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김완(金完)

야촌(1) 2011. 10. 19. 23:45

김완(金完)

 

[생졸년] 1577(선조 10) - 1635(인조 13)

 

1577년(선조 10)∼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구(子具). 영암 출신. 아버지는 이성현감(利城縣監) 극조(克祧)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어린 나이로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들어갔고, 이해 여름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방어사(慶尙道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임기가 끝나 돌아오다가 적을 만났다.


사인(士人) 조경남(趙敬男) 등과 궁장현(弓藏峴)에서 20여명을, 둔원내촌(屯院內村)에서 10여명을 목베었으며, 장치(獐峙)에서는 혼자서 수십명을 목베어 선혈이 반석에 낭자하여 후인들이 이 반석을 ‘혈암(血巖)’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장으로 병력점검을 위해 온 것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1601년(선조 34) 소파아권관 겸 단련사(小坡兒權管兼團練使)가 되어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군량의 운송책임을 맡았다.

 

1603년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이듬해 금모포만호(黔毛浦萬戶), 1607년에 남원판관(南原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서울에 올라와 한덕수를 찾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수년간 투옥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가 되고 다음해 절충장군(折衝將軍), 1618년 내금위장에 제수되었다가 곧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체임되었다.

 

1622년 평안좌도방어사, 다음해 평안도방어사 및 창성방어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3등에 책록되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구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그뒤 다시 복관되어 부총관을 거쳐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가 되었으나 모략으로 일시 투옥되었다.

 

그뒤 곧 풀려나 1634년에는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훈련원의 正三品)· 황해도병사[黃海道兵使-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던 종이품(從二品) 서반 무관직)]을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 인물 > 조선시대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수량 백비(朴守良 白碑) 이야기  (0) 2011.10.27
박수량(朴守良)  (0) 2011.10.26
서정리(徐貞履)  (0) 2011.10.10
이경선(李慶善)  (0) 2011.10.02
신면(申沔)  (0) 2011.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