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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손 비명 병서(李繼孫 碑銘 幷書).

야촌(1) 2011. 9. 28. 20:13

■ 유명조선국 경헌 이공 비명 병서

   (有明朝鮮國 敬憲 李公 碑銘 幷序)

일찍 일어나서 일에 공손함[夙興恭事]이 경(敬)이요, 사물을 널리 들어 알고 재능이 많은 것[博聞多能]이 헌(憲)이다.
전(前)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은 비문(碑文)을 짓고, 아울러 비문의 글씨를 쓰다.

 

성화(成化) 19년(1483, 성종 14) 9월 기해일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공(李公)이 사망하여 이미 장사를 지냈다.

한해 지나서 근신(近臣)이 영안도(永安道)에 왕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돌아와서 그 도(道)의 유생이 바친 사부(詞賦)를 올리고, 이어서 이공(李公)이 교화를 일으킨 연유에 대해 말하였다.

 

성상(聖上)께서 매우 가상하게 여겨 유사(有司)에게 공을 장려할 수 있는 방도에 대해 의논하라고 명하여 특별히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예문관대제학(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提學)을 추증(追贈)하고 관원을 보내어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하였으니, 실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성대한 일이다.

 

7년이 지난 뒤에 사자(嗣子)인 지화(之和)가 그 일과 행장(行狀)을 갖추어서 나 사홍(士洪)에게 고하기를, “선친(先親)의 공명(功名)과 사업(事業)에 대해서는 국가의 사서(史書)에 기록된 것이 있으나 출처(出處)의 전말(顚末)에 대해서는 기록이 더러 상세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제 관작을 추증해주는 융성한 은혜가 지하에까지 미쳤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묘도에 비석을 세워서 뒷날에 보는 자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고 하니 부디 비문을 지어주십시오.” 하였다.


행장을 살피건대, 공(公)의 이름은 계손(繼孫)이고, 자(字)는 인지(引之)이다. 이씨(李氏)는 본관(本貫)이 여강(驪江)으로 명망(名望) 있는 가문이다. 학사(學士) 고(皐)는 공의 비조(鼻祖 : 시조)이고, 증조부 진(珍)과 할아버지 유(猷)는 모두 관직이 있었다.

 

아버지 의인(依仁)은 마지막 벼슬이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었는데 공이 귀하게 되어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하였다. 판서(判書)는 경시서영(京市署令) 송구빈(宋九빈)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는데,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학문에 힘썼다.  

 

정통(正統) 정묘년(1447, 세종 2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 해에 급제하여 교서관교감(校書館校勘)에 보임(補任)되었으며, 관직을 두루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다. 의정부에서 공을 검상(檢詳)으로 의망(擬望)하니, 세조 임금께서 의정(議政) 강맹경(姜孟卿)에게 이르기를, “이계손(李繼孫)은 나도 사신(使臣)으로 보내려고 하니 경(卿)은 천거(薦擧)하지 말라.” 하였다.

 

경진년(1460, 세조 6)에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양계(兩界)의 순찰사(巡察使)가 되자 공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는데, 공이 어머니가 병이 있다고 상당군에게 고하니 상당군이 핑계를 된다고 허물을 삼아 웅천군(熊川郡)으로 귀양을 보냈다.

 

당시에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우리나라에서 관직을 받게 해달라고 청하자, 성상께서 사신을 보내어 왕명을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적임자를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특별히 공을 불러 돌아오게 하여 품계를 한 등급 올려서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로 삼았다.

 

그리하여 바다에 도착하였는데 대마도주가 곧바로 원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으므로 사신의 행차를 중지하였다. 신사년(1461, 세조 7)에 세자시강원좌보덕(世子侍講院左輔德)으로 제수(除授)되었다가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하루는 성상께서 술을 마시고 공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상당군에게 붙지 않은 것은 경의 잘못이다.”하였다.갑신년(1464, 세조 10)에 강원도에 흉년이 들자 공을 내보내서 관찰사로 삼았는데 진휼(賑恤)을 잘하여 품계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려주었고 1년을 계속해서 유임(留任)시켰으며, 들어와서는 중추부사(中樞副使)로 삼았다.

 

성상께서 내전(內殿)에서 공경(公卿)을 소견(召見)할 때에 공에게 이르기를, “경이 강원도의 백성들을 잘 구제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강원도를 경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경이 거기에 가서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서 다스리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명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성상께서 의정 황수신(黃守身)을 돌아보며 공에게 이르기를, “황수신이 이미 정승(政丞)이 되었으니 경은 정승이 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하였으니, 그 기대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얼마 뒤에 형조참판에 임명이 되었다가 예조참판 겸 도총부부총관(禮曹參判兼都摠府副摠管)으로 옮겨졌다.

 

평안도의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공을 순무사(巡撫使)로 임명하고 품계를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올려주었다. 기축년(1469, 예종 1)에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道)가 되었다. 함경도는 북쪽 오랑캐와 가까워서 그 풍속이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고 학문을 일삼지 않았다.

 

공이 그들을 유도하여 학문에 나아가도록 하려고 조정에 보고하여 향교(鄕校)를 일으켜 세우고, 난신(亂臣)의 노비(奴婢)로서 호적(戶籍)에서 누락된 자를 추쇄(推刷)하여 향교의 종으로 소속시킨 뒤에 명민(明敏)하여 자질이 있는 자제(子弟)를 선발해서 모여 배우도록 하고 공이 직접 강의하였다.

 

또 군현에 경서(經書)를 나누어주고 문신(文臣)을 골라서 교관(敎官)을 삼으며 사계절마다 도회읍(都會邑)에서 과시(課試)하는 법을 설행함으로써 힘쓰도록 권장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학문하는 것을 즐거워하여 온 도(道)가 크게 변화하였다. 

 

이에 시험이 치려지는 해마다 영안도의 자제로서 생원이나 진사가 되는 자가 많았으며,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른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그곳의 백성들이 공을 부모처럼 공경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있으니, 문옹(文翁)이 촉(蜀) 땅을 교화한 것에 비교해보더라도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


신묘년(1471, 성종 2)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옮겨졌다. 
임진년(1472, 성종 3)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고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랐다.

 

공이 평양에 도착하여 귀후사(歸厚司)를 설치하여 관곽(棺槨)을 만들어 팔 수 있도록 허락하니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았다. 갑오년(1474, 성종 5)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고 재직(在職)한 지 몇 개월 만에 감옥이 텅 비었다고 아뢰니, 성상께서 기뻐하여 상을 주었다.  

 

을미년(1475, 성종 6)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겨져 회간왕(懷簡王)의 고명(誥命)을 청하는 사신 행차의 부사(副使)로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礩)이 북경(北京)에 갈 때 동행하여 승낙을 받고 돌아오니 노비와 토지를 하사받았다.


병신년(1476, 성종 7)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고, 정유년(1477, 성종 8)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무술년(1478, 성종 9)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이해 겨울에 작은 죄로 인해 아산현(牙山縣)에 유배(流配)되었다.

 

신축년(1481, 성종 12)에 다시 지충추부사 겸 지의금부사(知中樞府事兼知義禁府事)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옮겨졌다. 계묘년(1483, 성종 14)에 사직(辭職)을 청하는 글을 올려 지중추부사로 옮겨졌다.

  

갑진년(1484, 성종 15)에 또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성상께서 의원(醫員)을 보내고 약(藥)을 내려주어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망하니, 향년이 62세였다. 시호(諡號)는 경헌공(敬憲公)이다. 부인 정씨(鄭氏)는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손녀이고, 계실(繼室) 이씨(李氏)는 정랑(正郞) 이영서(李永瑞)의 딸이다.

 

모두 아들과 딸이 있다. 아들 지임(之任)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지화(之和)는 사성(司成)을 지냈으며, 지시(之時)는 사맹(司猛)을 지냈다. 딸 하나는 군자판관(軍資判官)을 지낸 최철중(崔鉄重)에게 출가하였고, 하나는 지금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인 정경조(鄭敬祖)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공은 평소의 기국(器局)이 너그럽고 크며 마음이 솔직담백하였으며 문장(文章)에 익숙할 뿐만이 아니라 관리로서의 뛰어난 능력도 겸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공경(恭敬)으로써 윗사람을 섬기고 정성으로써 깐깐하게 따지는 않았는데도 살피는 것이 밝아서 사람들이 흐리멍덩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너그러운 도량이 있어서 명망이 이미 조정에 자자하였으며, 평상시에 불평하러온 사람을 만나면 한바탕 보고 웃을 뿐이었으니 공은 도량이 큰 군자라고 할 수 있겠다.

 

아!

공의 성대한 덕(德)을 벼슬아치들이 누구인들 모르겠는가마는 영안도에서 시행한 것들은 참으로 풍속을 교화하는데 공(功)이 있고 국가의 원기(元氣)를 북돋아주었으니 그 나머지의 공명과 사업은 생략하고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가 그러므로 표현하여 명문(銘文)을 짓는다.


명문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의 도(道)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해 같이 하늘 한가운데서 운행하고 
사람의 본성(本性)은 어질거나 어리석음의 구별이 없으니
지혜로운 자가 밝음으로써 가르친다.


북도(北道)의 풍속은 태어나면서부터 거칠어서 
활쏘기와 말 타기가 습관이 되었으며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은 읽어본 적이 없으니 
예의와 의리를 소홀히 한다. 


공은 가르침을 베풀기 좋아한 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난 가엽이 여기는 마음 때문이며 
여러 지방에 힘쓰도록 권유하여 
오경(五經)을 궁구하도록 강의(講義)하였다.


누구나 떳떳한 인륜(人倫)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본래 덕(德)을 좋아하기 때문이나
이것을 옮기게 된 것은 공의 가르침 때문이다. 
책 보따리를 메고 서로 공의 당(堂)에 오르려 다투었으며 
지방에서 인재(人才)를 선발하여 조정(朝廷)에 바쳤다. 


무기를 내던지고 붓을 잡았으며 
투구를 벗고 선비 차림으로 바꾸었네. 
촉군(蜀郡)이 문옹(文翁)에게 교화되듯이 
북쪽 변방(邊方)이 영구히 안정되었다. 


많은 백성들이 공을 아비처럼 추대(推戴)하여 
사우(祠宇)를 높이 세웠네.
성상(聖上)께서 그 치적(治積)을 가상히 여기어 
관작(官爵)을 하사하고 영예를 나누어주었다. 


풍성한 은혜가 많은 사람들의 눈에 넘치니 
황천에 계신 혼령도 응당 놀라리라. 
공의 도량은 바다처럼 넓고 
공의 재주는 가을 송골매와 같도다. 


대관(臺官)과 육조(六曹)의 관직을 두루 지내고 
이름과 지위가 높아져 구경(九卿)에 올랐네. 
맑은 풍도(風度)와 높은 절의(節義)는 
조정에서 모범이 되었다. 


어찌하여 목숨이 다해 
승천하여 옥황상제에게 갔는가. 
동쪽으로 흘러가는 구포(仇浦)물 자락
중간에 8자[尺] 되는 무덤 있다네. 


산천은 모두 푸르러 
신령한 기운이 뛰어난 기운을 만들어서 
자식을 두고 이어 손자를 두니 
영원토록 집안의 명성을 이어가리라. 

홍치(弘治) 4년(1491, 성종 22) 3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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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敬憲李公碑銘幷序


夙興恭事曰敬 博聞多能曰憲 前都承旨 任士洪 撰


成化十九年九月己亥知中樞府事李公卒旣葬 之踰年有近臣奉使永安還上其道儒生所造詞 賦仍言公興化之由 上嘉甚 命有司議所以奬公特贈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 提學遣官賜祭實稀世盛事也後七年嗣子之和 具其事狀告士洪曰惟先考之功名事業雖有國 史其出處如終紀或不詳況今贈爵隆恩覃于泉 壤願樹石墓道用式後之觀者幸爲之文按狀公 諱繼孫字引之李系驪江望族有學士諱皐是公 鼻祖而曾祖玄祖猷皆有官考依仁終廣興倉副 丞以公貴贈兵曺判書判書娶京市署令宋九贇 女生公幼聰慧力學正統丁卯中司馬試其年登 第補校書校勘歷官至禮曺正郞議政府擬公爲 檢詳 世祖謂議政姜益卿曰李繼孫予亦欲使 卿勿薦引歲庚辰上黨君韓明澮爲兩界巡察使 辟公爲從事公以母病告上黨咎以辭㧌謫于熊 川時對馬鳥主請受職于我 上欲遣价宣命而 難其人 特召公還進階一級副知通禮門事旣 到海島主旋報不願停其行辛巳以世子左輔德 拜承政院同副承旨尋陞左副一日 上酒酣戱 公曰不附上黨卿之過也甲申江原道歲侵出公 爲觀察使以能賑荒進階嘉善仍留一朞入爲中 樞副使 上召見公卿於內殿謂公曰卿能救江 原民予甚嘉之欲以江原一道委卿卿其徃彼而 治耶在此而治耶公對曰惟 上所命 上顧視 議政黃守身謂公曰守身旣爵政丞卿勿以政丞 爲難也其期待若是尋拜刑曺參判轉禮曺兼都 摠府副摠管平安道民多流移 命公巡撫進階 嘉靖己丑爲咸鏡道觀察使道近兆狄其俗喜弓 馬不事學問公欲誘進之迺申于朝修起鄕校刷 亂臣奴婢之漏籍者以屬選子第開敏有資者聚 而學之公親自講授又請頒經籍於郡縣擇文臣爲敎官設四時都僉課試法以勸厲之人樂爲學 一道大化▨是每試年永安子第之爲生員進士 者多至擢巍科躋顯仕者亦有之至今其人民戴 如父母爲立祠堂以祭之比之文翁化蜀一未 讓辛卯拜吏曺參判轉兵曺壬辰爲平安觀察使 進階資憲公到平壤設歸厚司造棺槨許買民蒙 其惠甲午拜刑曺判書居數月奏囹圖空虛 上 喜賞之乙未移知中樞府事以請 懷簡王誥命 副上洛府院君金礩朝 京蒙准以還賜藏獲 土田丙申爲黃海觀察使丁酉拜大司憲戊戌爲 京畿觀察使是年冬以徵罪謫牙山丑拜知 中樞府事兼知義禁府事轉漢城判尹兵曺判書 癸卯 上書辭職移中樞甲辰又以病辭 上賜 醫藥治療不效享年六旬有二諡曰敬憲公配鄭氏文忠公圃隱孫女也繼李氏正郞永瑞女也俱 有男女曰之任司憲監察曰之和進士曰之時司猛女一適軍資判官崔鐵重一適今承政院左承旨鄭敬祖孫男女若干盖公平生氣宇▨洪心地坦夷旣熟於文兼通虞史若官以敬事上以誠無察察之明而人不以爲湖塗有休休之量而望已孚於廊廟居常或遇不平之來但見一笑而已公可謂大度君子也嗚呼惟公之德之盛縉紳孰不知而所設施於永安者實有功於風化而扶翊乎 國家之元氣則其餘功名事業略而不書可也 吾故表而出之爲銘銘曰。

聖道亘古今兮如日中天行 人性無賢愚兮 智者敎以明北俗生來梗兮 弓馬習與成 詩書日不覩兮 禮義還爲輕 惟公好敷敎兮 㦖惻由中情勸勱以多方兮 講授窮五經 秉彛自好德兮 轉移惟公聽 負笈爭升堂兮 射䇿獻明庭 鉛槧謝戈㦸兮 兜鍪換替纓 蜀郡化文翁兮 塞北其永寧 群甿戴如父兮 柌宇高崢嶸 宸心嘉乃績兮 錫爵頒寵榮 汪恩溢衆目兮 九泉魂應驚 公量滄海洪兮 公才 秋鶻橫 歷敭遍臺曺兮名位崇九卿 淸風 與高義兮 朝著爲儀刑 湖爲歲在辰兮 騎▨朝帝京 仇浦向東流兮 中有八尺塋 山川儘蔥▨兮 靈氣結華英 有子仍有孫兮千▨兼垂家聲。


  弘治四年三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