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戶曹判書 坡谷 李誠中 墓碣/墓誌銘。

야촌(1) 2011. 8. 19. 22:59

■ 이성중묘표(李誠中墓表)

 

[세계] 세종의 아들 계양군 증(桂陽君 璔)의 현손.

[생졸년] 이성중『李誠中, 1539(중종 34) ~ 1593년(선조 26)』

 

[개요]

1654년(효종 5)에 세워진 이성중(李誠中)의 묘표(墓表)이다.

찬자는 조경(趙絅, 1586~1669)이고, 서자는 허목(許穆, 1595~1682)이다.

 

이성중『李誠中, 1539(중종 34) ~ 1593년(선조 26)』의 본관은 전주로 자는 공저(公著)이고, 호는 파곡(坡谷)으로. 세종의 아들 계양군 증(桂陽君 璔)의 현손이다.

 

그는 이중호(李仲虎)·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호조· 예조· 병조의 좌랑, 홍문관 수찬· 이조좌랑의 벼슬을 거쳤다. 1575년(선조 8) 동인에 속해 한산군수로 밀려났다.

 

1587년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고, 1589년에는 이조참판이 되고, 이듬해에는 옥당(玉堂)· 대사헌· 돈령부동지사가 되었다. 1591년 옥당장관으로 시폐 12조와 세자책봉을 거론하려던 참에 충청감사로 다시 밀려나고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파면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어사로써 임금을 호위하여 의주에 이르러 호조판서가 되었다.

1592년 7월 중국에 파견되어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1593년 7월 함창에서 병사하였다.

 

사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고,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저서에 『파곡유고(坡谷遺稿)』가 있다. 시호 충간(忠簡)이다.

 

이성중은 평소 다른 기호(嗜好)가 없고 오직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는 것으로 스스로 즐기며, 글이라고는 읽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였다. 시재(詩才)는 타고났는데, 화목하고 경사로운 시풍으로 명성을 남겼다고 한다.

 

조경(趙絅)이 이성중의 세계(世系)와 역임한 관직과 지업(志業)과 내행(內行)을 기록하고 또 그 장사 지낸 월일을 묘표에 기록하였다. 아울러 이성중의 학문 연원과 후손들의 사적들도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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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완창부원군 행자헌대부 호조판서 이공 성중의 묘.

 

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완창부원군 행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공(李公) 묘뢰(墓耒) 고(故) 증 영의정 완창부원군 이공의 장지(葬地)는 파주(坡州) 파평산(坡平山) 아래에 있다.

 

한양(漢陽) 조경(趙絅)이 그 세계(世系)와 역임한 관직과 지업(志業)과 내행(內行)을 기록하고 또 그 장사 지낸 월일을 기록하였다. 자손이 그 묘뢰(墓耒)에 그 세계를 기록하였으니 휘 증(璔)은 계양군(桂陽君)에 봉해졌는데 곧 우리 장헌대왕(莊憲大王)의 지손(支孫)이다. 이분이 강양군(江陽君) 휘 숙(潚)을 낳았는데, 뒤에 숙부 담양군(潭陽君) 거(?+氵거)의 후사가 되었다.

 

이분이 희▨ 수(守) 집(輯)을 낳고 이분이 금천부수(錦川副守) 감(瑊)을 낳았으니 공의 황고(皇考)이다.

종실의 작위(爵位)는 여기서 그친다. 후에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하여 2세까지 은혜를 미루어 추증을 받았다. 금천부수는 사헌부 감찰 김윤장(金允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성중(誠中)이고 자는 공저(公著)이고 호는 파곡(坡谷)이다. 관직을 역임한 것은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 13)에 진사과에 입격하고 경오년(1570, 선조 3)에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곧바로 전시(殿試)에 나갔다. 괴원(槐阮)을 거쳐 사국(史局)에 천거되어 검열(檢閱)을 역임하고 당후(堂後)로 옮겼다.

 

계유년(1573, 선조 6)에 태복시주부로 승진하고 호조, 예조, 병조 삼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으로 전보되었다가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지제교의 직임을 띤 채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사신(詞臣)에 여러 번 의망(擬望)되었다. 을해년(1575, 선조 8)에 배척을 받아 전조(銓曹)에서 체차되어 직강, 병조 정랑, 수찬, 교리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지평(持平)으로 이배(移拜)되었는데 또 배척을 당했다. 이때 ‘식자는 파벌을 만들지 않는다. 자연히 곧음이 그 가운데 있다’ 하였는데 이 시를 보면 공이 마음을 바르게 잡은 것을 알 수가 있다. 평양(平壤)에서 직임을 수행할 때 백성을 돌보고 오랑캐를 물리쳐 공의 명성이 실로 날로 높아졌다.


이때에 우리나라는 새로 병화를 입어 마을에 혈류가 흐르고 아들과 아버지가 시체 더미를 뒤지며 울부짖었는데 이제독(李提督)이 병마(兵馬) 8만을 거느리고 기습하니 왜구의 길이 국경부터 남쪽까지 수천리인지라 ▨…▨ 공은 백성을 의(義)로써 움직여 백성들이 비록 피로하고 위축되고 굶주린 상태였지만 머리에 이고 등에 지며 온갖 도움을 주어 삼군으로 하여금 하루도 산에 주둔하며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공의 정력과 판국(辦局)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공은 비록 이로 인해 병에 걸려 운명하였지만 그 뜻은 더욱 펴졌다. 그 내행으로 말하자면 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부인을 받들었는데 뜻으로 섬겼다. 모부인은 가난을 잊고 두 동생과 누이 하나를 때맞춰 예에 맞게 혼인시켰으니 모두 공이 현달하기 전의 일이다.

 

부친상과 모친상에 모두 여묘살이를 3년 하였으니 공의 중부(仲父)가 말하기를 “순천도정(順天都正)은 예(禮)에 익숙한 것으로 이름이 났는데 공은 어려서부터 그 가르침을 받들었고 또 이이소(李履素), 김척암(金惕菴)의 문하에서 노닐며 의리를 탁마(琢磨)하여 참으로 유속(流俗)에서 몸을 빼내었으니, 함께 더불어 사귀는 자는 모두가 유서애[柳西涯 : 유성룡(柳成龍)], 김학봉[金鶴峯 : 김성일(金誠一)] 같은 당대의 명인이었다.” 하였다.

 

가장 잘 교분을 맺은 분으로는 퇴도(退陶) 이선생[李先生 : 이황(李滉)]이었다. 일찍이 도성에 들어갔을 때 공은 폐백을 들고 공을 찾아뵈었는데 선생은 말하기를, “이번에 좋은 선비를 만나 보았다.” 하였으니 공이 칭찬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평소 다른 기호(嗜好)가 없고 오직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는 것으로 스스로 즐기며, 글이라고는 읽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였다. 시재(詩才)는 타고났는데, 화목하고 경사로운 시풍으로 명성을 남겼다고 한다.

 

병란 후에 시를 수습하여 약간 편을 얻어 세상에 간행하였다. 부인 평양조씨는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 수(琇)의 따님으로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맑고 밝았다.

 

자녀 교육과 집안 살림에 엄하고도 법도가 있었으며 군자의 배필로 한 점도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에서 공의 학문과 가정에서의 행실을 알 수가 있다. 계사년(1593, 선조 26) 7월 7일 함창현(咸昌縣)에서 졸하였으니 그해 10월 파평산에 귀장(歸葬)하였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그 후 23년 뒤에 복인(卜人)이 말하기를, “이 묘지는 가운데가 습하여 본산의 서쪽 산등성이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보다 못하다.” 하였다. 여러 자손이 즉시 이장(移葬)하였다. 부인은 공보다 29년 뒤 7월 2일에 졸하였다.

 

공의 향년은 55세이고 부인의 향년은 79세였다. 그해 9월 17일 공의 묘 왼쪽에 합부(合祔)하였다.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문익공(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이 유실(幽室)의 명(銘)을 지었다.

 

자손으로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유징(幼澄)이 탁연히 일찍 등과하여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 16)에 알성과에서 급제한 후 화현직(華顯職)을 역임하고 거가(車駕)를 따라 의주(義州)에 머무르며 그 고을의 목사를 선발하고 제수하였으며 붉은 비단을 하사받았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공보다 2개월 앞서 졸하였으니 향년 32세이다. 만력 갑진년(1604, 선조 37)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봉되고 ▨권(▨券)을 하사받고 이조판서 완흥군(完興君)에 추증되었다.

 

차남 유청(幼淸)은 정랑이며 삼남 유심(幼深)은 현령인데 모부인보다 앞서 졸하였고 사남 유침(幼沈)은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딸들은 군수 박응선(朴應善), 생원 황유첨(黃有詹), 좌윤 한회일(韓會一)에게 시집갔다.

 

유징은 검열 조광(趙壙)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 명융(命隆)은 어려서 죽었고 차남 명웅(命雄)은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 4)에 등제하였다. ▨…▨ 재주와 슬기가 있어 그 가문이 한번에 영곤(嶺閫)과 보장(保障)의 직위를 맡아 공적이 현저하였다.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옮겼다가 임오년(1642, 인조 20)에 관사에서 졸하였다. 유청은 아들이 없어 조카인 명시(命蓍)를 후사로 삼았다. 유침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명익(命益)은 현감이고 명설(命說)은 현령이다.

 

유침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명윤(命尹), 명시(命蓍), 명관(命寬)이다. 박응선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수(禾+脩)는 현감이며 류(禾+留)는 참봉이며 규(禾+圭)는 현감이며 작(䅵)은 진사이며, 막내아들은 치(穉)이다. 황유첨은 딸 둘을 두었는데 딸 하나가 현재 좌의정인 이시백(李時白)에게 시집갔다.

 

한회일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이성(以成)은 생원이며 차남은 이명(以明)이다. 내외 자손들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불녕(不佞)은 홍주공(洪州公)과 종유한 지 거의 30여 년인데 매번 그 선조인 완창군과 완흥군 두 공의 일에 대해 듣게 되었다.

 

▨…▨ 두 공은 어려움에 처해서도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치다가 마침내 병에 걸려 부자가 타향에서 절명하고 말았고 홍주공의 나이도 많지가 않았으니 하늘이 선인에게 베푸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하늘이 이씨(李氏) 3세에 내린 정영(精英)한 기운이 자못 이씨의 가문에 배는 더하니 나라를 위해 동량(棟樑)의 쓰임을 모아 둔 것이 우연이 아닌데 마침내 전광석화(電光石火)가 되고 말았으니 무슨 이치란 말인가. 천도를 의지할 수 없음이 과연 이와 같단 말인가.

 

기수(氣數)의 변화가 또 그 가문에서 흥기할 것인가. 그렇다면 의정공이 돌아가신 지 겨우 60년에 손자와 증손이 빼어난 자가 많으니 어찌 천도가 다시 돌아와 그 자손에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이 표를 보는 자는 애쓸지어다.



자헌대부 원임 의정부좌참찬 겸 홍문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 좌빈객 조경(趙絅)이 짓다.

양천(陽川) 허목(許穆)이 쓰다.



갑오년 9월 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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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 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完昌府院君行資憲大夫戶曺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李公墓表。

 

資憲大夫原任議政府左參贊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 趙 絅 撰

 

陽川 許穆 書

 

故贈領議政完昌府院君李公。葬在坡州坡平山下。漢陽趙某紀其世系歷官志業內行。且識其葬日月。子孫刻其墓表。其世系曰。有諱璔。封桂陽君。卽我莊憲大王之支也。是生江陽君諱潚。后于其叔父潭陽君諱璖。是生喜安守諱輯。是生錦川副守諱減。於公爲皇考。宗爵止於是。後以公貴。推恩二世有贈。錦川聘司憲府監察金允章之女生公。公諱誠中。字公著。號坡谷。其歷官曰。嘉靖戊午。成進士。庚午。魁庭試。直赴殿試。由槐院薦史局。歷檢閱遷堂後。癸酉。陞太僕簿。歷戶禮兵三曹郞。轉司諫院正言,弘文館修撰。拜吏曹佐郞。帶知製敎。賜暇湖堂。詞臣之望藹蔚。乙亥。被齕遞銓。授直講,騎郞,修撰,校理。皆辭。移拜持平。又被參議者皆甚論者。頃之補韓山郡守。辛巳。爲檢詳。陞舍人。秋丁憂。癸未。由司藝拜應敎,典翰。時弟敬中,養中與公接武瀛洲。一時艶之。由直提學陞同副承旨。轉東壁。又轉國子,諫長,副提學,銓部,水部侍郞。己丑。上詢于三事。擢公銓部左侍郞。復長玉堂。改憲長。時文衡缺。物論屬公。危得之者屢。辛卯。又長玉堂。與諸僚議草時弊十二條疏。建儲首也。語頗切。未及上。特命觀察忠淸道。秋。中白簡罷。壬辰難作。起公爲統禦使。及都城不守。追及行在于平壤。拜同中樞,禮曹參判。到義州。陞戶曹判書。其志業曰。公天資溫粹。蹈籍儒術。人見之者不問知其爲端人正士也。自釋褐登朝。出入臺閣二十有餘載。其所持論。務在昭公滅私。其在銓。雌黃人物。不掩胸中所好惡。其進筵席。核言國昏同姓字非是。不以柄用爲意。故乙亥辛卯趙瑗,洪汝諄之深嚌。皆承柄用旨云。於公何害。公嘗答柳文忠詩曰。未論是西是東。先看爾私爾公。君子周而不黨。自然直在其中。觀此詩。可見公秉心之正矣。若乃平壤之役。急病讓夷。則公之望實益彰。當是之時。我國新刳於兵。流血千里。父子齩骨。赤立嗷嗷。李提督兵馬八萬有奇。逐寇之路自關而南。亦數千里而遙。奚亶日費千金而已哉。顧公能動民以義。雖疲躄餓隷。無不負戴助之。使三軍無一日首山庚癸。公之精力辦局。詎不韙歟。公雖由是病隕。其志則申矣。其內行曰。公少孤。奉母夫人。以志爲養。母夫人忘其貧。使二弟有室。一妹有歸。不失于時。不歉于禮。皆公未顯時也。內外艱。皆廬墓三年。公之仲父曰順川都正。以習於禮名。公自少服膺其訓。又遊李履素,金惕菴之門。琢磨義理。固已拔乎流俗矣。所與遊皆當世名人。如柳西厓,金鶴峯最相善。退陶李先生嘗入都。公執贄造焉。先生曰。今行不虛。得見佳士矣。其見賞如此。公平居無他嗜好。唯以觴詠自娛。於書無所不讀。最長於詩。詩格天得也。有元和長慶遺響云。收拾兵燹後。得如干篇鏝行于世。夫人平壤趙氏。儀賓府經歷琇之女。柔嘉淑明。敎子女治居第。嚴而有法。配君子。無一德違君子。於是知公之學又行於家也。其葬曰。癸巳七月初七日。公途卒于咸昌縣。其年十月。歸葬于坡平山。從先兆也。後廿三年乙卯。卜人曰。此塋地中當有濕。不如本山西麓坐卯向酉之原良。諸子卽經始移葬。葬事官庀焉。夫人後公卒二十九年七月初二日卒。公享年五十五。夫人享年七十九。其歲九月十七日。合祔于公墓之左。西平府院君文翼公韓浚謙作幽室之銘。其子孫曰。四男三女。長幼澄。卓然早成。登萬癸未謁聖科。遍歷華貫。從車駕在義州。選授其州牧。賜緋。癸巳。先公二月逝。年三十二。萬甲辰。策扈聖功二等賜鐵券。贈吏曹判書完興君。次幼淸。正郞。次幼深縣令。先母夫人逝。次幼沈。未宦。女。郡守朴應善,生員黃有詹,左尹韓會一。幼澄娶檢閱趙擴女。生二子。命隆夭。命雄登天啓丙寅庭試。菀有才諝世其家。一試嶺閫。保障之勣茂著。旋改洪州牧。壬午。卒于官次。幼淸無子。以從子命蓍爲後。幼深有二子。命益縣監。命說縣令。幼沈有三子。命尹,命蓍,命寬。朴應善有五子。穧縣監。?參奉。䅅縣監。?進士。稚。黃有詹有二女。一歸今左議政李時白。韓會一有二子。以成生員。以明。內外雲仍多不載。嗚呼。不佞與洪州公遊幾三十餘年。每聞其先完昌,完興二公事。未嘗不撫膺太息也。二公處艱難中。竭忠盡力。竟以瘁疾。父子絶命於異鄕。洪州公年又不嬴。天之報施善人何如哉。始天鍾精英之氣於李氏三世。殆若栽培於李氏之門。而且爲國儲棟樑之用非偶然也。終歸於石火電光者。抑何理哉。天道之不可恃。果如是耶。氣數之變。亦與於其間耶。然距議政公歿堇一甲。子孫曾之秀者其麗亦多。安知非天道旋復將蓋覆其萬子孫無替也否。嗚呼。觀此表者。其可以勉矣。

[주01] 歷 : 曆

[주02] 歷 : 曆

 

甲午九月 日立(1654년(효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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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完昌府院君行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衞都摠府都摠管李公墓誌銘。幷敍。

 

韓浚謙 撰

 

在昔宣廟中有李氏兄弟三人。俱以文進士。進玉署金閨。一時蜚英。論思獻替之功。於斯爲盛。誠近代所無也。季養中。登壬申科。以承政院左副承旨終。曾在弱冠。遊退溪先生門。質以無極太極之辨。先生有當從其說之語。語在集中。仲敬中。登庚午科。以司憲府執義終。曾爲銓郞。斥鄭汝立不合侍從。洎汝立謀逆伏誅。宣廟嘉之。命贈吏曹參判。其長卽公。公諱誠中。與仲同年及第。淸名雅望。冠冕士林。而二弟之學識風節。蓋皆根抵於公。世以近代之所無。咸歸美於賢父兄矣。當壬辰播越。以度支濟軍須于行間。卒以盡瘁卒。公卒之二十九年。夫人趙氏卒。諸孤旣卜日將附葬。以浚謙有世姻之分。具家狀速以玄堂之銘。義不可辭。謹按。李氏系出璿源。有桂陽君諱璔。英廟之昭也。生江陽君諱潚。以命爲叔父潭陽君諱璖後。寔生喜安守諱輯。寔生錦川副守諱瑊。卽公之四代也。以公貴贈錦川顯祿。喜安正義階。皆躋爵爲君。錦川聘瑞興金氏司憲府監察允章之女。以嘉靖己亥閏七月十五日生公。㓜而嬉戲。不類凡兒。稍長力學。才華抜萃。蔚爲名秀才。歲戊午。上上庠。明年。宅嚴憂。服闋。遊於太學。聲譽日進。隆慶庚午春。魁庭試。命直赴同年殿試。七月。選槐院。薦史局。辛未。以檢閱遷注書。癸酉春。陞司僕寺主簿。以資不准也。俄轉户禮兵三曹佐郞,正言,修撰,吏曹佐郞,知製教。賜暇讀書堂。至乙亥秋。朝著間東西之目始起。爲諫院所擠。褫公銓曹。授直講,兵曹正郞,修撰,校理。皆不就。爲持平。爲仁順王后之練將出。諫院誣以在銓專擅劾之。有識之論。莫不錯愕。而自上亦持疑。久而始兪。未幾。出補韓山郡守。辛巳。入爲議政府檢詳。㝷陞舎人。八月。丁外鞎。癸未。服闋。拜司藝。復入玉堂。爲應教,典翰。甲申。直提學。冬。陞同副承旨。轉至右承旨。或遞復入。大司成,大司諫,副提學。或再或一。吏曹參議,工曹叅議,僉知中樞。此乃在通政履歷梗槪也。己丑冬。公方爲副提學。上詢諸大臣。擢公爲吏曹參判。庚寅。復長玉堂。轉大司憲。遞爲同知敦寜。時文衡缺。公始被選圈㸃。自是毎擧必選。連擬兩館提學。文翰之望亦蔚然矣。辛卯。又長玉堂。與諸僚論時弊十二條。並陳建儲事。將以來日進箚。忽於是夜。特除爲忠淸道觀察使。八月。兩司啓罷公職名。蓋自己丑逆獄起於搢紳。餘波濫觴。及於士類。公獨以一家先見之明。不處嫌疑之地。周旋兩間。調劑備至。士大夫頼公以得免者亦多。而平日不相能之軰。至是群起而攻之。吁亦恠矣。壬辰。因賊鋒逼京。始蒙叙爲統禦使。爲統禦諸道徴兵也。大駕去邠之日。徴兵不至。隨駕以出。行到西郊。更受命留待徵兵。及都城不守。匹馬赴西追及。大駕入平壤纔數日矣。拜同知中樞,禮曹參判。仍扈駕到義州。陞拜户曹判書。癸巳。天兵將進薄平壤。師行糧從。朝廷欲以亞官爲管糧使。公曰。天兵糧餉。我所句當。請以身徃。遂随李提督以行。於是乘板蕩之餘。拮据營度。協復三京。轉下嶺南。接濟大軍。未嘗乏絶。而山行水宿。心力俱盡。竟以七月初七日。復綏于咸昌縣境。春秋五十有五。十月。以其喪歸葬于坡州坡平山先隴之下。後十二年甲辰。公子㓜澄策勳。推恩贈公純忠積德補祚功臣,議政府左贊成,完昌君。又以公參扈聖宣武原從功。累贈領議政,完昌府院君。二十三年乙卯。以葬地不良。移安于本山西麓卯坐酉向之原。官庀葬事。公天姿粹美。德性溫厚。言動之間。和氣藹然。而户庭之內。秩秩有禮。自少服仲父順川都正禮法之訓。因遊李履素,金惕菴之門。從事義理之學。振拔流俗。存心處身。一以名檢自飭。所與交遊。皆一時名勝。如柳西厓成龍,金鶴峯誠一。合志同方。最相友善。退溪先生嘗入都。一見稱之曰。得見佳士。此行不虛。其見重於先生長者類如此。立朝論事也。彰善癉惡。激濁揚淸。冀回休明之治。乃素所畜積也。不幸携貳之會。標榜既立。人心世道。殆不可爲。然而公之言論風旨。不讓爲一世之宗。可否之間。持平不偏。雍容臺閣。務全朝著。亦公之志也。其爲斯世慮。可謂至矣。此所以始有乙亥之誣。終罹辛卯之訌。而皆非公之所恤也。出入經幄幾二十年。毎於進講之際。據經論難。無非陳戒之意。宣廟臨御日久。熟察其賢。虛心酬酢。亹亹不厭。間有讒構。委任不專。而旋即開悟。恩禮無替。君臣之間。兩無憾矣。少孤家貧。盡孝偏親。友于弟妹。以及族隣。親奮之貧窮者。亦多頼焉。居家淸素。喪祭之外。不以一事關心。官聯貴顯。關節不通。晚年。頗以碁酒自娛。客至不輟。人或有言。亦不爲屑。故門庭如水。有同寒士。嗚呼。若公者。求之古人。鮮有其匹矣。公字公著。號坡谷。所著有坡谷遺稿藏于家。公於詩文。用工俱深。而古今詩沖澹典雅。時有警句逼唐處。爲儕軰所推。盡喪于兵燹。今之所餘。只若干篇云。夫人初封貞夫人。後從公職。進貞敬夫人。趙亦平壤望族。儀賓府經歷琇之女。天性温順。嚴正有士君子之風。事姑盡孝。治家有法。教子女撫僮僕。咸得其道。公之二弟一妹。旣孤而婚嫁。夫人以新婦入門。能撥貧窶。備禮而行。不以貽大夫人之憂。公常感而敬之。公平生廉謹自守。祿俸之外。不曾營一畝買一口。以遺身後。夫人身爲正卿之命婦。家業素薄。百口無所依。唯幸公之遺澤。久而不泯。從二子七享專城。亦未嘗一干外事。室中無長物。年近八袠。視聴不衰。享祀之誠。老而愈篤。凡有所得。必蔵而待用。臨祭之日。諄諄戒飭。雖在疾革。無頃刻之或忘。末年。子㓜淸自義興瓜滿而歸。夫人遂命卜居于原州寬川之野。天與其便。子孫咸集。以盡壽考之休。嗚呼。其亦賢矣哉。生于嘉靖癸卯八月初一日。卒于天啓辛酉七月初二日。享壽七十有九。用其年九月十七日。祔葬于公墓之左。凡生四男三女。長卽幼澄。登癸未謁聖丙科。以文行顯。歷敭華貫。方諸父無恙時。同列侍從。車駕在義州。選於衆。陞拜本州牧使。階通政。癸巳五月。先公病逝。公卽不知其死也。慟矣。得年僅三十二。後以扈聖功。追䇿二等鐵券。贈吏曹判書,完興君。次幼淸。前義興縣監。次幼深。陽川縣令。先夫人四年而逝。次幼沈。未官。女長適士人朴應善。次適生員黃有詹。次適前縣監韓會一。卽鄙家之豚犬也。幼澄娶檢閱趙擴女。生子命隆。早夭。次命雄。生貟。以長孫。實主公及夫人喪。女適前參奉成櫟。次適幼學朴遠基。幼淸娶僉知宋圻女。無子。以幼沈第二子命蓍爲子。有三女。長適沈命世。次適趙元老。次適趙嶔。皆士人。㓜深娶漆溪君尹卓然女。生命益。進士。次命說。㓜沈娶折衝權柱女。生命尹,命蓍,命彦。二女皆幼云。公與先君子。爲道義之交。且有年好。與同僚寀。浚謙少也將命。屢承警欬。及登仕路。蒙公鍳賞最厚。晚而賤息委禽於門下。知公之詳。冝莫如不侫。敢再拜而爲銘。銘曰。家有三難。公爲賢父兄耶。官膺八座。公是名公卿耶。松柏其性。瑚璉其器。澡身事國。忠孝一致。生能盡節。沒能盡瘁。我究厥故。斷斷不貳。婉彼碩人。士女之良。儷美配哲。德音俱臧。鬱鬱坡山。異室同岡。刻石納幽。昭示茫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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