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오현(五賢)의 종향(從享)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선조 원년 무진에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 등이 소를 올려, 조광조(趙光祖)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고, 대사간(大司諫) 백인걸(白仁傑) 등이 잇달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에 백인걸이 차자를 올리기를, “우리 동방의 도학이 정몽주. 김굉필로부터 비로소 근원이 있게 되었는데, 조광조에 이르러 그의 걸출한 재주로 정자 주자의 학문을 드러내 밝히고, 규범을 따라 실천하여 예절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크게 명분과 절의(節義)를 장려하고, 유교의 학문을 흥기(興起)시켰습니다.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도리를 다하여 덕정(德政)을 행하게 하니, 거의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태평 성세를 다시 볼 것 같더니, 간신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귀신과 물여우 같은 음해(陰害)를 자행하여 참소로 의옥(疑獄)을 얽어서 마침내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습니다.
조정과 민간에서의 한스러워함이 오랠수록 더욱 새로운데도 유독 궁중(宮中)에서 만은 간사한 꾀로 두텁게 덮어 가려졌기 때문에 알지 못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중종의 만년에 광조의 무리인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셨고, 인종(仁宗)께서는 말년에 명하시어 이미 사직하였던 광조의 관작을 복구(復舊)하게 하셨으니, 공론의 통분을 조금은 풀었다고 할 수 있으나, 세상 사람들의 심정이 아직도 분하게 여기며 한탄하고 있는 것은 광조의 도덕과 충의(忠義)를 아직도 모두 밝게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즉위하신 처음을 당하여, 바람이 불면 초목(草木)이 쓰러지듯이, 온 나라의 민심이 전하의 명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나라의 여론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마땅히 참된 유현(儒賢)을 추중 장려하여 그에 대한 찬양과 존숭(尊崇)을 극진하게 하고, 높은 벼슬과 아름다운 시호를 추증하여 문묘에 종사하는 성전(盛典)에 참여하게 하여,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며 한 마음으로 도덕을 지켜 풍속을 같이 하게 된다면, 어찌 맑은 조정의 훌륭한 업적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정암집(靜庵集)》
경오년 4월에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이 소를 올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 4명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같이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다.” 하였다.
소를 세 번이나 올렸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암집》
5월에 병조 참판 백인걸(白仁傑)이 소를 올려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논의하여 아뢰기를, “문묘에 종사하는 일에 대하여 인걸의 의견이 비록 조광조를 지적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은 실로 김굉필에게서 부터 계발(啓發)된 것이니, 두 사람은 문묘에 종사하여도 실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교(聖敎)에 경솔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시니, 신 등이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석담일기》. 계유년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공론이 오래된 후에야 결정할 일이다. 경솔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우리 조선에서는 건국한 이래로 여러 유학자 중에 문묘에 종사할 만한 사람이 없지 않은데, 지금까지 종사하지 않았으니 어찌 성대한 의식이 결여된 것이 아니겠는가.
전조(前朝)에서 문묘에 종사한 이는 문충공 정몽주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등은 유도(儒道)에 기여(寄與)함이 없다. 만약 의리로 따져서라면 세 사람은 다른 곳에서는 제사할 수 있으나,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지금 여러 선현들 모두를 종사하기를 청한다면 그 사이에 어찌 우열이 없겠는가!.
문경공 김굉필, 문헌공 정여창은 언론과 뜻이 미약하여 드러나지 않았으며, 이문원(李文元)은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감이 자못 논의할 만한 것이 있고, 오직 문정공 조광조는 도학(道學)을 창도(倡導)하여 밝히고 뒷사람들을 계도(啓導)하여 깨우쳤으며, 문순공 이황은 의리에 깊이 몰두하여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두 사람을 특히 드러내어 종사한다면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석담일기》
갑술년에 전적(典籍) 조헌(趙憲)이 사현(四賢)의 종사를 청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에, “전하께서, 지난번에 관학 유생들이 종사하라는 소를 여러 번 올렸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근신(近臣)들이 경연(經筵) 석상에서 아뢴 것 또한 승낙하지 않으시어 온 세상의 선(善)을 향하는 마음을 막으시니, 신은 마음속으로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김굉필은 일찍이 도학을 부르짖어 옛 선현의 도를 이어 장래 후학의 길을 열어 놓은 업적이 있으며, 조광조는 그 뒤를 이어 더욱 성인의 도를 밝히어서 세상을 건지고,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 공적이 있고, 이언적은 도(道)를 본받음이 순수 독실하여 쓰러지려는 것을 붙들고, 위태로운 것을 버티어 바로잡은 노력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중국에서 찾아본다 해도 허형(許衡). 설선(薛瑄), 이외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며, 우리나라에서 찾아본다면 설총. 최치원. 안유 같은 이는 그가 도달한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더구나 이황은 동방의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주자(朱子)의 정통(正統)을 이었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에 맞게 하려는 정성이 상소에 간절히 어리고, 물러나오면 사람의 재능에 따라 교육을 베푸는 뜻이 강의(講義)와 토론에 절실히 드러나서, 착한 자는 그의 말을 듣고 우러러 사모하며, 악한 자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스스로 계칙하였습니다.
지금 세상의 선비들이 조금이나마 임금을 높이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며, 예의와 염치가 있는 것은 모두가 그의 도덕에 훈도(薰陶)된 것입니다.
국가가 이미 그를 생시(生時)에 크게 등용하지 못한 것으로 식자들이 태평성세는 보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탄식하고 있는데, 또 죽은 뒤에도 높이 추장(推?) 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시니, 오직 질투하고 방종(放縱) 탄망(誕妄)한 무리들이 옆에서 보고 속으로 기뻐할 뿐만 아니라, 전일에 분발했던 이들도 모두 위기가 저상(沮喪)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급히 사현(四賢)을 추장하시어 문묘 종사의 열(列)에 두게 하시기를 엎드려 원합니다 …….” 하였다. 《정암집》 병자년에 백인걸(白仁傑)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문묘에 종사한 선현들 중에는 오직 정몽주만이 선비들의 여망(輿望)에 맞을 뿐이고, 그 밖의 설총. 최치원. 안유는 모두 조광조의 아래에서도 매우 뒤떨어지는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큰 예(禮)를 누리고 있는데, 유독 조광조의 도학의 공적에만 보답하는 제사가 없으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셔서 종사의 예전에 참여하게 하소서 …….” 하였다. 《정암집》
기묘년 5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백인걸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기자(箕子)가 8조의 가르침[八條之敎]을 편 뒤로 수천 년 동안에 유학으로 세상에 이름난 이를 전연 들을 수 없더니, 정몽주가 비로소 홀로 도학(道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김굉필이 그 계통을 잘 받들었으나 오히려 크게 드러내지 못한 것을 조광조에 이르러 학문에 대한 뜻을 독실하게 하고, 모든 행동은 도학의 규범에 따랐습니다 …….
광조가 현인이란 것은 아무도 이의가 없사온데,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그를 바르지 않은 학문과 위장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심지어 여묘(廬墓)를 지키는 시정(市井)의 천한 사람까지도 남을 거짓 속인 사람이라고 지목하여 문죄(問罪)하려고 하고, 사부(士夫)로서 유학의 향방(向方)을 가진 자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여얼(餘孼)이라고 가리켜 공격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져서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신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궁중에서는 지금도 반드시 광조(光祖)를 역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전하께서는 이르시기를, ‘광조가 역적이 아님은 궁중에서 이미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생들이 사액(賜額)을 청하여 올린 소는 별로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 하였다. 《정암집》
신사년 10월에 호조 판서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지금 교화를 밝히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선현을 높이 추장(推?)하시어 후배들로 하여금 모범받게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매양 중대한 일이므로 어렵다고만 하셨습니다.
비록 근일(近日)의 유현들을 모두 사전(祀典)에 넣을 수는 없으시더라도 도학을 남보다 먼저 주창하여 밝힌 조광조와 이학(理學)을 깊이 연구한 이황, 이 두 사람은 진실로 문묘에 종사하셔서 많은 선비들의 향학심을 일으키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광해조 무신년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소를 올렸는데, 임숙영(任叔英)이 지었다.
소의 대략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역대의 성주(聖主)께서 서로 계승하시고 부축하여 진작하시니, 인재가 잇달아 많이 나왔습니다.
문경공 김굉필 문헌공정여창. 문정공 조광조.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문순공 이황(李滉)과 같은 이는 모두 한 세상에 뛰어난 유학자로서 멀리 전하지 아니한 학통(學統)을 이어 출중(出衆)하고 발군(拔群)하여 한 시대에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러보게 하였으며, 앞에서 창도(倡導)하고 뒤에서 계승하여 긴 밤에 방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해와 달같은 광명을 비춰 주었습니다.
그들의 학문을 논한다면 주염계(周濂溪). 정자(程子). 장횡거(張橫渠). 주자(朱子)의 학통이며, 그들의 뜻을 말한다면 요순(堯舜) 시대의 임금과 신하 같은 왕도(王道)를 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진실로 세상에 드물게 보는 참 유학자이며, 오랜 세대에 걸쳐 존경받을 스승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높이 보답하는 예전이 없어서 향기로운 향사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 하였다. 《정암집》
경술년 7월 17일에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일로 삼사(三司)와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논청(論請)하였다. 대신들에게 수의를 명하자, 모두 빨리 시행하기를 청하니, 헌의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응천일기(凝川日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청은 경오년부터 시작하였는데, 이황이 별세하기에 이르러 많은 선비들의 소원은 더욱 간절하였고 주청(奏請)은 더욱 빈번하여졌다. 39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선조가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특히 중대시하여 감히 쉽게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광해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제일 먼저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그 청을 윤허하였다.
경술년 9월 신해에 친히 선성(先聖)에게 석전(釋奠)을 거행하였는데, 그보다 닷새 앞서서 오현을 동서무(東西?)에 서열(序列)한다는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우복집(愚伏集)》 <묘정계첩서(廟庭?帖序)>.
선비를 시험 보여 김개(金?) 등을 취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 이황이 자기의 스승 조식(曹植)을 족하지 못하게 말한 것을 분하게 여겨 소를 올려 그들을 헐뜯고 무고(誣告)하므로 김육(金堉)이 성균관 장의(成均館掌議)로서 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니 광해가 노하여 그의 죄를 적발(摘發)하고 금고(禁錮)의 처분을 내릴 것을 명하였으나 대신의 주선으로 벌을 면하였다. 《조야기문》
오현(五賢)을 종사한 뒤에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문묘 종사는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재되어 있는 위호(位號)와 승사(陞祀). 출사(黜祀)와는 매우 다릅니다.
안하(顔何). 순황(荀況). 공백료(公伯寮). 진염(秦冉). 유향(劉向). 대성(戴聖). 가규(賈逵). 왕숙(王肅). 마융(馬融). 두예(杜預). 하휴(何休). 왕필(王弼)등은 명나라에서는 지금 문묘에서 출향(黜享)하였고, 거백옥(蘧伯玉). 임방(林放). 정현(鄭玄). 정중(鄭衆). 노식(盧植). 복건(服虔). 범녕(范寧). 오징(吳澄) 등은 중국에서는 지금 고치어 향교에서 제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그대로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후창(后蒼). 양시(楊時). 왕통(王通). 구양수(歐陽修). 호원(胡瑗). 설선(薛瑄). 호거인(胡居仁). 왕수인(王守仁). 진헌장(陳獻章)을 종사위(從祀位)에 더 넣었으며, 정통(正統) 정사년에는 호안국(胡安國). 채침(蔡沈). 진덕수(眞德秀)를 종사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신장(申?)과 신당(申黨)은 본래 한 사람인 것을 《가어(家語)》와 《사기(史記)》에 각기 그 이름이 실려 있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잘못 알고, 함께 제사하다가 중국에서는 신당은 버리고, 신장만을 두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치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사전(祀典)은 오직 중국의 정통 원년에 간행하여 정한 제도에 좇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가정(嘉靖) 9년에 이르러 예관(禮官)이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하기 시작하고, 겸하여 황돈(篁燉). 정민정(程敏政) 등의 논(論)도 채택하여 마침내 수정 정리하여 승사(陞祀) 또는 출사한 일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시행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대명회전》에 이미 수정한 제도를 간행(刊行)하여 반포하였습니다.
신(臣) 등이 가만히 공평하게 상고하여 보고 또 논평하옵건대, 마융(馬融)은 양기(梁冀)를 위하여 이고(李固)를 죽이라는 장주(章奏)를 기초하였으며, 탐오(貪汚)한 죄로 벼슬을 파면당하고, 머리를 깎이고 북방(北方)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을 받았다.
유향은 신선(神仙)되는 방술(方術)을 즐겨 말하며, 임금에게 글을 올려 황금(黃金)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였다가 실험에 성공하지 못하여 죄를 받았으며, 공백료는 자로(子路)를 계손(季孫)에게 모함하여 공자(孔子)를 저해하였고, 순황(荀況)은 그의 학설을 이사(李斯)에게 전하였으며 성악설(性惡說)을 저술하였고, 왕숙(王肅)은 권세 있는 간사한 신하에게 몸을 더럽혀 위(魏)를 배반하고 진(晉)을 좇았습니다.
하휴는 《춘추(春秋)》를 주해하면서 주(周) 나라를 밀어 내치고 노(魯) 나라를 종주국으로 하였고, 가규는 도참(圖讖)을 경(經)에다 덧붙였으며, 왕필은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설을 주지(主旨)로 삼았고, 대성은 탐장(貪贓)을 범하였으며, 두예(杜預)는 상기(喪期)를 단축하여 성인의 가르침에 죄를 지었고, 안하. 진염에 이르러서는 모두 어디서 나온 이름인지 드러나지 않았으며, 또 《가어(家語)》의 70명 제자 명단에도 실려 있지 않으므로 정민정(程敏政)은 말하기를, ‘이름이 잘못 전하여진 것이다.’고 하였으니, 중국에서 이런 자들을 출향(黜享)한 것은 마땅한 처사입니다.
왕통은 비록 참람하게 경서(經書)를 모방하였다는 나무람이 있으나, 위(魏). 진(晉) 때 유학이 무너진 뒤 공자. 맹자의 도학을 강설(講說)하였고, 나이 30세가 못 되어서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양시는 남송(南宋)에 도통(道統)을 전하였으니, 도학을 지킨 공이 정자(程子). 주자(朱子)에 못지 않으며, 호원(胡瑗)은 ‘체용의 학(體用之學)’을 앞장서서 부르짖었으며, 크게 학교의 법을 천명하였습니다.
구양수(歐陽修)는 충의(忠義)와 문장(文章)뿐 아니라, 한자(韓子). 맹자(孟子)를 추존(推尊)하여 공자에게 계통을 댔습니다. 설선. 호거인은 중국의 선유(先儒)들 중에서 그 학문이 가장 순수하고 바른 것이었고, 후창(后蒼)은 비록 뚜렷이 드러난 사업은 없으나, 한(漢) 나라의 초기에 예(禮)를 해설한 글이 수만 자나 되어 《예기(禮記)》가 다시 세상에 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중국에서 종사위(從祀位)로 추가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중에서 정현. 정중. 복건. 노식. 범녕. 오징(吳澄)은 정민정의 논평에는 그들의 저작이 성인의 학문을 발전시키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거백옥. 임방은 실은 공자 문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여 중국에서는 모두 고향(故鄕)에서 향사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향사할 시골이 없으니 이제 갑자기 문묘 종사를 폐지할 수 없습니다.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이나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는 비록 아울러 승사(陞祀)하고 있으나, 그들이 저술한 논설이 이단(異端)으로 흘렀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증사(增祀)하는 서열에 넣을 것으로 논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중국에서는 공자를 ‘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 일컫고, 네 분의 배향위는 ‘복성안자(復聖顔子)’. ‘종성증자(宗聖曾子)’. ‘술성자사(述聖子思)’. ‘아성맹자(亞聖孟子)’라고 일컬으며, 십철(十哲)과 문하 제자들은 모두 ‘선현(先賢)’이라 일컫고, 좌구명(左丘明) 이하는 모두 ‘선유(先儒)’라고 일컫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시호와 봉작(封爵)의 칭호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의 시호는 역대에서 각기 증손(增損)한 바 있으나 당(唐) 나라의 개원(開元) 때에 이르러 비로소 ‘문선왕(文宣王)’을 봉하였으며, 오랑캐인 원(元) 나라에 이르러서는 ‘대성(大成)’을 더 붙여 ‘대성문선왕’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준(丘濬)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공자의 영이 반드시 그 시호 받기를 즐겨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일컬어 ‘지성선사(至聖先師)’라 하였으니, 그 칭호가 비로소 위대하며 그 높음이 비할 데 없어서 전대의 호칭보다 탁월하다고 할 만합니다. ‘성(聖)’이라 일컫고, ‘현(賢)’이라 일컫고, ‘유(儒)’라고 일컫는 것을 모두 명 나라의 정한 제도에 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70제자는 모두 ‘선현’이라고 일컫는데, 주염계. 정자. 장횡거. 주자 같은 이는 공자. 맹자 이후의 대현(大賢)으로 오직 출생의 선후 때문에 자리가 좌구명(左丘明) 이하의 열(列)에 있어서 아울러 ‘유(儒)’라고 일컫고 ‘현(賢)’이라 일컫지 못하니, 구별없음이 너무 심합니다.
만약 출생한 순서를 가지고 자리의 고하를 정한다면, 자사(子思)가 어찌 공리(孔鯉)의 윗자리에 있을 수 있으며, 맹자가 어찌 안자. 증자의 열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문묘는 도(道)의 모임이니 그 시대의 선후를 논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신 등의 망녕된 의견으로는 주염계. 정자. 장횡거. 주자는 ‘선현’이라고 일컫고, 전상(殿上)에 올려 모시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이제 오현(五賢)을 종사하는 때를 당하여 정승들의 헌의도 또한 이미 발단하였으니, 청컨대 대신들에게 잘 검토하게 하여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이에 좇았다.
이항복(李恒福)이 헌의하였는데 그 대략에, “진(秦) 나라가 서적을 불사른 뒤로 예(禮)와 악(樂)이 흩어져 없어졌을 때, 홀로 노(魯) 나라의 고당생(高堂生)이 의례(儀禮)를 암송으로 강설(講說)하여 소분(蕭奮)에게 전하고, 소분은 맹경(孟卿)에게, 맹경은 후창(后蒼)에게 전하여, 드디어 대대로 전문(專門)의 학문이 되었습니다.
정민정이 그의 사업이 현저하지 않다고 하였고, 후창은 맹경 뒤의 사람이고, 맹경은 한 나라 중엽 이후의 사람인데, 이제 한 나라의 초기라고 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후창의 학문은 두 번 전하여 두 대씨(戴氏)에게 이르렀습니다.
두 대씨는 형제로서 그 형은 대성(戴聖)인데 세상에서 대대(大戴)라고 말하는 이이고, 대덕(戴德)은 아우인데 세상에서 소대(小戴)라고 하는 이입니다.
각각 예서(禮書)를 논저한 것이 있어서 주자가 대대(大戴)씨의 예(禮)를 많이 인용하였습니다.
그가 탐장(貪贓)으로 패(敗)하였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혹은 말하기를, ‘그와 원수진 집에서 허구로 무함한 것이라 하나, 이것은 본래 그 허실을 감히 밝혀 알 수 없는 것이며, 정민정에 대하여는 후대의 선비 중에 부족하게 여기는 이가 많습니다.
다만 시제(試題)를 팔아먹은 것이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그가 저술한 한두 편의 글은 우리 유학(儒學)의 죄인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러한 사람의 논정(論定)한 것이 후세의 단안(斷案)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윤두수(尹斗壽)는 헌의하기를, “신의 망녕된 논의로는 차라리 우리나라의 옛 제도에 의하여 행하고, 후일의 공론을 기다리는 것이 혹 무방할 것 같습니다 …….” 하였다. 《병문집(幷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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