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안(姿女案) - 조선시대 여인의 행실기록
사람은 모두가 동물로서의 공통적인 본성(本性)과 개개인에 고유하게 내재되어 있는 고유한 본성(本性)을 가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저절로 엄마의 젖을 물고, 뭍에서 갓 태어난 거북이 새끼들이 줄을 지어 바다로 달려가며, 암컷과 수컷의 연어는 바다에 살다가 알을 낳기 위해 생명을 다해가면서 강의 상류로 올라가는, 모든 동물들이 생존과 종의 번식을 위한 본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의 본능을 더욱 강하게 소유하고 있다.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사대부 양반가문이 사회의 중심을 차지했던 조선조는 엄격한 가부장제(家父長制) 하에 모든 제도가 마련되고 시행되어졌다. 가부장들에게는 그 권위만큼 많은 특권이 주어졌고, 조선조 성문화 역시 이들의 영역을 훼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고려 때 시작된 ‘자녀안(姿女案)’이 조선조에서는 더욱 엄격해져
‘자녀(姿女)’라 함은 ‘방자한 여자’, 즉 ‘행실이 음란하고 방탕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자녀안’은 바로 그런 여자들을 기록하여 국가에서 신분을 낮추거나 그 자손들이 일정한 관직에 오름을 제한하기 위해 국가에서 관리하던 대장(臺帳)이었다.
그 대상은 사족(士族)인 양반집 여자였고, 양반가문의 여자가 간통 등을 저질러 행실이 바르지 못하였거나 삼가(三嫁)하였을 경우에 이 문서에 기록했다.
양반집 여자가 자녀안에 기록되는 것은, 음탕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당사자는 물론 가문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양반가의 남자들은 자신의 집안에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여자를 죽이기도 하는 등, 스스로 처벌을 가해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처벌은 대개가 덮어지기 마련이었다. 조선조 초기만 해도 제사를 물려받는 장자에게만 조금의 차등이 있었을 뿐 여자들에게도 상속권이 인정되었지만,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조선조 후기 들어 더욱 심해져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으로 아예 상속권도 인정되지 않았고 여성들의 생활환경은 더욱 척박해져 갔다.
이 제도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철폐되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사회적 풍속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자녀안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당시에는 남편이 있는 여자가 간통을 하였을 경우 이에 기록하여 신분을 낮춰 종(針工)으로 삼기도 했다.
이렇듯 고려시대에서는 간통한 유부녀만을 대상으로 자녀안에 기록하였으나, 사대부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고려 말에서 조선조로 넘어 오는 시기에서는 남편이 죽어 개가하는 경우로까지 대상범위가 넓어져가게 되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1년 1389년에는 ‘6품 이상의 처첩은 남편이 죽은 뒤 3년 간 재가(再嫁)할 수 없으며, 수절할 경우에는 그 정절을 포상한다’는 규칙이 만들어져, 사대부들이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이 시기부터 과부의 재가를 제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었다.
공양왕은 3년 간 재위에 머무르다 폐위 된 3년 후 삼척에서 살해되고, 이성계가 문을 연 조선왕조가 건국된다.
태조는 양반집 부녀자들이 가까운 친척 외의 남자들과 왕래하는 것을 금하였고, 양반의 이혼은 왕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태종에 들어서는 이 분위기가 더욱 구체적으로 확대되어 양반가 여자들의 간통은 물론, 남편이 죽어 세 번 이상을 결혼하는 삼가(三嫁)까지 음란한 행동으로 보아 자녀안에 기록하도록 하였다.
태조와 태종도 이미 결혼했던 경험이 있는 여자를 후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던 터라, 이 시기만 해도 재가까지는 큰 문제없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종에 들어서는 1447년에 재가까지 금지하게 되어, 조선왕조가 안정된 기반을 확립해가면서 유교에 바탕을 둔 가부장제 또한 더욱 강화되어 가게 된다.
성종 8년 7월 17일(1477년)
1477년 성종 8년 7월 17일, 과부 조씨가 양반 김주에게 재가하자 과부 조씨의 재산을 탐낸 동생이 김주를 강간으로 무고한 사건에 대해 성종은 다음과 같이 명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이심(李諶)의 처(妻) 조씨(趙氏)가 족친(族親)으로 하여금 혼인을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중매하여 김주(金澍)에게 시집간 죄와 김주(金澍)가 조씨에 혼취(婚娶)하되, 예(禮)를 갖추지 않고 장가든 죄는 <대명률(大明律)>을 상고하니, ‘화간(和奸)한 자는 장(杖) 80대를 처한다.’ 하였으니, 남녀(男女)를 한가지로 죄(罪)주어 이혼(離異)하게 하고, 조식(趙軾)·송호(宋瑚)·조진(趙軫)이 조씨의 전민(田民)을 나누어 점거하려고 모의하고, 김주(金澍)를 강간(强奸)으로 무고(誣告)한 죄는, 조진은 수범(首犯)이 되니,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 리(里)를, 조식·송호는 종범(從犯)이 되니, 장(杖) 1백 대에 도(徒) 3년을 처하되, 아울러 고신(告身)을 모두 추탈(追奪)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가, 조씨(趙氏)·조진(趙軫)·조식(趙軾)·송호(宋瑚)는 장속(杖贖)하였다.
◈혼취(婚娶) : 혼인
◈고신(告身) : 관직의 임명장, 신분증명서
◈장속(杖贖) : 장형(杖刑)을 면하려고 바치던 돈
내용인즉, 재가를 했어도 중매를 통하지 않고 일가친족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예를 갖추지 않았으며 사사로이 행했으니 혼인으로 인정할 수 없고, 또 강간이 아닌 화간이니 범인들에게는 벌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동일한 날(성종 8년 7월 17일)에 성종은 정승을 지낸 사람들과 의정부ㆍ육조ㆍ사헌부ㆍ사간원ㆍ한성부ㆍ돈녕부 2품 이상과 충훈부 1품 이상의 관리들을 불러 부녀(婦女) 재혼의 금지에 대해 의논하게 한다.
이 자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가(良家)의 여자가 나이 젊어 남편을 잃고 죽기를 맹세하여 수절하면 착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기아와 추위에 고생을 하여 어쩔 수 없이 뜻을 꺾는 여자가 간혹 있을 것이다,
만약 법을 세워 금절(禁絶)하게 하였다가 그것을 어긴 여자의 죄를 다스려 그 피해가 자손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풍습을 잘 교화하려 했던 의도에서 벗어나 잃는 것이 적지 아니할 것이니, 이전에 삼가(三嫁)한 여자들 이외에는 그 잘못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대부의 집은 대대로 예의를 지키어 그 도가 문란하지 않았는데 근래에 금하는 것이 조금 느슨해지자 이심의 처 조씨처럼 스스로 남자를 선택하여 추악한 소리가 들리고도 있으니, 만약 이를 깊이 다스리지 않으면 중인(中人) 이하의 여자는 이후 이심의 처를 핑계하고 수절하지 않을 것이니 예속(禮俗)이 무너지는 것을 어찌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심의 처 조씨를 엄단하여 잘못된 것을 분명히 한다면 비록 재가를 금지하는 법을 세우지 않더라도 예속이 장차 바르게 되어 과부가 경계할 것이므로 삼가(三嫁)를 금지하는 지금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에 반해 “이미 자녀를 두었고 집안이 심하게 가난하지 않은데도 스스로 재가하기도 한 과부들도 있었으니, 이것은 정욕을 이기지 못한 경우이므로 이후 삼가(三嫁)를 고쳐 재가를 금지하는 것으로 논함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 날(성종 8년 7월 17일) 성종은 대부분의 신하가 주장한 바와는 다른 지시를 예조(禮曹)에 내리게 된다.
“전해져 오기를, 정절은 부녀의 덕이니 한 번 더불어 함께 했으면 죽을 때까지 고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약 이를 엄격하게 세우지 않으면 음란한 행실을 그치게 하기 어렵게 된다.
이제부터는 재가(再嫁)한 여자의 자손은 사판(士版 : 벼슬아치의 명부)에 나란히 하지 않음으로써 풍속을 바르게 하라”고 하며 양반집 여자로서 재가함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성종의 행동은 ‘어우동 사건’에서도 똑같았는데, 대부분의 신하들이 유배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물리치고 즉시 교형(絞刑)에 처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부녀의 문제에 이렇게 단호했던 성종의 태도들은 폐비윤씨의 경우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도 된다. ‘자녀안(姿女案)’은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조선조에서는 남편과 사별한 후 평생 수절한 여자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열녀문(烈女門)을 세웠고,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열녀문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것을 생열녀문(生烈女門)이라 했다. 그런데 이런 엄격한 사회제도 속에 열녀문의 수가 넘쳐나지 않았던 것은 어떤 까닭이었을까.
남녀 간의 진실한 사랑은 육체에만 있지 않고 그들 서로의 내면적 요소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는 바가 큰 믿음일 것이다. 또 그것은 상대에게 무한하게 베푸는 마음인 동시에, 그런 자신의 마음을 더욱 소중하게 간직하고자 하는 믿음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선 일찍 홀로 되어 어렵게 자식을 키웠고, 키워가고 있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흔하지는 않으나 가끔은 들어가고 있다.
사랑함에 의무가 있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당연히 물리치기도 한다. 그것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일 뿐, 강제한다 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이라 해서 이것을 모를 리 없었다.
언제 살을 맞대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후궁들과 수많은 궁녀들, 축첩제도, 기생제도, 양반의 권세에 벌벌 떨어야만 했던 하층민들과 노비들. 이 모든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쪽의 물꼬를 단단히 틀어막아야할 필요성이 컸었을 것이다.
여자들의 투기를 가장 큰 죄악 중의 하나로 삼아 막으려 했고, 정실과 첩들 간의 화목을 덕으로 삼았으며, 죽어서 뼈를 묻어야 함을 인종의 미로 교육했던 것들이, 그 사회의 모순을 옳은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노력들이었다.
조선조 가부장제 하의 남성 중심 사회가 때로는 비난을 사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정의(正義)가 모든 경우에 공평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부정의를 덮기 위해 정의를 희생시키는 경우들이 많았으니, 위선으로 기만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제함으로써 많은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간통은 그 사람이 결혼했음을 전제로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일부종사하지 않는 여자들의 모든 성행위를 간통으로 파악했다. 사대부 중심의 억지 제도들이 오히려 그 당시의 성풍속을 더욱 어지럽혔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것을 지켜보는 같은 사족(士族) 여자들의 의식을 본능적으로 약화시키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겨나는 문제들이 더욱 불거지자 강제로써 억압할 수단을 취할 수밖엔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미모가 출중한 첩을 쟁탈하기 위한 다툼도 드물지 않게 발생하고 있었다.
자녀안을 수단으로 함이 더욱 강해지면서 그것에 연좌되어 발생하는 피해는 더욱 커갔다.
그 여파로 어머니를 간통했다 하여 타살하고, 딸과 동생, 심지어는 친척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한편 자살을 강요하여 이승을 떠나게 하기도 했다. 그로써 ‘자녀목’ ‘자녀암’ ‘자녀소’ ‘자녀굴’ 등, 간통을 했다고 지목된 여자들이 자살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곳이 여러 곳에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의 사건들
●‘신자치’의 여종 겁탈이 초래한 살인-
성종 5년 10월 10일. 성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사건의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동부(東部)의 첩정[牒]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북부(北部)의 참봉(參奉) 신자치(愼自治)의 아내 이씨(李氏)가 그 어미 이씨(李氏)와 더불어 신자치가 간통한 계집종 도리(道里)를 시샘하여 그의 머리를 깎고 고략(拷掠)하며 또 쇠를 달구어 가슴과 음문(陰門)을 지지고 하여 몸에 완전한 살이 없게 하여 저 흥인문(興仁門) 밖 산골짜기에 버려두었으니, 그 잔인(殘忍)함이 막심합니다. 이씨 모녀를 청컨대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어 국문하게 하였다.
노비를 살해한 사건은 이러했다.
참봉 신자치가 여종인 도리의 외모가 뛰어난데 흑심을 품고, 마침내 위력을 행사하여 겁탈한 다음 계속해서 도리를 위협하여 욕정을 해결하곤 했다. 얼마가지 않아 이 사실은 신자치의 처에게 발각되었고, 질투에 눈이 먼 신자치의 처는 자신의 엄마와 함께 저항할 수 없는 도리의 옷을 발가벗겨 묶어 놓고 희롱하듯 마음껏 때리고 쇠를 달구어 지지기까지 했다. 남편이 농락한 도리를 그 아내가 죽임으로 보답하였고, 이들은 도리가 숨지자 태연하게 흥인문 밖 산에 갖다 버렸던 것이었다.
국문의 결과는 신자치의 처가 사족(士族)의 아내라는 것을 이유로 ‘장 100대’에 처하는 대신 경상도 땅에 부처하는 것을 전부로 끝을 맺었다. 그 어미와 신자치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도리의 경우에서처럼 당시 노비는 하나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남종과 사대부 부녀간의 간통도 있었지만 이것도 사대부 부녀의 은밀한 접근이 대부분이었고, 도리와 같은 여종들은 언제나 그 주인인 사대부들의 노리개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먼 친척 되는 사족(士族) 간의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정분
세종 5년 9월 25일. 세종실록에는 전 관찰사 이귀산의 아내와 지신사 조서로 간의 간통에 대해 임금에게 보고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사를 보았다. 대사헌 하연(河演)이 계하기를, “비밀히 계할 일이 있사오니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의정(議政) 이원(李原) 만을 남게 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나가니, 하연이 계하기를, “전 관찰사 이귀산(李貴山)의 아내 유씨(柳氏)가 지신사(知申事) 조서로(趙瑞老)와 간통(姦通)하였으니, 이를 국문(鞫問)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라 드디어 유씨를 옥에 가두었다.
이들의 사연은 이러했다. 이귀산의 아내 유씨와 조서로는 먼 친척으로 유씨가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여승이 되어 조서로의 집에 드나들다가 14세 때 사통을 하고 못내 그리워하다, 유씨가 환속하여 이귀산에게 시집을 가자 조서로가 자주 귀산의 집을 찾아가 만나며 둘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이귀산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도 이귀산을 기만하고 계속 간통을 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따라서 유씨는 3일 동안 ‘자녀(姿女)’의 표찰을 달고 저자에 세웠다가 목을 베고, 조서로는 개국공신의 적장(嫡長 : 정실에서 난 맏아들과 맏손자)이므로 그 형을 면한다는 것이 세종의 결정이었다.
세종은 이와 같은 결정을 함에 있어 “이 나라가 동방의 예의지국으로 지내온 지 오래인데, 대대로 벼슬을 하여 온 집안에서 이런 행실들은 없었다. 지신사는 왕명의 출납을 맡아 그 임무가 막중했거늘 사람의 도리를 넘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러나 공신의 적장(嫡長)이므로 형을 가할 수 없고, 유씨는 대신의 아내로서 감히 음탕한 짓을 저질렀으니 그 죄를 크게 징계하여 뒷날을 경계해야 한다”고 유씨를 극형에 처하는 이유를 말했다.
●수십 명과 간통한 유감동(兪甘同) -
유씨에게는 극형을 명했던 세종이었지만 검한성(檢漢城 : 명예 한성판윤(현재의 서울시장)) 유귀수의 딸 유감동에게는 처음에는 자원하여 부처하도록 했다가, 사헌부에서 전례와 형평이 닺지 않음을 이유로 재고를 요청하자 변방 노비로 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니, 관련자들의 배경에 따라 가했던 벌도 천태만상이었다.
1427년 세종 9년 9월 16일, 사헌부에서 유감동의 음행사실과 관련자들의 형량을 아뢰었다.
유감동은 최초 남편인 현감 최중기의 부임지로 따라갔다가 비접(避接 : 병을 앓는 사람이 자리를 옮겨 요양함)하러 가는 길에 김여달(金如達)을 만나 순찰한다고 위협받아 강간당하고, 김여달이 직접 최중기의 집을 드나들며 간통하다 김여달을 따라 남편을 떠나 도망을 했다.
유감동은 이후 창기(倡妓)라 거짓하며 서울과 외방(外方)을 돌아다니며 음행을 일삼았다. 그가 상대한 수십 명의 남자들 가운데는 고위 관리들은 물론이고, 아전과 장인(匠人) 등 각계각층을 망라해 성종 때의 어우동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특히, 이승(李升)과 이돈(李敦)은 유감동과 간통을 하면서도 감동의 아버지 집에 드나들며 교분을 유지했고, 이효량(李孝良)은 비록 복제에 들지 않았지만 유감동이 처남의 아내임에도 간통을 저질렀으며, 권격(權格)은 고모부(姑母夫)인 이효례(李孝禮)가 유감동과 먼저 간통한 것을 알면서도 여러 차례 간통하기도 해, 이들의 음행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세종은 이들의 벌을 정함에 있어 이돈·효량·상동·수생은 공신의 후손이므로 외방에 부처하고, 진자(嗔紫)는 공신의 아들이므로 파면하라 하였고, 이자성(李子成)은 논죄하지 말라 하며 전체적으로 경한 벌을 과했다.
세종의 결정에 대해 사헌부에서는 상소로써 벌이 너무 가벼우니 수정하여 줄 것을 고하고 있다.
사헌부는 이 상소에서 “전하께서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처단하심은 형벌을 신중하게 하시고자 하는 아름다운 뜻이기 때문에 감히 목을 베기를 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의 경우에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은 극형을 받았는데 이번의 경우만 형률에 의거하면 경중의 균형을 크게 잃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풍속을 바로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변방의 노비로 삼아 종신하도록 하소서”라 했고, 세종은 이를 윤허했다.
●세종의 회고
세종 18년 4월 20일. 세종은 사헌부에서 이석철(李錫哲)이 처제인 종비와 통간하였음을 아뢰며 중벌을 내리기를 바라는 말에, 자신이 예전에 가했던 가혹했던 형벌을 회고하며 율(律)대로 처할 것을 명하고 있다.
세종은 이 말을 하며 예전 자신이 극형을 명했던 것을 후회하는 마음을 내비치면서 기억하고 있는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었다. “고려 말에 풍문을 가지고 죄를 묻고 벌을 주어 무고한 사대부 아내까지 원통하게 된 경우가 많았으므로, 태조와 태종께서는 그 해독을 아시고 법을 혁파하셨다.
그러자 변중량(卞仲良)의 누이동생이 가노(家奴)와 간통하고 그 일이 탄로되자 그 죄를 덮으려고 오히려 자신의 지아비가 모반한다고 고소하여, 무고한 그 지아비는 매로 인해 죽었고 아내는 지아비를 무고하여 참형을 당했다.”
“유은지(柳殷之)의 누이동생은 중과 은밀히 간통한 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가노 세 사람을 다 죽였으니, 비록 종이라 하더라도 인명이 지중함으로 법으로 다스려 참형에 처하였다”
“승지 윤수(尹須)의 아내 조씨(趙氏)는 고종형[表兄] 홍중강(洪仲康)과 장님 하경천(河景千)과 통간하였으므로 역시 극형에 처하였으니, 이는 우리 조종께서 형벌이 적당하고 그릇됨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즉위한 뒤로 이귀산의 아내가 지신사 조서로와 간통하여 그 때 내 나이 젊고 한창이었던 때라, 치교(治敎)에 흠이 될까 하여 율문 밖의 형벌인 극형에 처하였었다.
그러나 유감동은 율에 따라 결죄(決罪)하여 천인으로 만들었고, 고종형 홍양생(洪陽生)과 통간한 유장(柳璋)의 딸인 안영(安永)의 아내, 부사정 이의산(李義山)과양인(良人) 허파회(許波回)와 통간한 이춘생(李春生)의 딸인 별시위(別侍衛) 이진문(李振文)의 아내는 모두 다 율에 따라 다만 외방으로 축출하였다.
이석철의 일에 대해 율외의 형벌을 가하는 것은 실로 잘하는 정사가 아니다. 지난 날 한두 가지의 율외의 형벌은 지금 후회가 된다. 의정부에 가서 잘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이 “이석철의 더러운 행실은 일국의 신민들이 모두 다 미워하는 바입니다. 만약에 율문대로만 따를 것 같으면 물의 (物宜 : 사물이 당연히 그러하여야 할 상태)에 맞지 않을 것 같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율문대로 과죄하시고 종신토록 변방에 충군하여 벼슬할 수 없도록 하소서”라 청하자, 세종은 그에 따랐다.
이렇듯 조선조 양반가에서 행해졌던 간통의 예는 비일비재했다.
●간통에 얽힌 치정 살인
세조 1년 12월 12일. 세조실록에는 행방불멸 된 이석산에 대해 세조에게 아뢰어진 사항이 기록되고 있다.
행방 불명된 이석산과 놀러 간 신간 등을 의금부에서 국문하게 하다
이석산(李石山)이란 자가 그 친구 신간(申澗)과 함께 놀러 나갔다가 여러 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그 종[僕]이 형조(刑曹)에 고하였다. 형조에서 신간을 잡아 국문(鞫問)하니, 신간이 말하기를,
“이석산이 첨지(僉知) 민발(閔發)의 첩 막비(莫非)를 몰래 간통(奸通)하였고, 또 가자(歌者)637) 인 금자(錦紫)를 유혹(誘惑)하려고 하였는데, 그가 간 곳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므로, 형조에서 계달하니, 명하여 신간과 막비를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세조 1년 12월 한양에서 눈과 음경이 도려지고 칼로 난자당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 시체는 왕실의 종친이었던 이석산으로 계유정난 때의 공신인 재상 민발의 첩과 간통해왔다는 사실을 형조에서는 확인했다. 민발의 집에서는 살인의 흔적과 증거품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활을 잘 쏘던 민발을 아꼈던 세조는 형조의 아룀을 듣지 않고 목격자가 없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이유로 조사를 다시 할 것을 명했다.
실록에 적기를,
“청컨대 민발을 가두고, 막비를 고신(拷訊)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얼마 안되어 민발을 석방하고, 전교하기를,
“민발은 지위[位]가 재상(宰相)에 이르렀고, 또 원종(原從)의 공(功)이 있으니, 의심스러운 일로 몸을 구속하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또 승정원에 묻기를,
“만약 민발의 소위(所爲)라면, 민발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인데, 어떤 율(律)로 과죄(科罪)할 것인가?”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민발이 비록 공신이나, 이석산도 또한 공신의 후손이므로 공신이 공신을 죽였으니, 죄를 감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오히려 의심하여, 다시 조사하여 상(賞)을 걸고 죄인을 찾게 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민발의 소위인 것을 알았으나, 이[齒]만 갈 뿐이었다. 민발은 얼굴이 흉악하고 목소리가 거칠어, 용맹하나 의리가 없었다.
일찍이 그 형 민서(閔敍)와 더불어 민서의 첩의 간부(奸夫)를 구타하여, 거의 죽게 되었었다”라 한 것으로 보아 민발의 범죄사실은 명백했다. 이 사건은 세조가 사실을 잘못 조사했다는 것을 이유로 동부승지 이휘를 파직함으로써 일단락됐으나, 민발은 이후에도 계속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음란하다고 소문난 조카며느리를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고 살해
정조 11년. 강원도 안협에 사는 70세노인 양반 이언이 조카며느리인 구소사가 음란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문중의 명예를 위한다는 구실로 일가친척과 구소사의 오빠인 구성대를 동원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구소사의 말도 듣지 않고, 칡넝쿨로 묶어 자루에 넣은 다음 돌을 얹어 강에 던져 살해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감이 시체를 찾아내어 살인임을 확인하고, 이언과 구성대를 불러 신문한 다음 관찰사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관찰사는 구성대를 곤장 때리며 신문하였고, 구성대는 이로 인해 장독이 올라 사망하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사건을 다시 조사할 것을 명했고, 이 사건은 이언과 구대성이 주도하여 벌인 것임이 확인되었다.
형조에서는 이언에게 사형을 가할 것을 아뢰었지만, 이미 피해자의 오빠인 구대성이 죽었다는 것을 이유로 조정에서는 한 건의 옥사에 두 명을 사형시킬 수 없다 하며 갑론을박을 벌여갔다. 결국 이 사건은 이언에게 곤장을 때린 다음 이언을 석방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살해당한 구소사가 간통 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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