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구암실기(舊庵實紀) - 이후겸(李厚謙) 著

야촌(1) 2011. 7. 20. 00:07

■ 구암실기(舊庵實紀)

 

    1925년 경북 영일군에서 후손 중우(重雨)가 간행한 것이다.

 

 

 

 

 

 

 

 

 

 

 

 

 

 

 

■ 이후겸(李厚謙)

   ◈생몰년 : 1681(숙종 7) - 1724(경종 4)

   ◈경주이씨 30世

   ◈9世 교감공(校勘公) 존사(存斯)의 후손.

   ◈간행연도 : 1923년

 

■ 구암실기(舊庵實紀) 

    木板本 2卷 單冊으로 권두에 癸亥(1923) 黃花節聞韶後人 金瀅模 謹敍의 手書刻序, 권말에 八代孫 李重

    雨...驪江 李中久 謹跋과 後孫 李鍾炫의 謹識가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후겸「李厚謙, 1681년(숙종 7) ~ 1724년(경종 4)」 의 유문 및 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이후겸은 어려서부터 영특한 글재주가 있어 12,3세에 사서삼경을 정독하고 문사(文辭)에도 크게 진취되어 보는 사람마다 신동(神童)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뒤에 숭덕전(崇德殿) 제축(祭祝)으로 더욱 그의 학식이 드러났으며, 특히 효우(孝友)에 독실하여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한다. 벼슬로써 세상에 크게 현달 하지는 못하였지만 당시 동경(東京 ; 慶州)의 이학(理學)이라 불렸다.

 

1723(경종 3)년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3백여 장의 만뢰(挽誄=輓詞와 祭文)가 있었다. 

이는 모두가 그의 박후충덕(樸厚忠德)을 칭송한 것으로 그의 위적(偉跡)을 충분히 볼 수 있다.

 

그는 평소 저술한 초고가 많았으나 정리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이에 그의 종자(從子)인 용와(龍窩)가 흩어진 고본(稿本)을 모아 몇 권의 책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중간에 화재로 인하여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6세손 사류옹(四留翁)이 불에 타던 나머지를 수집하고 또한 당시에 같이 교류하던 인사들의 문적(文籍)속에서 발췌하여 얻은 몇 편으로써 간행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또 다시 화(火)를 당하여 영영 찾아 볼 없게 되었고, 이를 아쉬워하던 8세손 종우(鍾宇)가 각지를 편람 하면서 수탐하여 얻은 것이 겨우 시(詩) 1편과 문(文) 1편뿐이었다. 1925년 경북 영일군에서 후손 종우가 간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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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겸(李厚謙)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자실(子實)이고, 호는 구암(舊庵). 본관은 경주(慶州)로 진사(進士) 이하구(李夏構)에게 양자 갔다. 재주와 기량이 뛰어나서 12세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막힘이 없어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고 경전 연구와 수양 공부에 힘을 다하여 경주의 ‘이학(理學)’이라 일컬어졌다.

1723년(경종 3)에 많은 양의 글을 지었으나, 초고도 채 정리하지 못한 채 43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문집으로 《구암 실기(舊庵實紀)》가 있는데, 서문은 없고 책 말미에 이중구(李中久)와 이종현(李鍾炫)의 발문을 붙여, 1925년 8세손 이중우(李重雨) 등이 편집하여 간행한 것이다. 

 

문집 내용으로는 만 시· 만가· 제문. ·묘갈명· 뇌문(誄文)· 행록· 행장 등이 있는데, 정작 본인의 글은 친구 이군정(李君正)을 위해 지은 만시와 제문 각각 1수가 있을 뿐이지만, 친구에 대한 애도와 깊은 우정을 잘 표현하였다.

 

부록에는 이후겸의 죽음을 애도한 문인들의 만 시 55수와 뇌문 22편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소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서수구(徐壽龜)의 뇌문에는 장자의 풍도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