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박수량(朴守良)

야촌(1) 2011. 10. 26. 22:33

■ 박수량(朴守良)

 

  [생졸년] 1491 (성종 22) - 1554 (명종 9)

  [문과] 중종(中宗) 9년(1514) 갑술(甲戌) 별시(別試) 을과(乙科) 2위/합격연령 : 24歲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25위 /합격연령 : 23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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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태인(泰仁). 자는 군수(君遂). 전라남도 장성 출신. 종원(宗元)의 아들이다.

김개(金槩)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광주향교(廣州鄕校)의 훈도로 취임하였다가, 그 다음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옮겼다.

 

이어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정언· 충청도도사 등을 거쳐, 1522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1525년 양친을 봉양하기 위해서 고부군수로 나갔다. 1528년에 부친상을 치르고 이어 사간원헌납· 사헌부장령· 봉상시첨정· 사도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531년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성균관사성을 사퇴하고 보성군수로 나갔다가, 이듬해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사성· 내섬시정· 군기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1534년 함경도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지방관아를 순시하던 중, 안원보권관(安原堡權管) 전주남(全周男)이 야인들에게 임의로 우마를 준 사실을 알고도 보고 하지 않았다가 투옥되었다.

 

1536년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을 역임하고, 이어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병조참지·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을 지내고 좌승지로 옮겼다가, 이어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나주목사로 기용되어 찰리사(察理使)를 겸하였고,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였다.

 

1537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이어 한성부판윤·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 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또 어머니 봉양을 위해서 담양부사로 나갔다가 1542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다가 1546년(명종 1)에 다시 상호군(上護軍)에 나아가 곧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50년 우참찬에 임명되어 지경연의금춘추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이듬해에는 경기도관찰사를 겸임하였고 숭록대부로 올랐다.1552년에 우참찬을 비롯, 호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554년에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주세붕(周世鵬)과의 교유가 깊었으며 사람됨이 간중신밀(簡重愼密)하고 예법을 잘 지키고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30여년의 관리생활에서도 집 한칸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뽑혔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大東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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