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활계집(活溪集)-이대유 저

야촌(1) 2011. 9. 20. 02:28

필자소장본 - 1880년(高宗 17)  간행본

 

 

 

 

 

 

 

 

 

 

■ 활계선생유고(活溪先生遺稿)

 

[저   자] 이대유(李大㕀) / 朝鮮) 著

[간   행] 1880년(高宗 17)

[책권수] 2卷 1冊

[판   본] 木活字本

[크  기] 20.8cm(가로) × 29.9cm(세로)

 

●내용

활계 이대유「活溪 李大㕀 : 1540년(중종 35)~1609년(광해군 1) 」는 조선전기의 유학자로.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 본관은 경주(慶州), 남원(南原) 출신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재사당(再思堂) 원(黿)의 증손이다.

정염(丁焰)을 따라 수학했고 생원(生員)에 합격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고 있을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좌랑(佐郞)에 제수되었다.

 

영천서원(寧川書院)에 배향되었고. 그의 유고 활계집(活溪集)은 현손 장욱(長郁)이 1657년(효종 8)에 2권 1책 목활자본으로 편집 간행하였고, 그 뒤 후손 집형(集馨)이 1822년(순조 22) 중간하고 1880년(高宗 17)에 3간하였다.

 

권두에 이이근(李頤根)의 서문, 권말에 송치규(宋穉圭)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와 고려대학교 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그러나 그의 평생 관심은 어디까지나 학문(學問)과 시문(詩文)에 있었고, 그리하여 남들이 혹 출세하기를 권하면 그는 문득 소자시(邵子詩) 가운데의 직재흉중빈역락굴어인하귀해위(直在胸中貧亦樂 屈於人下貴奚爲)를 읊으며 서책(書冊)으로 일생을 마쳤다 한다.

 

 동시에 그는 당시 호남부자(湖南夫子=호남의 ‘공자1’라 높여 이르는 말)의 칭(稱)송을 들었다고 하는데, 서문(序文)에 따르면 그의 글 은 이른바 지엽(枝葉)만을 분택(粉澤)하는 世人과 달리 질각평정 온수화아("質慤平正 溫粹和雅)"함이 특색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양적으로 보면 父子의 글이 모두 얼마씩 되지 않는데 우선 活溪 의 글을 보면 앞에 李頣根의 序가 있고五言絶句(玉山龍頭敬次晩軒先生韻 등 9수), 七 言絶句(次晩軒三月十八日夜吟 등 30수), 五言律詩(立春日呈晩軒 등 26수), 七言律詩( 奉酬金景言韻 등 42수), 五言古詩(送四川李上舍還鄕 등 2수), 七言古詩(次李聞遠新居 諸作 등 3수), 祭文(祭金主簿文 등 3편), 行蹟(都事丁先生行蹟 등 2편), 序(高塘德業 契序 1편), 書(答丁伯高書 1편). 附錄으로 行狀(星山 李尙吉 撰), 祭文(李景輿 등 5人 의 글), 挽詞(崔薀 등 2人 것), 寧川書院請額疏, 同賜額時致祭文, 墓碣銘(張維 撰) 등 이다.

 

이 가운데 특히 行狀은 모두 10장에 달하는 長文이다. 東林遺稿는 먼저 詩 <過 洛伽寺>등 32수와 寧川書院上樑文 1편이 있다. 그는 本文 註에 따르면 諱 以恂, 字 熙之며, 科業을 닦지 않고 그의 父 大㽕의 정자인 지우정(止隅亭)에 집을 짓고 琴書로 自娛하 여 鳳仙道骨의 稱을 듣던 사람이라 한다.

 

그리고 일찌기 沙溪 金長生에게 禮를 물은 바 있어 그로부터 <南州 高士>의 稱을 들었다고 한다. 

끝에 宋穉圭의 活溪集跋이 있 고 末尾에는 始祖로부터 38世에 이르는 慶州 李氏世系가 수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