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홍랑(洪娘)의 사랑

야촌(1) 2011. 3. 15. 16:51

■ 홍랑(洪娘)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함경도 경성(鏡城) 기생. 홍원 출생.

 

조선의 3대 기녀로, 1573년(선조 6) 가을에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리던 최경창(崔慶昌)이 북도평사(北道評事)로 경성에 갔을 때, 그녀도 따라가 그 막중(幕中)에 있었다.

 

이듬해 봄에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오자 쌍성(雙城)까지 따라와 작별하고, 돌아가다가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시조 1수를 지어 최경창에게 보냈다.

 

그뒤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떠나 7주야 만에 상경하였다.

그때 양계(兩界: 평안도·함경도)에 금(禁)함이 있고,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죽은 탓으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최경창은 면관(免官)되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시조(칠언율시의 이별시)와 최경창의 한역가가 전하는데 아래와 같다.

 

折楊柳寄與千里(절양유기여천리)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人爲試向庭前種(인위시향정전종)주무시는 방의 창가에 심어 두고 보시옵소서.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생신엽)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면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참고문헌]

國文學全史(李秉岐·白鐵, 新丘文化社, 1959)

 

 

기생 홍랑(洪娘)은 조선의 명기(名妓)인 명월(明月) 황진이(黃眞伊)와 비슷한 시기의 기생으로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과의 일화이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이가 북해 평사로 근무할 때 관기인 홍랑과 사랑을 하게되고 이후 최경창은 서울로 발령이나 이별이 아쉬워 함관령 고개까지 따라와 산 버들가지를 꺽어 주며 즉석에서 지은 시조이다(위의 시조를 말함)

 

그후 서울로 간 최경창은 병에 걸려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홍랑은 법을 어기고(관기는 사랑을 하다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면 헤여 지고 새로 부임 온 사람과..또한 구역을 벗어날 수 없음) 7일 주야로 걸어서 서울에 와 간병하여 완치되고 헤여질 때 고죽 최경창이 기생 홍랑에게 길에 있는 난초를 꺽어주며 지은 시조(칠언율시의 사모시)는 다음과 같다.

 

 

최경창(崔慶昌-1539년-1583년) / 향년 45세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말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이 주고 받은 위의 시조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의 빌미를 되어 최경창은 관직에서 파면되고 당파 싸움의 희생물이 되어 45세때 지금의 서울 왕십리 부근에서 암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 소식을 들은 미인인 기생 홍랑은 자기 얼굴에 상처를 내 보기 흉하게 하여 남자의 접근을 막고 미친척 하며, 최경창의 무덤옆에 움막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한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시조 유품을 간직해 있다 해주 최씨 문중에 찾아가 그동안 주고받은 시조 유품등을 돌려주고 최경창의 무덤옆에서 자살한다.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홍랑을 두고 어떻게 할것인지를 종친회의 하여 천민인 기생은 양반 옆에는 묻힐수 없어 양반으로 신분을 격상하고 죽은 사람이지만 호적에 최경창의 첩으로 등재한 후 고죽 최경창의 무덤 옆에 묻힌다.

 

"살아있을 때는 천민이지만 죽어서 양반이 된 사람은 평양 기생 홍랑 한사람 뿐 이다"

사랑은 참 아름답고 고귀하여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얘기다.

 

 

↑고죽 최경창 묘

 

↑유인홍랑지묘(孺人洪娘之 墓), 위에 보이는 묘가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선생의 묘이다.

 

↑중앙의 유인 홍랑지묘(孺人洪娘之 墓), 위의 묘가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선생의 묘이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산 114번지에 소재하는 해주최씨의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선생과 여류시인

관기 홍랑(洪娘)의 묘이다.

 

사진출처 : 1) 나홀로테마여행

                   2) blog.naver.com/roaltlf/54065072 개미실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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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과 기생 홍랑(妓生 洪娘)의 영원한 사랑에 관한 글

 

2,2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에는 1997년에 영암문화원에서 세운 고죽시비(孤竹詩碑)와 구리마을의 해주 최씨 문중에서 2004년에 건립한 고죽관(孤竹館)이 있다. 조선시대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유명한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고죽 최경창선생 영정(孤竹 崔慶昌先生影幀)

 

해주최씨는 고려 성종 때 해주의 목민관(牧民官)을 거쳐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던 최온(崔溫)을 시조로 한다.

해주최씨가 고려 때에 국성(國姓)이라 할 만큼 튼튼한 기틀을 마련한 것은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알려진 최충(崔沖)이란 걸출한 인물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 성씨가 구림에 처음 터를 잡을 때는 시조 최온의 19세손 최경창 때부터이다. 그는 이곳 부호였던 임구령의 사위가 되어 토지 일부를 상속받아 구림에서 살다가 파주의 본가에 가서 죽었다. 그의 증손자 석징(碩徵 : 1604~1667)은 잦은 병 탓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구림에 내려와 할아버지 재산을 관리하면서 본격적인 정착 토성의 기반을 이뤘다.

 

슬하에 운서(雲瑞)·구서(龜瑞)·인서(麟瑞)의 삼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운서는 1652(효종3)년 무과에 합격해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구림을 떠났다. 오늘날까지 구림에 살고 있는 해주최씨들은 구서와 인서의 후손들이다.

 

고죽관의 뜰에 세워진 고죽시비의 정면에는 두 편의 시가 나란히 적혀 있다.

 

묏버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

자시 창(窓)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홍랑(洪娘)>

 

●번방곡(飜方曲)

 

절양유기여천리인(折楊柳寄與千里人 : 묏버들 꺾어 천리 먼 곳 임에게 부치오니)

위아시향정전종(爲我試向庭前種 : 나를 위해 시험 삼아 뜰 앞에 심어보소서)

수지일야신생엽(須知一夜新生葉 : 밤 사이 새잎 돋아나면 알아주소서)

초췌수미시첩신(憔悴愁眉是妾身 : 초췌하고 수심어린 눈썹은 첩의 몸임을)

<고죽(孤竹)>

 

 

↑고죽 최경창선생과 홍랑의 시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난 홍랑(紅娘, 연대 미상)은 조선 선조 때의 함경도 경성(鏡城) 관아의 기생이었다.

홍랑이 열여섯 되던 해 일생동안 생명을 다 바쳐 사랑했던 고죽을 만났다.

 

선조 6년, 1573년 가을, 서른넷의 나이로 북도평사(北道評事:평사는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에 임명되어 경성에 부임했다.

 

그가 부임해 온 함경도 경성은 조선의 변방으로 고려시대부터 여진족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던 곳으로 국방의 요지였다. 중요한 군사지역에 관리를 보낼 때는 군사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족과 떨어져 혼자 보내는 것이 당시 원칙이었다.

 

최경창이 북평도사로 부임하자 경성 관아의 기생들이 인사를 올리는 ‘점고’가 이루어졌다.

이 날 저녁 연회에서 최경창과 홍랑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1568년 선조 원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최경창은 문장과 학문에서 뿐만 아이라 서화에도 뛰어났고, 악기에도 능했다.

 

최경창이 영암에서 살 때 을묘왜변이 일어나 왜구들이 쳐들어왔는데 달밤에 구슬픈 피리소리로 왜구들을 향수에 빠뜨려서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고죽의 인품에서 나오는 답시는 홍랑의 마음에 풍랑을 일게 했다.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와 재색을 겸비한 경성의 이름난 기생의 만남은 운명이었을까.

이 날 이후로 홍랑과 최경창은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려 사랑의 바다에 빠졌다.

고죽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홍랑은 군막에까지 드나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한계가 있었다. 이듬해 봄, 최경창이 경성에 부임한지 6개월 만에 조정의 부름을 받은 최경창은 임기가 끝나 한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홍랑은 첫사랑이자 운명이라고 믿었던 최경창과 헤어질 수 없었고, 최경창 또한 홍랑을 두고 떠나기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영원을 기대했으나 6개월 만에 끝나버린 사랑 앞에서 홍랑은 몸살을 앓았다.

 

홍랑은 한양으로 떠나는 최경창과 조금이라도 함께 있기 위하여 경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없는 관기인 홍랑이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경계선인 함관령에 이르렀다.

 

이제는 사모하는 님을 보내주어야 한다. 홍랑은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과 외로움을 안고 저문 날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 송별시를 지어 버들가지와 함께 사랑하는 님에게 보냈다. 최경창은 함관령의 이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와 이별한 뒤, 홍랑이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렸다. 이곳에서 홍랑이 내게 시를 지어 보냈다".(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홍랑의「묏버들 것거」는 황진이의 「동짓밤 기나긴 밤에」에 이어서 시조시인들이 두 번째로 많이 애송하는 국민시가 되어 있다.

 

최경창은 홍랑이 보내준 시를 한시로 번역하여 ‘번방곡(飜方曲)’이라 했다. 이와 같이 홍랑과 고죽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두 편의 시가 나란히 수록된 시비가 구림마을의 고죽관 뜰에 세워져 있다.)

 

애끓는 이별을 뒤로하고 한양에 돌아온 최경창은 며칠이 못가 시름시름 앓더니 이내 병석에 눕고 말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그는 그해 봄부터 겨울까지 1년 내내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최경창이 아파서 죽어간다는 소식이 경성의 홍랑에게까지 전해졌다.

홍랑은 소식을 들은 즉시 주저하지 않고 함관령을 넘어 일주일 동안 밤낮을 혼자 걸어서 마침내 한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리운 최경창을 만났다. 실로 2년만의 재회였다. 그러나 최경창은 뼈밖에 남지 않은 몸에 홍랑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홍랑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홍랑이 왔습니다. 기운을 차리셔요.”

 

홍랑은 그때부터 잠을 자지도 않았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사도 최경창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수발을 들었다. 최경창의 부인도, 그리고 최경창의 부모마저도 감동시킨 눈물겨운 정성이었다.

 

마침내 홍랑의 지극정성으로 최경창은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고 병상에서 일어났다. 최경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을해년에 내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아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홍랑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출발해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최경창이 건강을 되찾은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당시, 선조 9년, 1576년 봄, 사헌부는 최경창의 파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홍랑이 관기의 신분으로 지역을 이탈하여 양계의 금을 어겼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홍랑이 최경창을 찾아온 때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안된 국상기간이었다. 이러한 때에 당쟁에 혈안이 된 동인들이 서인에 속한 최경창의 기생스캔들을 들어 가차 없이 공격해 온 것이다.

 

사헌부의 상소로 결국 최경창은 파직을 당했고, 홍랑도 함경도 경성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최경창은 관직을 박탈당한 것보다도 홍랑을 다시 돌려보낸다는 게 너무도 힘들었다. 최경창은 함관령에서 홍랑이 송별가를 지어 자기에게 준 것처럼 자신의 절절한 마음을 한편의 시에 담아 경성으로 돌아가는 홍랑의 손에 들려주었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말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이 날, 두 사람의 헤어짐은 생전에 다시 못 볼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최경창은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이후 복직이 되어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님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홍랑은 곧 바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홍랑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최경창의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사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사리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특히 다른 남정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고 살았다. 고생은 그뿐이 아니었다.

고죽의 묘소가 한강 하류 인근이라 겨울이 되면 차가운 강바람도 참아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하여 3년을 지나고, 차마 떠날 수 없어 수년 동안의 시묘사리를 계속하였다.

 

근 10여 년 동안의 시묘 사리를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었다.

 

홍랑은 자신의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 국토가 황폐화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사랑하는 이의 혼이 담긴 유품을 생명처럼 지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와 최경창의 유작을 전했다. 그리고 홍랑은 자신의 소임을 다한 듯이 사랑하는 무덤 앞에서 목숨을 끊어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고죽 최경창의 묘소와 그녀의 무덤이 있다.

 

고죽 최경창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하게 되고, 열악한 기생의 신분으로 일부종사한 홍랑. 홍랑은 단 한편의 가슴 아픈 사랑시를 남겼고, 고죽과의 비록 세 번의 만남과 6개월 밖에 자유롭게 나누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사랑의 진실을 몸으로 보여준 영원한 사랑의 메신저이다.

 

고죽(전남 영암)과 홍랑(함경 경성)과의 사랑은 월출산의 사랑의 힘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들의 만남은 남남북녀의 만남이다. 에너지 넘치는 월출산에 서있는 건강한 사랑바위들의 기운이 이 두 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기를 불어넣어주었을 것만 같다.

 

이 두 분의 사랑정신이 월출산의 바위처럼 온갖 탐심으로 요동치는 세상 앞에 든든히 서있기를 기대한다.

 

(사진과 글 : 박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