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 통정대부 수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구암 우복룡 묘비병 병서
[생졸년] 우복룡『禹伏龍, 1547년(명종 2) ~ 1613년(광해 5)』
서문을 병기함.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님을 모시고 한가한 때면, 문득 동네의 친구 중에 현명한 사람을 들어 칭찬하시면서 꼭 "우 아무개는 대범하고 뛰어난 자질에 예악으로 문체를 꾸몄으니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지금 집안의 기록을 살펴보니 정말이었다.
공의 이름은 우복룡(禹伏龍)이고 자는 견길(見吉)이며 호는 구암(懼菴) 이다.
우씨는 세대수가 멀리서부터 내려온다.
고려에서 시중으로 영달한 우중대로부터 5, 6대에 걸쳐 관직이 이어져 무성했다.
공의 증조 우효친은 현령을 지내고 좌통례를 증직받았다.
우효친이 우순좌를 낳았는데, 우순좌는 증 좌승지로서 우숭선을 낳았다. 우숭선은 이조참판을 증직받았다.
우숭선은 경주군수 이수의 딸을 배필로 맞아 가정 정미년에 한성 숭교방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정신과 기운이 빼어나게 영특하고 행동거지가 보통아이들과는 달랐다.
14살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 예와 슬픔을 어른처럼 하니 조문을 온 사람들이 기특하게 생각했다.
상제를 마치고 습정 민순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당시 선생은 명망 있는 유학자로 고봉산 밑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판서 홍가신과 참판 홍이상 같은 사람이 제자로 있으면서 공과 함께 위아래를 다투니 무성하게 빛났다.
정묘년 국상 때 담당자가 유생의 복장을 흰 옷과 흰 갓으로 하자고 하자 공이 항의하며 말했다.
“저희들이 비록 형편없고 소소한 선비일 뿐이지만 일찍부터 편안히 해주시는 교화를 입었는데 어찌 상복을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최복을 지어 3년을 마치니 식자들이 옳다고 했다.
계유년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큰 과시를 볼 때는 정승이 6조 당상을 거느리고 명륜당에 앉고, 유생들은 뜰 아래서 절하는 것이 으레 하는 예였다. 그러나 공 혼자서만 읍을 하며 말했다. “임금과 아버지 앞이 아닌데 선비가 어떻게 뜰에서 절을 합니까?”
영의정 홍인재[홍섬]가 예조판서를 시켜 공을 나오게 해 까닭을 물었다.
공이 대답했다. “옛날 우리 세종대왕께서 일찍이 영의정이 성균관에 나갔을 때, 신하들과 똑같게 하지 않으려고 유생들은 아래서 절하게 했습니다.
그 뒤 조정암(조광조) 선생이 예가 아니라고 하여 바로잡자 남곤과 심정이 원수처럼 보게 되었습니다.
사림에서 배례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보잘것없는 제가 평생 고심하는 일입니다.” 좌의정 노소재(노수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유생의 생각이 옳으니 빼앗을 수 없겠다.”
그러고 나서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절하는 것을 고쳐 읍례로 정한다고 했다.
이날 복례로 부를 짓게 하여 유생들의 시험을 치렀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했다.
한참 뒤 기고봉(기대승)이 대사성이 되어 유자로 부를 짓게 하여 유생의 시험을 치러 공이 또다시 수석을 차지하자, 기대승이 공을 나오게 한 뒤 말했다. “나중에 사문(유학)을 맡길 사람은 그대일 것이다.” 이때부터 명성이 매우 자자했다.
정축년에 조정의 건의로 학문에 힘쓰는 선비 6인을 선발했는데, 공이 첫 번째였다.
천거한 제목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학행이 두드러진다.”는 것이었다.
문소전 참봉에 제배되었다.
공은 마침내 과거공부를 중단했다.
이미 관직에 나갔는데 또다시 응시자들과 경쟁하는 것은 농단(이익을 독점함)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영숭전 재랑으로 옮겼다. 평양은 본래 기생이 아름다운 곳으로 불린다.
여자가 거문고를 타며 같이 놀면서 교태를 부리므로 관리들이 혹하지 않은 경우가 별로 없었다.
공은 채원정의 ‘홀로 잠드니 이불에 부끄럽지 않다’는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감사 이하가 모두 굳은 마음에 탄복했다.
광흥창 봉사, 내섬시 직장을 역임하고 주부로 승진했다.
계미년에 율곡 이이가 인사권을 잡아 장차 공을 공조낭청으로 삼으려 하자, 참판 우계(성혼)가 말하기를, “이 사람한테는 노모가 있으니 봉양하는 것이 시급합니다.”라고 하여 이윽고 목천현감에 제수되었다. 목천현감으로 있은 지 1년이 되자 치적이 뚜렷했으므로 어사를 시켜 포상하게 하고, 김포현령으로 올려주었다.
병술 년에 지평에 제배되었으나 부모의 병으로 사직했다.
얼마 뒤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여막에서 시묘했다.
기축년에 나와 용궁현령이 되었는데, 재해 상황을 조사하는 어사가 오자 아전과 백성이 서로 이끌고 거리를 메워 맞이하고서 공의 치적을 이야기 했으므로, 조정에 보고하여 표리(옷감의 겉감과 안감)를 상으로 받았다.
임진왜란 때 부산과 동래가 먼저 함락되고 여러 군이 차례로 호랑이 입 안으로 꺾여 들어가자, 북쪽으로 도망가는 병졸들이 무리를 이뤄 도둑이 되어 관군을 침범했다.
공은 안동, 영천, 비안, 군위 네 고을의 군병을 인솔해 위급한 경주로 가다가 길에서 배반한 군졸을 만나 염탐하여 우두머리 세 사람을 잡아 죽이고 나머지는 풀어주며 스스로 공을 세우게 했다.
경주에 도착하기 30리 전에 영천의 군병과 함께 어울려 진을 쳤는데, 한밤중에 또 배반한 군졸이 소동을 일으켰다.
영천의 대장이 화살에 맞아 즉사했다. 공은 다행히 기강이 바른 종 덕분에 죽음을 면했다.
해가 뜨자 공은 부대의 대열을 정비하여 나가니, 반군이 모두 흩어져 마침내 경주성에 들어갔다.
군병을 주장에게 소속시키고 즉시 용궁현을 실사해보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뿔뿔이 흩어져 남아있지 않았다.
공이 부로와 자제를 불러 충의로 격려하여 모아든 군병 3천여 명을 얻어 곧바로 왜적에 맞서 수 십 차례 싸우니 적이 앞으로 나가지 못해 용궁현만은 온전했다. 낙동강 왼쪽에 사는 선비가 공이 힘껏 싸웠다는 사실을 상소하여 보고하니 행재소에서 비단을 하사했다.
뒤에 뜬소문이 돌아 장차 나락으로 빠질 지경에 처했는데, 영남체찰사로 있던 오리 재상(이원익)이 당시의 일을 조사한 결과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공의 일이 크게 풀렸다. 계사년 10월에 안동부사에 제배되었다. 특별한 은혜였다.
안동은 본래 땅이 넓고 물산이 풍성한 곳으로 일컬어졌는데, 군병이 주둔해 오니 주민이 다 굶어죽게 생겼다.
공은 먹는 것과 자는 것을 잊은 채 은혜롭고 곧은 계문자의 정치를 시행하여 얼마나 많은 백성이 살아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일로 지금까지도 칭송이 자자하다. 그때 왜구를 추격해 남쪽으로 내려오던 명나라 장수가 둘이었다.
안동은 대로에 있기 때문에 의장으로 쓰는 물품과 호궤할 음식을 모두 떠맡게 되었다.
공이 임기응변을 잘하여 부드럽게 처리하니, 사람들은 공의 온전한 재주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감복할 뿐이었다.
공은 안동에 있을 때 또다시 상소하여 네 가지 급선무를 건의했다.
그 네 가지는 조정을 바르게 하는 것,
기강을 확립하는 것,
백성을 사랑하는 것,
군정을 잘하는 것이었고, 그 근본은 임금의 한 마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더욱더 강조 강조하였다.
임금이 가납하였다. 당시 호조판서가 궐석 중이었으므로 임금은 묘당에 자격을 따지지 말고 적합한 사람이면 천거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좌의정 김응남이 공을 천거하고 영의정 유성룡에게 문의하자 유성룡이 말했다. “우복룡이 지금 안동을 맡고 있는데 치적이 뚜렷하니 불러들이면 필시 남쪽 백성들의 소망을 저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천거가 취소되었다.
2년 뒤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병신년에 강원도관찰사에 제배되어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중 임금이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여 하교했다. “오랑캐의 기세가 등등한 이때에 보장의 땅인 강화도가 시급하다. 새로 제수한 서성이 병이 났다고 하니 후임으로 누가 좋겠는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우복룡입니다.” 이문충공(이원익) 역시 적당하다고 했다.
임금이 즉시 서로 바꾸라고 명하여 공을 강화도에 부임하게 하였다.
참정 왕필적과 함께였는데, 왕필적을 만나자 왕필적은 공에게 편지를 보내 예를 차리며 말했다.
“당신은 유림의 명망으로 세상에 나왔으니, 재물을 맡는 것은 익숙하지 않을 터이므로 조금밖에 쓰이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소상국(소하)은 관중에 물자를 끊이지 않고 대어 유방이 공업을 세우게 했습니다.
당신의 직무를 어찌 소상국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금왕 성진은 영특함이 빼어나 잠깐 동안 접해도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 중국 사람들은 공이 이렇게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은 강화도에서 엄하고 분명하게 다스려 아무리 귀한 임금의 인척으로서 임시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히 잘못된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비방이 일어나 끝내 이로 인해 체직되었다. 기해년에 홍주목사에 제배되었다.
신축 년에 체찰사 이항복이 순찰 중 충청도에 도착해 장계를 올렸다. “지금 수령 중 가장 잘 다스린다고 할 만한 경우는, 오로지 공무에만 힘쓰므로 백성은 혜택을 입는 줄을 모르고, 한결같이 백성을 아껴 공무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우복룡 같은 사람은 공무를 힘껏 집행하면서 백성을 돌보는 데 후합니다. 홍주에서 수군을 가장 많이 징발했는데도 온 고을이 편안합니다.”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려주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저지하여 개정했다.
이듬해 비변사에서 공과 서인원을 충청도감사에 천거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두 사람 중 누가 더 재주가 나은지 물었다. 영의정 이덕형이 공이 낫다고 하여 충청도감사에 제배되었는데, 또다시 원한을 가진 사람이 간여하여 나주목사로 개차되었다.
어사 목장흠과 윤훤이 잇달아 잘 다스린다고 하여 포상을 받았다. 나주에서 어떤 사람이 송사를 벌였는데 역대의 여러 관원이 연루되어 있었으므로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광해군이 세자로 있으면서 그 중 한 사람을 비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은 부임하자마자 곧장 시비를 밝히니 당시 사람들이 탄복했다. 근무기한이 차서 돌아간 뒤 병오년에 충추목사에 제수되었는데, 그 땅에서 방금 살았다는 이유로 사직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무신년에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들어섰다.
이원익이 도수상(원상)으로서 선혜청을 설립하고 공을 제조로 추천했다.
주된 일은 먼 지방이나 가까운 지방이나 경기지방과 똑같이 세금을 매기는 것이었다.
공은 힘써 오랫동안 맡았다고 한다. 정인홍이 임해군의 옥사에 대해 매우 준절하게 논하자, 공은 정인홍을 보면 끝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꾸짖었다. 정인홍이 좋게 보지 않자 공은 마침내 이를 기화로 병을 핑계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임자년에 성천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창후가 발휘한 악행을 끝낸 것이 이때였다. 계축년 4월 29일에 마전의 시골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향년 67세였다.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조문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부임했던 고을의 부로와 자제들이 모두 와서 조문하고 곡을 했다.
조정에서는 관직에 맞게 부의를 내려 보내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7월 갑신일에 선영의 남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약관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당시 유생들이 많았는데, 선생이 유독 공을 호걸풍의 선비로 인정하자 당대의 동료들 역시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조정에 나가 논하는 말과 풍채가 모두 사람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안동에서 정치를 시작해 강화도에서 마치면서 베풀고 주선하며 대처하는 것이 모두 사람들의 생각 밖에서 나왔으니 호걸풍의 선비가 아니면 어찌 할 수 있었겠는가?
마음을 수양하고 위급함을 구제하는 두터운 의리는 모두 타고난 바탕 위에 뿌리박은 학문 안에서 나왔으리라.
약포 정탁이 일찍이 공을 칭찬하기를, “공의 재주와 덕을 묘당에서 발휘했다면 요순의 정치가 이루어졌을 텐데 주현에서 그치고 말았으니 어찌 시국과 운명 탓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의 문장은 기초가 있었는데, 시 수백 편은 지금도 전해져 읊어지고 있다고 한다. 공의 배필 진천송씨는 상산백 송인의 후손이다. 조부 송환주는 군기시정을 지냈고, 아버지 송장은 사직이었다. 아들은 낳지 못하고, 딸은 세마 박일장에게 출가했다.
측실에서 5남을 두었는데, 첫째와 둘째아들은 경언, 경뢰이고, 셋째아들은 경필인데, 무오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넷째아들 경민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이다. 다섯째 아들 경석은 을해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갑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영평현령으로 있다.
관직에서의 처신과 몸가짐을 잘하여 충분히 듣고 볼만한 점이 있고 집안을 경영함에 있어 부모의 가르침을 실추하지 않았다. 경석이 바로 내게 명을 청했다. 박일장의 아들 항은 무오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경언은 3남 3녀를 두었다.
첫째아들은 홍인이고, 둘째아들 홍일은 기묘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셋째아들은 홍익이다. 딸들은 안상룡, 유창호, 이문순, 이수명에게 출가했다. 경뢰는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첫째아들은 홍서이고, 둘째아들 홍제는 요절했다. 딸은 안시중에게 출가했다.
경필은 2남 2녀를 두었다. 첫째아들 홍성은 임오년 사마시에 합격했고, 둘째아들 홍재는 요절했다.
딸은 이상윤, 강세학에게 출가했다. 경민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홍규이고, 차남은 홍조이며, 딸은 정석익과 김태원에게 출가했다.
경석은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요절했고, 차남과 삼남은 정래와 정기이며, 딸들은 사인 김연조, 이후시에게 출가했다.
홍인은 2남 2녀를 두었고, 홍일은 1녀를 두었으며, 홍서는 1남을, 홍성은 2남 1녀를, 홍규는 2녀를 두었다.
나는 오히려 아버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서 감히 명을 썼다.세상에서는 선비를 나무란다고매한 이치를 말하지만 하는 일은 어긋난다고 누가 공처럼 했는가? 우수한 학문으로 관직에 나가 편안한 길 가리지 않고 오로지 부지런히 힘써 기꺼이 어려움을 이겨냈으니 어떻게 그렇게 명민한가?
자신과 같은 사람 사귀고 우뚝 서서 의견을 말하며 그리고 충성을 다했네 좌우의 현명한 재상 백성의 세금을 늦추니 경기도가 크게 소생했다 모든 문에 거문고 소리 어떤 것도 들이지 않고 우리 도를 우직하게 지켜 순하게 살고 편안히 죽었다 왜 뛰어나지 못했다 원망하겠는가?
후세에 나를 알아줄 텐데 정헌대부 원임 의정부좌참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조경 지음.
묘의 소재지 : 미산면 백석리 산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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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江原道觀察使懼菴禹先生墓碑銘
有明朝鮮國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懼菴禹先生墓碑銘 竝序
不佞髫時侍先大父水部公燕居間輒 稱擧同里閈友朋之賢者必曰禹某甫 以俶儻奇偉之資文之以禮樂人不可及今按家狀良然公諱伏龍字見吉號 懼菴姓禹氏惟禹氏遠有代序自仲大 以侍中顯于麗五六傳冠冕赫然公之曾祖曰諱孝親縣令 贈左道禮生諱 舜佐 贈左承旨生諱崇善 贈吏曹 參判參判娵慶州郡守李洙之女嘉靖 丁未生公于漢城崇敎坊公自幼神氣 秀穎擧止異凡兒十四丁內艱欒棘如 成人弔者異之制除從習靜閔先生學 時先生以宿儒敎授高峰山下如洪判 書可臣洪參判履祥皆其徒弟與公上 下揖讓彬彬焉丁卯 國恤有司議儒 生服只用白衣冠公抗言曰吾等雖耳 食小儒曾被以寧之化惡可無服遂製 衰終三年識者是之癸酉陞上庠游太 學頖中例於大課試三公率六曹堂上 坐明倫堂諸生拜庭下爲禮公獨行揖 曰非 君父之前而士可庭拜乎首相 洪忍齋使宗伯進公問之故對曰昔我 莊憲大王嘗以首相臨辟雝不欲等 夷人臣令諸生拜下后趙靜庵先生以 爲非禮釐之至衮貞仇視士林遂復拜 禮小儒平生所嫉首腐心者也左相盧 稣齋頷之曰此儒所見正不可奪仍與 諸宰議革拜而定揖禮云是日出復禮 賦試諸生公居首無何奇高峯爲國子 長出儒字賦試諸生公又居首高峰進 公趣席曰異日斯文之託其在子乎自 是聲名籍甚丁丑朝廷建選學行士六 人公其一也薦目曰天資超邁學行表 著拜文昭殿參奉公遂斷擧子業其意 蓋以爲旣已登仕又與擧子爭能無異 龍斷故也明年改永崇殿齋郞箕城素 稱佳麗倡優女子鳴瑟跕履游媚官人 尠不爲惑公以蔡元定獨寢不媿衾當 座右銘方伯以下莫不嗟歎剛腸歷廣興奉事內贍直長陞主其簿癸未李栗 谷珥秉銓將擬公水曹郞參判牛溪公 曰此人有老母便養是急遂除木川縣 監居一歲治效白著用御史褒美陞金 浦縣令丙戌擢拜持平以親癠辭俄丁 外艱㿖墓三年己丑出宰龍宮縣災傷 御史至吏民相率塡街迎顯公政以▨ 聞賞表裏壬辰夷難作釜萊先陷列郡次第折入虎喙奔北之卒聚而爲盜侵 軼官軍公將率安榮比軍四邑軍赴慶 之急路遇叛卒詗得首倡者三人誅之 釋其餘使自效未至慶三十里與榮軍 文和而陣夜半又有叛卒號呶而起榮 之代將中箭卽斃公幸賴紀綱之僕得 免平明公整部伍娖隊而出叛卒皆散 遂入慶城以兵屬主將卽檢龍宮縣則 人民鳥獸散無餘公召父老子弟謝以 忠義裒兵得三千餘人直當倭衝與戰 數十合寇不得進龍縣獨全江左人士 將公力戰狀疏聞 行在賞賜緋后有 飛語將中中山篋賴梧里相公體察嶺 南覈當時事不差毫末公事大申癸巳 十月拜安東府使 特恩也安素稱地 大物殷而刳兵以來民餓死且盡公忘 食與寢施惠貞文子之政所全活不知 其幾民到于今稱之不衰當是時逐寇 天將師下于南安爲孔道儀物犒具咸 責之安公能談知應變如滑稽流酒於 是人服公全才無入不自得乃爾也公 在安時又上疏陳急務者四曰正朝廷 曰立紀綱曰愛民力曰修軍政也其本 則歸於人主一心上故尤拳拳焉 上 嘉納之時判度支缺 上令▨堂亡論 資格唯可者是薦左相金應南薦公首 台柳相議曰禹某方任安東治勣茂著 若召入必孤南民之望其薦遂寢居二 年辭遞丙申拜江原觀察使未行 上 引見備局諸臣敎曰夷聲方聳江都保 障是急新授徐渻言病誰可代者僉曰 禹某李文忠亦以爲宜 上卽命相換 公赴江都與王參政弼迪遇弼迪以尺 素爲禮曰子以儒林之望出司錢谷所 司非所習不其小用之耶昔蕭相國輓 關中不竭卒成炎劉之業足下職司得 亡與蕭相國比倫耶金王聲振英特絶 倫片時相接令人胸次灑落云華人之 ▨公如此公於江都以嚴明爲治雖貴 戚之寓居者歛手不敢爲非然謗燄則 興矣竟坐是遞己亥拜洪州牧使辛丑 體察使李公恒福巡到忠淸道馳奏曰 今之守令稱善治者專於公務者民不 知惠一於愛民者公務不擧若禹某力 於奉公優於恤民舟師徵發洪最多而 闔境晏然上特命陞嘉善不悅者綦 之改正明年備局薦公及徐仁元擬湖 西方伯 上問大臣兩臣材諝孰優領 相李德馨曰禹優於徐遂拜忠淸監司 又有逞憾干公者改羅州牧使御史睦 長欽尹暄踵相躡褒美州有訟者歷官 累而不能斷蓋光海在儲右其一也公 之任卽卞曲直一時歎服及苽而歸丙 午除忠州 牧使以方寓其土辭不許戊 申 宣廟昇遐光海立李文忠公都首 相建設宣惠廳薦公爲提調主其事砥 遠邇稱宨摦平賦圻輔公之力居多云 鄭仁弘論臨 海獄甚峻公見仁弘責以 保終之難仁弘不悅公遂色斯擧謝病 歸田壬子除成川府使李昌浚彈之惡 其異於時也癸丑四月二十九日卒於 麻田壠下得年六十七識與不識無不 相弔曾所涖州郡父老子弟咸來哭弔賻襚相銜七月甲申葬于先塋之下坐 子向千原公弱冠遊涬村之門當時蛾 子來術者盛矣而先生獨視韙公以豪 杰之士許之一時儕輩亦無異辭及乎 立朝言論風采皆足動人況當龍蛇擾 攘之際始政於安終政於江其所設張 擧錯栦祚應變咸出人意表非豪傑之 士能是乎若內行之修濟物之急敦睦 之義皆自天植學問中來信哉藥圃鄭 相嘗稱公曰以公之才之德置諸廟堂 上可以陶鑄至治而試止於州縣豈非 時與命尼之耶公文章有根柢有詩數 百篇傳詠於時云公內子鎭川宋氏常 山伯仁之後祖環周軍器正考樟司直 無男子子女適洗馬朴日章副室有五 男長敬言次敬齎次敬弼戊午司馬次 敬民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次敬錫 於倫序第五乙亥司馬甲申文科時宰 永平縣居官律己有足聽聞作室底法 不墮堂搆是乃請銘於不佞者也日章 一子之恒戊午司馬敬言三男四女男 長弘仁次弘一己卯司馬次弘翼女適 安尙龍柳昌虎李文炡李守命敬齎二 男一女男長弘瑞次弘濟夭女適安時 中敬弼二男二女男長弘成壬午司馬 次弘載夭女適李相胤康世學敬民二 男二女男長弘規次弘祖女適鄭錫益 金太元敬錫三男二女男長夭次鼎來 鼎基女適士人金延祚李厚蒔弘仁二 男二女弘一一女弘瑞一男弘成二男 一女弘規二女不佞猶記大父之言不 亶耳擩己銘敢辭 銘曰世譏儒者坐 談理高行之事違夫孰如公學優登仕 目無險夷剸煩以暇戡亂如飴何十之 敏結知吾 若藥以進言而忠之盡左 右賢於弛張民賦 王圻大蘇齊門操 瑟圓方不入吾道其愚生順歿寧未髦 何恨後必知吾
正憲大夫原任議政府左參贊兼弘 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
趙絅 撰▨▨大夫前行沙折道察訪 不肖孫 男 弘成 謹篆不肖孫男鼎
崇禎後六十七年甲戌八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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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江原道觀察使禹公墓表陰記。- 許穆
穆愚丁。少時未及師事公。後從前輩。聞閔先生稱公曰豪傑之士。然後穆益慕公之爲人。聞公之一言一行。皆識之。公之側室子某嘗見余於漣上。謂之曰。先人墳墓。在分石。將埋沒無以表之。願得一言。穆以慕公之心。忻然欲諾之。顧以淺陋不敢諾也。未久。其人死。其弟某繼其亡兄之意。泣而言。余慼其言。卽書其墓表曰。公諱伏龍。字見吉。姓禹氏。本丹陽人。其別號。懼庵。少時從幸村閔純先生學。十四。先府君歿。其居喪之節。一如成人。觀者皆以爲知禮。及長。從柳眉岩,許草堂諸公。始知名於世。二十六。爲大夫人。始應擧。明年癸酉。陞上舍。公擧止詳嚴無戲狎。諸生皆重之。多擬爲模範。每以時三公帥六卿。入太學試諸生。諸生序列拜於庭下。公獨揖而不拜。禮官召責之。公對曰。非君臨之禮。諸生不當拜庭下。自世祖爲國相時始行此禮。其後趙文正公以爲非禮罷之。及南衮爲相。旣嘗多殺士類。怒諸生謗己。遂復其拜。小儒未達其宜不敢拜。皆稱善。定爲揖禮。出復禮賦。擢公爲第一。丁丑。公應選。初仕爲文昭殿參奉。用太夫人之命也。因廢擧曰。旣入仕而復求擧。非義也。己卯。改永崇殿參奉。右議政李公鐸,吏曹判書李公珥交薦之。後陞內贍寺直長。明年。陞宗簿寺主簿。轉工曹佐郞。壬午。爲木川縣監。四年。以治理第一。陞金浦縣令。其明年。觀察使又上治效。賜帛褒之。其十月。入爲司憲府持平。時太夫人歿。旣葬居廬。於是有講禮答問。己丑。爲龍宮縣監。壬辰春。倭大擧入寇。而慶州河陽境。有亂兵作亂。官軍赴援者連敗。人心大懼。公發縣中兵。合醴泉兵三千。過河陽。遇盜力鬪。盜敗散。追逐得六十人。縛而數之曰。若罪當斬無赦。䝱從當宥。今慶州朝暮且急。立功則更有賞。皆伏。斬其首亂者二人。前驅未至慶州三十里。止舍。夜盜急擊官軍。醴泉兵亂。旣射殺其領將。其前擒者皆奪之。公旣整軍。遲明引至慶州。以兵屬節度使。當此時。慶州已急。而上游援兵至者。惟公所領兵三千而已。於是賊連勝。遂前諸城大潰。公還縣。募鄕縣子弟得千餘。遇賊數十合。縣得全事聞。上手札寵奬之。賞加通政大夫。十月。陞安東大都護府使。乙未。李文忠公某爲領相。體察兵馬。巡行南方州縣。有河陽人訴之曰。某前任龍宮時。領兵到阿火驛。濫殺河陽之人。體府按驗其狀。盜儻得攀緣士大夫。以爲援據。而更革面反訴如此。李公怒。執其反訴者。斬之軍門。事在李文忠公事中。方賊乘勝。天子遣將救我。賊大窘據我。南境邊海。久爲賊所。而提督旣復三京。自以功多。其意已怠。復疑畏窮寇尙強。一朝挫折無前功。以大兵屯忠州以觀望。時經略責提督。以賊已敗北。而不追擊出境爲咎。促進兵不已。公至軍門。見提督。爲言南方地利險阨。人心日望大軍來臨。而賊方窮縮狀。提督大悅。乃出兵南下。而實無鬪心。於是公當板蕩之際。賑飢勸農。給餽餉不絶。上賢其勤勞。賜粧馬以賞之。時戶曹判書闕。上令大臣薦其人。左議政金公應南,右議政鄭公琢。皆曰無愈於某。明日。領議政柳公成龍白上曰。某賢能。固當大用。安東。嶺南要衝保障之地。某方得吏民心。今若召還。百姓失望。上乃寢其薦。公爲安東五年。上疏自陳。仍及時弊。其略曰。臣所陳者梗槩而已。其小者煩屑而不暇擧。其大者忌避而不敢盡。臣罪大矣。正朝廷。立紀綱。愛養民力。修明軍政。今日之急務。而其本在殿下之一心。豈有大本不立。而朝廷自正。紀綱自立。軍政自修者也。殿下非不恤民。而民生日瘁。非不理財。而財用日匱。非不治軍。而軍政日紊。其於恢復之圖。無異却步而求前。此不過大本不立。其所以行諸事業者。文具而已。今日降一旨。明日行一事。徒紛紜。卒無歸宿。委靡渙散。如日將暮。臣每念及此。不覺流涕。繼之以痛哭。上嘉納之。卽許其代。冬。拜江原道觀察使。上疏力辭。時倭再入寇。旣請救於中國。舟師循海路至江華。上將擇遣其守。難其人。諸大臣僉曰。某前爲安東功績著聞。領議政嘗在朝。亦稱其賢能。以爲北此人不可。上然之。卽有江都之命。公受命卽行。府中皆喜得人。後王參政與語。大悅曰。子以淸選。出司錢穀。不其少用之乎。昔。蕭何守關中。轉輸不乏。卒成漢業。子得毋與蕭相國比耶。時妃嬪諸公子皆在江都。公奉給無厚。而守法甚謹。以故掖庭私屬多憚之。時適有軍門將士卒至坡州。出不意。急蒭馬之供不及。本州當罪。而公摠掌凡兵馬供給諸事。故竝詔獄。尋罷出。其後連擬望天曹,政院,龍灣尹,嶺南觀察使。上皆不用。右議政請上曰。不用某。竊不知其故也。上曰。不忘矣。己亥。爲洪州牧使。明年。兵馬體察使李公恒福啓聞。某政有條理。禮讓化俗云。上命進階嘉善大夫。有當路者惡之。力攻之。卒改正。而繼有褒聞。故賜帛寵之。尋罷。辛丑。大臣薦之。爲忠淸道觀察使。上疏辭之。正言宋淳嘗不悅。啓上曰。某雖以經學擢用。他日門蔭之希冀濫越者。因此以爲藉口。上不聽。嘗臨朝問曰。某久不辭朝。何也。大臣對曰。某名節之士。臺諫論之。必不出。請改之。卽日。改羅州牧使。上曰。大臣言之。欲治羅州以爲保障之托。公居羅州。三年。御史連上治績。上加寵賜賚之。丙午。拜忠州牧使。居一年罷。戊申。上旣昇遐。光海君嗣位。而李文忠公復入相。建大同法。推薦公攝宣惠廳事。時臨海君獄事大起。而鄭仁弘始用事。公語仁弘曰。保初節雖易。保晩節實難。老入脩門。勉保晩節。仁弘心不悅。公告人曰。德遠。非前日之德遠。當絶。因不樂仕宦。與宋仲懷書曰。羈縻宣惠之役。徒費廩粟。前頭之憂。不在民役之均不均。北村煙月。閑送餘年。此第一計也。遂謝病。秋。爲錦山郡守。見世道日非。益無意於世。棄官歸。後有成川之命。不起。而有臺諫李昌後竟劾之。壬子。鄭仁弘入爲左相。嘗過之。公曰。朋友之道。道不合則絶。謝不見。公旣與世俗相疏絶。不復繫心榮辱。潔身獨行以自娛。明年癸丑。歿於麻田之無等莊。無等莊者。在壺口峽裏江上別業。公天資卓犖。好言論。臨事善謀。嚴於義利邪正之分。君子慕之而小人多忌之。其學篤於人倫。察於事物。尤致勤於報本返事之節。而推及九族。親戚之飢寒無所歸。賴公而得其生養者。如恃父母。治之郡邑。百姓之窮無告者。咸得其仁。而如閭巷之善行。皆無不表奬而加勉之。於是賢愚皆服其德。而方國內大亂。公私板蕩。當事立辦不失機宜。我宣祖世。稱良二千石。公爲第一。事業雖不大施於一世。亦其較著可述者如此。而孔子曰。邦有道則仕。邦無道則可卷而懷之。其進也有禮。其退也有義。能立不撓。邪世不能亂。亦可見君子之偉然者矣。信乎豪傑之士也。公六十七歿。公高麗門下侍中天錫之九世孫也。曾祖孝親。我成宗時。以遺逸徵爲掌隷院司評。皇祖舜佐。皇考崇善。皆有隱德高行。至公乃大發云。母李氏。古甲子名人再思堂黿之孫也。公娶宋夫人。無子。有外孫曰之恒。光海宰相某之孫。進士。有側室子五人。敬彥,敬賚,敬弼,敬民,敬錫。敬弼。嘗擧進士。早殀。敬錫。以科第得仕。今爲永平縣令。
[주-D001] 䝱 : 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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