말이 탄생한 장성에는 정혜공 박수량선생의 묘소가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으며 또한 이곳 가까운 곳에 가까운 필암서원, 봉암서원, 동학비, 홍길동생가터, 축령산 편백숲이있다.
홍길동 생가터 입구에서 약 500m 지나면 금호리에 정혜공 박수량선생의 묘소가 있다.
묘소의 뒷산이 여우형국이고 산정골에 여절이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방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아곡 박수량 선생의 묘와 재실이 있다. 헌데 묘비는 글자 한자 없는 백비로 널리 알려졌다.
아곡 선생은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나 정2품 벼슬인 판서까지 오른 인물로 23세 때에 등과하여 64세까지 38년 간이나 관직에 있었으나, 공직자로 사명에 충실했을 뿐 명예와 재물에는 욕심이 없어 집 1칸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하였다.
명종이 1546년(명종 1) 박수량에게 하사한 99칸 집인 청백당은 본래 아치실에서 하남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빈터에는 유허비만 남아 있고 생가 터였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집을 짓고 청백당이란 현판을 걸어 놓았다.
유허비의 크기는 높이 133cm, 넓이 43cm, 두께 17cm로 앞면에 '정혜공아곡박선생유허'(碑字는 보이지 않음)라고 새겨져 있으며 옆에 하마석(下馬石)이 같이 서 있고 박수량 부조묘(朴守良不廟)는 황룡면 아곡리 아곡마을에 있으며 청백리 정혜공 박수량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최초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41년 중수하였고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청백당 뒤에 위치하고 있다.
박수량신도비(朴守良神道碑)는 황룡면 금호리 호사마을에 있으며, 정혜공 박수량선생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크기는 높이 220cm, 넓이 60cm, 두께 20cm 이며 송병선선생이 비문을 짓고 최익현선생이 글씨를 섰다.
박수량선생(1491년~1554년)의 자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莪谷), 시호는 정혜공· 본관은 태인이며 종원의 2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502년 12세 때 관찰사 앞에서 망해부(望海賦)를 지었던 선생은 1513년 23세에(중종8) 진사와 다음해에는 별시문과 을과(2)에 합격한 뒤 성균관 분교인 광주주학(廣州州學) 교수를 시작으로 승정원 부정자(副正字), 승정원 정자를 거쳐 중종 17년(1522년) 지평이 되었다.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37세에 사간원 정언, 충청도 도사(都事), 춘추관 기주관, 형조정랑, 사헌부 지평, 병조정랑, 고부군수, 헌납, 장령, 함경도경차관, 나주 목사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고 좌찬성과 호조판서에 이르렀고, 중추부사가 되었다가 명종 때 의정부 우참찬,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벼슬길에 있은 지 38년 동안 청백리로 가는 곳마다 치적을 쌓았다.
박수량선생은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64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가 죽거든 시호도 청하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했으나 선생의 부음이 조정에 전해지자 명종은 조회를 2일간 멈추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모시는가 하면 백비(白碑)를 보내어 선생의 청백이 영원하여 후에 귀감이 되도록하였다.
벼슬길에서 38년을 봉직하고 학자로도 존경을 받으면서도 두어 칸 집 한 채도 없이 돌아가시니 남은 양식은커녕 초상마저 치를 수 없어 예관이었던 대사헌 윤춘년(1514~1567년)은 명종에게 고하기를 "박수량은 워낙 청백한 사람이라 멀리 서울에 와서 벼슬을 하면서도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었다.
그래서 고향인 장성으로 돌려보내 장사지내고자 하오나 자력으로써 할 수 없사오니, 만일 이런 사람을 국가에서 표창하여 주면 관리들에게 크게 장려될까 하옵나이다”라는 말을 들은 왕은 "수량의 청백한 이름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지 오래이다”하며 선생의 유언에 따라 석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을 백비라고 부르게 하라고 했다.
장방형의 대석 위에 호패형의 비신을 올리고 서해안의 하얀 돌로 만들어진 백비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순조는 1805년에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의 저서로는 아곡집이 있다.
전해지는 선생의 유물로는 명종 임금이 아곡 박수량에게 하사한 술잔으로 모양은 타원형이고 한쪽에 손잡이가 있으며 오색이 영롱한 조개껍질과 같이 빛깔이 변한다는 앵무배(鸚鵡盃)가 있다.
선생의 저서인 아곡집은 14세 종손인 봉구(鳳求)에 의해 1권 1책으로 편찬되었으며, 15세손인 래욱이 1985년에 국역본으로 '아곡박선생실기'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으며 선생은 인근에 있는 모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묘 앞 빗돌이 無字백비. 우측 비석은 후대에 세운것/소재지 :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아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