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렴재유집(孝廉齋遺集)
[세계] 이경주(李擎柱) 著 > 제정공(霽亭公) 달충(達衷)의 6대손
[간행년도] 1859년
[판본] 목판본
[序·編·跋 저자 ] 序-柳致明․李彙寧, 跋-李源祚(1859)
[시대] 15C~16C
[서지] 奎 11994孝廉齋 李擎柱의 文集. 3권 1책.
[해제] 이경주(李擎柱)의 유고(遺稿)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많이 없어져, 그 양이 많지 않으나 10세손 안찬
(顔燦) 등이 남아있는 글들을 모으고, 서(序)와 언행록(言行錄),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봉안문
(奉安文), 발(跋)을 덧붙여 1책으로 간행하였다.
책의 구성을 보면 먼저 ‘효렴재선생유집서(孝廉齋先生遺集序)’라는 제목 아래 유치명(柳致明)이 지은 글이 실려있는데 판심제(版心題)는 ‘효렴재유집서(孝廉齋遺集序)’이다.
이어서 권제(卷題)는 없고 판심제(版心題)만 ‘효렴재유집서(孝廉齋遺集序)’로 되어 이휘녕(李彙寧)이 지은 글이 실려 있는데, 판차가 ‘一’부터 다시 시작되어 있다. 다음은 ‘효렴재선생유집목록(孝廉齋先生遺集目錄)’이라는 제목 아래 권지일(卷之一)의 년보(年譜)에서 권지삼(卷之三)의 발(跋)까지의 목차가 실려있다.
본문의 卷之一은 연보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보의 맨끝에 글자체가 다른 글씨로 1862년에 우계사(愚溪祠)에 이안(移安)한 사실이 첨기(添記)되어 있다. 卷之二는 이경주의 시(詩) 25편 29수와 차운(次韻) 2수 元韻 1수, 부(賦) 1편, 잠(箴) 2편, 명(銘) 2편, 찬(贊) 2편, 설(說) 4편이 실려있다.
이 가운데 목차에는 ‘화유간성(和柳杆城)-공작(公綽)-기시(寄詩)-부원운(附元韻)’으로 실려있는 시(詩)가 내용에서는 ‘화유간성(和柳杆城)-공작(公綽)-견기(見寄)-부원안(附元韻)’로 되어 있다. 권지삼(卷之三)은 부록(附錄)으로서 언행록(言行錄)과 행장(行狀) 2편, 묘갈명(墓碣銘), 평천사(平川祠)에 봉안(奉安)할 때 지은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이 실려 있다.
뒤이어서 ‘발(跋)’이 실려있는데, 목차에는 ‘발(跋)’을 권지삼(卷之三)에 넣고 있지만, 실제로는 ‘효렴재선생유집발(孝廉齋先生遺集跋)’이라는 권제와 ‘효렴재유집발(孝廉齋遺集跋)’이라는 판심제 아래 독립되어 있다.
이 뒤로는 목차에 없는 부분이 덧붙여져 있는데, 권제(卷題)는 없고 ‘효렴재집부록(孝廉齋集附錄)’이라는 판심제 아래 ‘우계서원묘우상량문(愚溪書院廟宇上樑文)’과 ‘이안문(移安文)’, ‘봉안문(奉安文)’이 실려있다.
연보의 말미에 ‘1862년 우계사로 이안하였다’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는 사실과 목차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책의 말미에 덧붙여져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이 문집은 두 번에 걸쳐 편찬,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발문이 쓰여진 1859년 무렵 序에서 跋에 이르는 부분이 편집되어 판각되었다. 그러다가 1862년 우계사에 이안하게 되자 이 사실을 이미 판각된 연보에 덧붙이고, 이와 관련된 봉안문 등은 새로 판각하여 책 뒤에 덧붙임으로써 현재와 같은 체제를 갖추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문집은 1862년 이후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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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경주(李擎柱)
[저자개요]
1500년(연산군 6)∼1597년(선조 30). 자(字)는 석초(石楚), 호(號)는 효렴재(孝廉齋) 이다.
그의 관향은 경주(慶州)이고, 고려 밀직부사대제학검교정승(密直副使大提學檢校政丞) 세기(世基)의 八代孫이요.
제정공(霽亭公) 달충(達衷)의 6대손 으로,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차황면 우사리에서 낙정(樂正) 이완종(李完從)의 네째(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저자내용]
경상도 山陰縣 漢峙里에서 태어났다.
본디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63세에 延豊현감에 제수되어 3개월간 재임한 것이 유일한 관직이다.
향리에 은거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덕성을 익히며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1836년 平川祠에 봉안되었다가 1862년 우계사로 이안되었다. 德溪 吳健(1521-1574), 立齋 盧欽(1527-1602) 등과 교유하였다.
[제목] 없음
柳致明(1777-1861)이 쓴 서문이다.
明宗 宣祖 年間에 많은 현인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스스로 닦는 데에만 힘쓸 뿐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효렴재공도 그 가운데 하나라는 것과, 일찍이 退溪 문하에서 배운 일도 없고 그 문하생들과 교류한 적도 없지만 이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그러하였을 뿐, 지향하는 학문은 같았다는 것이<靈臺主人箴>.<大學八條贊> 등의 글에 잘 나타난다는 것,
1832년에 많은 선비들이 공을 平川祠에 봉안하였으니, ‘떳떳한 도리를 잘 지키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 등이 실려있다. 또한 공의 후손인 顔八, 顔燦의 요청으로 서문을 쓰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年譜(1) : 1500년에 태어날 때부터 1597년에 세상을 떠나 장사지낼 때까지의 여러가지 일들과 1836년에 平川祠에 봉안되었다가 1862년에 愚溪祠로 移安된 일을 적고 있다. 생애에 관한 것들은 거의 공부와 교우관계 그리고 시와 문을 지은 일들로 구성되어 있어 특기할만한 것은 없다.
詩 : 題壁-五言絶句-附次韻-仲兄敬齋公(1514),
山齋, 活水, 中庸, 遊孝廉山(1534),
林蘭, 前溪晩興, 窓梅-二首, 池塘-二首(1541),
幽居, 園桃-二首, 春興, 漁翁, 幽興, 過龍淵(1551),
中庸-五言四韻, 大學, 自警示學者, 再過龍淵-七言絶句(1553)-
又, 以造化詠心情, 謝吳思湖-長-來訪-附次韻(1588),
人生體天地-七言四韻, 和柳杆城-公綽-見寄-附原韻, 遊換鵝亭, 愚溪
觀水賦(5) : 1536년. 물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賦. 잠시도 그 흐름을 멈추지 않고, 반드시 웅덩이를 다 채운 이후에 흘러가는 물이 가진 덕성과 더불어 圖와 書를 낸 河와 洛, 공자 맹자와 관련이 있는 洙와 泗, 송대 성리학자들과 연관을 맺고 있는 濂과 洛 등의 물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또한 물과 관련되어 있는 공자, 맹자, 증자 등의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술하고 있다.
敬人箴-幷序(6) : 1546. 천지는 인간으로 마음을 삼는데, 인간에게는 마음이 곧 주인이니,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이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좋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비록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할지라도 이 마음이 먼저 알아서 감히 속일 수가 없다는 것 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항상 요동하여 안정되지 못하니 敬한 연후에야 비로소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며 敬으로써 始終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愼言箴(7) : 1581년. 입은 몸의 문으로서 열리고 닫히는 것이 곧 말하고 침묵함이라는 것과, 말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반드시 이에 대한 감응이 있으니 항상 깨지기 쉬운 병을 다루듯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몸을 닦는 데에는 말을 삼가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琴銘(7) : 1558. 거문고에는 삿된 것을 막고, 흩어진 것을 거두어들여 스스로를 지키며, 바깥 사물에 유혹되지 않고, 맑은 태고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등의 덕성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劍銘(7) : 1558년. 검은 단련할수록 더욱 정미해지고, 나무와 쇠가 어울려 오행이 바탕을 이루며, 안으로 밝은 것은 敬이요, 밖으로 끊는 것은 義이니, 이를 차고 명을 지어 자기의 뜻을 연마하고자 함을 말하고 있다.
大學八條贊(7) : 1570. ≪대학≫의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여덟 조목에 대하여 찬하고 있다. 격물은 사물의 理를 궁구하는 것, 치지는 지식을 넓혀 극에 이르기를 기약하는 것, 성의는 한 생각이 일어날 때에 선악을 잘 살펴 근신하고, 정심은 전전긍긍하여 스스로 잘 유지하는 것,
수신은 말과 행동이 서로 잘 들어맞고 남을 편벽되이 대하지 않으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올바름을 얻는 것,
제가는 부인과 형제들에게 모범을 보여 한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 치국은 孝로써 임금에게 충성하고 弟로써 어른께 따르며 慈愛로써 대중을 부리고 자식처럼 기르는 것, 평천하는 저들과 나의 마음이 같아 좋아하는 것도 같으니 推恕로써 헤아려 각자 이루게 해주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誠贊(8) : 1573년. 理에 따라 태극으로부터 음양오행의 작용에 의하여 만물이 생겨나고 운행하는 조화를 찬탄하면서, 인간은 이 理를 본디 타고나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니 마음이 임금이고 신체는 그 명령을 듣는 자로서,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 명령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온갖 생각과 만물이 내 한몸에 갖추어져서 誠에 감응하는 바가 되니 스스로 이루지 아니하는 것이 없으며, 비록 만가지 일이 있다 하여도 이치는 하나이며, 達德이 셋이요 大經이 아홉이지만 행하는 것은 誠 하나로써 하니, 군자는 誠으로써 스스로 면려하여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이에 찬을 지어 날마다 독송하여 싫증내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磨鏡說(10) : 1577년. 거울에 티끌이 있는 것은 거울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닦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닦아주건 닦아주지 않건, 티끌이 끼었건 끼지 않았건 거울 가운데 있는 광명은 본래 그대로 한번도 없어져본 적이 없으므로, 날마다 세 번씩 닦아주면 그 광명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이 드러날 것이니, 거울의 본성을 되살리는 일은 내가 닦아주는 것에 달려있을 뿐 다른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자기가 가진 거울을 열심히 닦아주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거울과 같이 깨끗하지 못하다 하여 버린다면 이는 참으로 거울의 본성을 아는 길이 아닌 것처럼, 사람이 明德에 대하여 스스로 밝히는 것과 밝히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으니, 어찌 감히 자포자기하여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源泉說(11) : 1583년. 먼저 ≪논어≫에 “가는 것이 저와 같아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라고 한 말과 맹자에 “웅덩이를 다 채운 뒤에야 四海로 흘러간다”고 한 구절을 보면서, ‘옛 성인들은 왜 도학의 이치를 말하면서 반드시 물로써 가르친 것일까’라고 궁금해했었음을 말한 다음, 道에 근본이 있는 것이 물에 원천이 있는 것과 같은데, 천지만물의 動靜生成之間에 이 도가 흐르지 않는 것이 없지만 도가 본래 형상이 없어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므로 형상이 있어서 잘 볼 수 있는 물로써 비유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청명일에 동산 아래에 거닐다가 물소리가 나서 그 근원을 살펴보니 작은 못으로 불과 한 국자의 물에 불과하지만, 잠시도 멈추지 않고 솟아남에 마침내 골짜기물이 되고 계곡물이 되며 시내가 되고 강이 되어 사해에 가니, 이는 진실로 근원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儒家에서 말하는 바 도를 구하는 것도 멀리있는 것이 아닌데, 자신이 못난 자질로 참된 근원을 찾을 줄 몰라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내지 못하고 더러운 물 속에 빠져 어디로 가야 할 줄을 모르고 죄인이 됨에, 아프게 스스로를 경계하고 채찍질하여 설을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蒙窩五規-幷序(12) : 1568년. 학교를 세우고서 규칙을 정한 글. 배우지 않으면 도를 행할 수 없고, 도가 분명하지 않으면 사람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옛날 성인이 걱정하여 상서학교를 세워 교육을 함에, 사람마다 배우지 않음이 없고 도가 행해지지 않음이 없게 되었으나, 세상이 혼란해지면서 도가 쇠미해지니 사람들이 힘써야 할 바가 도학임을 모르고 자포자기하여 마음을 잃고 육체적 욕망만 따르니 금수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음을 먼저 말하고 있다.
이어서, 이 고을에도 그런 병이 있어서 학교를 폐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가르치고 공부할 곳이 반드시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1568년 몇몇 동지들과 뜻을 모아 廉峰 아래 紫沙洞에 몇간 초가를 지어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게 되었으며, 이에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로 된 학교규칙을 정하였는 바, 이는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법도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모두들 열심히 이 규칙에 따라 공부하면 孝悌忠信의 행실과 禮義廉恥의 풍조가 오늘날 되살아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섯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부하는 과정은 옛사람의 법에 따라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으로 이어지
는데, 이 순서는 어지럽힐 수 없다.
둘째, 책을 읽을 때에는 마땅히 連音斷句하여 수백번을 읽고, 音訓이 익숙해지면 비로소 거듭 字義를 생각하며, 자
의를 깨닫고 난 다음에 다시 句義를 거듭 생각하는데, 章義, 篇義도 이와 같다. 힘 쏟아 연구하여 흠뻑 젖어 성
현에게 나아가며, 한 글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비록 적게 읽는다 하여도 반드시 얻는 바가 많을 것이다.
셋째, 책읽는 틈에는 헛된 장난을 하지 않고, 배운 것을 익혀 갈고 닦아 날마다 새로워져서 멀리 나아가고 높이 올라
가는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
넷째, 글씨를 쓸 때에는 만일 한 획이라도 바르지 못한 것이 있으면 이는 그 마음이 먼저 바르지 못한 것이니 방심하
여 함부로 쓰지 말 것이며, 오로지 敬으로써 한다면 이는 글자를 쓰는 법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체도 된다.
다섯째, 科擧공부는 힘쓸만한 것이 아니니, 만일 여기에 빠진다면 전날 세웠던 참된 학문을 향한 뜻을 잃고 말 것이
다. 따라서 먼저 그 큰 것을 세워놓는다면 과거시험 같은 자잘한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니 거기에만
뜻을 두지 않도록 마음을 삼가야 한다.
朱書講義(14) : 朱子書에 대한 강의 내용으로서 吳德溪의 해설이 덧붙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만물을 하나의 근원으로 논하자면 理는 같지만 氣는 다르며, 만물이 제각기 다른 몸인 것을 보자면 기는 오히
려 서로 가깝지만 리는 절대 다르다.
둘째, 리와 기는 서로 다른 두 존재이다. 셋째, 태극이 흩어져 만물이 되니, 만물은 각자 태극을 갖추고 있다.
言行錄(1)
이경주(李擎柱)의 언행을 기록하고 있는 글로서 吳德溪, 盧欽, 門人 李三誡, 李克愼, 林彦卿 등이 썼다.
이에 따르면 선생은 바탕이 총명하고 근면하여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
孝廉으로 스스로를 기약하여 시를 쓰기도 하였으며, 부모님이 아플 때에는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를 충실히 하였으며, 제사 지낼 때에는 한 겨울에도 손수 물고기를 잡아오고, 자신의 회갑연에서조차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효도를 다 못한 것을 애통해할 정도로 효성스러웠다.
본디 벼슬을 구하지 않았고, 63세에 延豊현감에 제수되어 취임하기는 하였지만 3개월만에 사직하고 은거하였으며, 세상사람들이 명예에만 급급한 것을 보고 자손들에게 학자는 爲己之學을 해야지 爲人之學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칠 정도로 修身하는 선비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알고는 비분강개하여 ‘영남이 충의의 고장인데 한 사람도 倡義하는 이가 없다’고 탄식하다가 뒤에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전에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구나’라고 찬탄하는 데서 보듯이 나라에 매우 충성스러웠다.
行狀-幷序(6) : 1859년. 李秉烈이 지은 효렴재의 행장. 먼저 공의 후손 榮培의 요청으로 후손들에게 선조의 행적을 알리기 위하여 행장을 쓰게 되었음을 밝히고 이어서 행장을 붙이고 있다.
행장의 내용은, 먼저 공의 휘는 擎柱이고 자는 石楚이며, 효렴산 아래에 살았기 때문에 호를 효렴재라 하였다는 것과, 신라 佐命功臣 謁平의 후예이며, 八世祖 世基는 고려 密直副使大提學檢校政丞으로서 시호가 文僖라는 것을 비롯하여, 공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벼슬과 공의 부친이 掌樂院正이었다가 연산군 때에 다시 벼슬할 뜻이 없어 영남으로 내려와 山陰의 月峴에 정착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후로는 공의 일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1500년 9월 23일에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기상이 드높아 8세에 ≪삼강행실≫, ≪효경≫등의 책에 통하였으며, 10세에 이르러 필력이 웅건하여 동네에서 경탄하였고, 일찍부터 효렴에 뜻을 두었다는 것 등 언행록에 보이는 사항들이 그대로 실려 있다.
그리고 1597년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하면서 장례를 검소하게 지낼 것을 후손들에게 당부하고, ‘孝友眞實’ 네 글자를 적어 아들 삼택에게 주었다는 것, 세상을 떠난 날 홀연히 큰 바람이 불어 서까래만한 대나무들이 다 부러지니 당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는 것,
鐵水谷에 장사지냈으니 효렴산의 오른쪽 기슭이라는 것을 덧붙이고 있으며, 부인은 和順 崔氏로써 안으로 규범이 있어, 공이 朔望으로 家廟에 참례할 때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술과 과일을 새것으로 올리기를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난 뒤, 마지막으로 ≪시경≫의 ‘孝子는 다함이 없으니, 오래도록 효자가 나오리라’고 한 말을 들어 효렴공의 자손들이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又(10) : 유후조[柳厚祚(1798-1876)]가 지은 이경주(李擎柱)의 행장(行狀). 공의 諱와 字, 齋號 등을 먼저 밝히고, 선조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 공의 생애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이병열이 지은 행장과 거의 같다.
다만 중간중간에 어느때 어떤 글을 지었다는 것을 밝히고, 말미에 공의 자손들을 열거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마지막에는 공의 십대손 안팔, 안찬이 공의 ‘언행록’과 ‘묘갈명’을 들고와서 행장을 요청하매 완곡하게 사양하다가, 안찬공이 거듭 요청하여 짓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墓碣銘-幷序 (14) : 집안 사람인 파서(琶西) 이집두[李集斗 : 1744(영조 20)-1820(순조 20)]가 지은 묘갈명에. 효렴공은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나서 공에 대하여 적고 있는데 내용은 행장과 거의 같다. 말미에 자손들을 길게 열거하고 있으며, 후손 奇一의 요청으로 짓게 되었음을 밝힌 다음 銘을 붙이고 있다.
奉安文(18) : 1836년 이경주를 평천사(平川祠)에 봉안하는 글.
常享祝文(19) : 유태좌[柳台佐=1763-1837]가 지은 축문.
孝廉齋先生遺集跋(跋1) : 1859년. 李源祚(1791-1871)가 지은 발. 공은 효렴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다 갔으니 참으로 도가 있는 선비라고 칭송하고 있으며, 공의 십대후손 顔八과 顔燦이 부탁하여 짓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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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齋先生文集續集卷之九 - 정재 유치명
孝廉齋李公遺集序 (효렴재이공유집서)
我朝明宣之際。羣賢輩出。講明斯學。高識卓行。在人耳目。然或有喜於自得而無所資。讀其遺文。不能無餘恨焉。若孝廉齋李公諱擎柱。亦杜門硏究者也。攷之當時。無師友之益。稱之後世。無傳授之實。抵今數百載。文字亦甚寂寥。今其所著靈臺主人箴。或涉太丁寧。而意亦篤至矣。大學八條贊。醇乎無可議也。且其與吳德溪講論及指喩學者五箇條目。與夫尋常遇境寄意者。見造理之深。在當日鮮有能臻斯域者。柰何其懷藏已甚。而無所資於人與己也。公世卿之家也。亦嘗起家紆郡紱。而三朔爲治。旋賦遂初。以永閒中日月九十有八歲。豈其無所作爲。以勞其心思而弊其精神者耶。純廟壬辰。多士享公于平川祠。所謂秉彝之好。久而不泯者也。後孫顔八,顔燦等。越五百里。示以遺稿。且徵序文。顧藐然何敢當。特有感於公之篤於闇然而不求知也。忘其僭猥。而書之如此云爾。
柳致明(1777-1861)이 쓴 서문이다. 明宗 宣祖 年間에 많은 현인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스스로 닦는 데에만 힘쓸 뿐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효렴재공도 그 가운데 하나라는 것과, 일찍이 退溪 문하에서 배운 일도 없고 그 문하생들과 교류한 적도 없지만 이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그러하였을 뿐, 지향하는 학문은 같았다는 것이 <靈臺主人箴>, <大學八條贊> 등의 글에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1832년에 많은 선비들이 공을 平川祠에 봉안하였으니, ‘떳떳한 도리를 잘 지키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 등이 실려있다. 또한 공의 후손인 顔八, 顔燦의 요청으로 서문을 쓰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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