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생졸년] ? - 1451년 4월 10일)
조선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혜(譿)이다. 태종의 손자이며, 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 조카이다.
아버지는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褆)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증 좌의정 광산군 김한로(光山君 金漢老)의 딸로 수성군부인(隨城府夫人 金氏)이다.
부인은 안산김씨(安山金氏)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의 딸로 양천군부인 김씨(陽川郡夫人 金氏)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0남 17녀 중 적 3남으로 출생하여 관례를 올리고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의 딸 안산김씨(安山金氏)와 결혼하였다.
1435년(세종 17) 4월 16일 가정대부(嘉靖大夫, 종2품)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었다.
그의 형 순성군 이개(양령대군의 장자)를 군으로 책봉하는 것을 두고 일부 신하들은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순성군 이개의 책봉에는 극렬 반대하면서도 이혜(李譿)의 봉작에는 반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1438년(세종 20) 5월 19일 금지된 단오날에 석척희(石擲戲)를 범하여 탄핵을 받고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되돌아왔으며, 이해 12월 3일 다시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었다.
1439년(세종 21) 1월 20일 종묘제를 서계(誓戒)한 후에 영돈녕부사 권홍(權弘)의 집에 모이어 기생 소지홍(小枝紅)과 김규월(金閨月) 등을 불러서 술 마시고,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과 한 기생 소지홍과 간통하고, 그 뒤 정효전과 서로 한 기생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가 탄핵 당하였다.
사람을 때려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을 상하게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 4월 2일 다시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었다가 1444년7월 1일 종2품 중의대부(中義大夫) 서산윤(西山尹)으로 변경되었다. 그 뒤 사람을 상하게 한 일로 황계령(黃溪令)으로 강등 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3일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여 종부시(宗簿寺)에서 그 죄를 청하여 세종이 명하길, "직첩을 거두어고성현(固城縣)에 안치(安置)하고 인하여 그 도 감사에게 일러서 밭과 집을 주게 하고, 또 활과 살을 가지고 나가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또 바깥 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의 붕어 직후 몰래 도망쳐 양녕대군은 사람을 보내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혜(李譿)는 금강산에 입산해 오랫동안 은신해 있다가 되돌아왔다.
관직은 중의대부(종2품)에 이르렀고 그가 죽자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에 예장하였다.
사후 복권되어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고, 종1품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추증되었다.
조선왕조 세종실록의 세종 32년의 기사에 의하면 그의 사고 원인에 대해 아버지 양녕대군이 그의 첩을 빼앗았기 때문이라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혜(譿)는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에게 빼앗기고 심화 병을 얻어, 술김에 자주 사람을 죽인 까닭에,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양령대군의 3자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의 묘.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
↑옛 석물은 많이 훼손되어 근래에 석물들을 많이 조성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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