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사홍(任士洪)
[생졸년] 1445(세종 27)~1506(중종 1).
[문과] 세조(世祖) 12년(1466) 병술(丙戌) 알성시(謁聖試) 3등(三等) 7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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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사의(士毅). 자는 이의(而毅). 좌찬성 원준(元濬)의 아들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광재(光載)는 예종의 딸 현숙 공주(顯肅公主)의 남편으로 풍천위(豊川尉)가 되고, 숭재(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어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교리· 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중국말에 능통하여 관압사(管押使)·선위사(宣慰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477년(성종 8)에 서얼출신인 유자광(柳子光)과 손을 잡고 지평 김언신(金彦辛)을 사주하여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도승지현석규(玄錫圭)를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소인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다.
김언신에 이어 유자광이, 다시 현석규를 공척(攻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성종은 이를 붕비(朋比)로 보고 김언신을 하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구해(救解)상소가 계속되었으며, 그 이듬해 4월에 홍문관부제학유진(兪鎭), 예문관봉교 표연말(表沿沫), 종실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 등의 잇따른 상소에서 임사홍이 사주한 것으로 밝혀져 그는 의주로, 유자광은 동래로 각각 유배되었다.
따라서 그는 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성종조에는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재기하여 사화를 주도하였다. 유자광은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계열에 보복을 가하였으며, 그는 1504년에 갑자사화를 주도하여 훈신계열을 축출하는 데 앞장을 섰다.
즉, 그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제휴하여 연산군의 생모가 죽은 내막을 밀고함으로써 폐비사사(廢妃賜死) 당시의 중신들을 타도하고, 사림계 인사들에게도 다시 화를 입혔다. 그의 아들 희재(熙載)는 김종직의 문하가 되어 무오사화때 화를 입었으며, 그는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어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가산도 몰수당했다.
글씨는 촉체(蜀體)를 잘 썼고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다.
오늘날 전하는 글씨에 <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衿川), <박중선묘비명(朴仲善墓碑銘)>(楊州), <이계손묘비명(李繼孫墓碑銘)>(廣州),<한확묘비명(韓確墓碑銘)>(廣州), <영원윤호묘비명(鈴原尹壕墓碑銘)>(麻田), <서거정묘비명(徐居正墓碑銘)>(廣州) 등 여러 금석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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