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안축 묘지명(安軸墓誌銘) - 이곡(李穀)

야촌(1) 2011. 2. 27. 14:42

대원 고 장사랑 요양로개주판관 고려국 삼중대광흥령부원군 영예문관사 시문정 안공묘지명

(大元 故 將仕郎 遼陽路盖州判官 高麗國 三重大匡興寧府院君 領藝文館事 謚文貞 安公墓誌銘)

[생졸년] 안축『安軸, 1282년(충렬왕 8) ~ 1348년(충목왕 4)』 / 향년 66歲


내(묘지 찬자인 李穀)가 원나라 수도에 있을 때 근재(謹齋 : 안축)가 앓아누웠다는 소문을 듣고 돌아와서 문병을 하였다.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며, 그 아들 종원(宗源)을 가르키면서, “자네가 만일 나를 생각한다면 우리 아들을 잊지 말게” 하였다.

 

또 묘지명을 부탁하면서, “내 평생에 아무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내가 네 번이나 법관이 되어 무릇 백성들이 강제로 노비가 된 것을 반드시 다스려 양인으로 한 것은 기억할 만한 일이네” 하였다. 내가 듣고 슬퍼하면서도, “병은 다 낫지 않겠습니까. 말씀이 어찌 이렇게 급합니까” 하였다. 

 

아, (공은) 천명을 미리 아는 군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시어 장차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공의 아우인 보(輔)는 나와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동년(同年)인데,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아, 내가 일찍이 공에게 수업하였으며, 공이 또한 직접 명령하였는데 감히 사양할 것인가.


공의 이름은 축(軸), 자는 당지(當之)이니 복주 흥령(福州 興寧 : 지금의 경북 풍기지역) 사람이다. 

증조부는 득재(得財)이며, 조부는 희서(希諝)이다. 모두 이곳의 호장(戶長)을 하였다. 

 

부친 석(碩)은 급제하였으나 은거하면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관직은) 모두 추증된 것이다. 

모친은 흥령군대부인 안씨(興寧郡大夫人 安氏)로, 같은 고을 사람인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인 성기(成器)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이 뛰어났고, 독서할 줄 알면서 힘써 배우고 문장을 잘 지었다. 성균시에 합격하고, 진사 시험에 뽑혀 금주사록(金州司錄)에 임명되었고, 예문춘추관 검열수찬(藝文春秋館 檢閱修撰)에 뽑혔다. 다시 향시(鄕試 : 원나라 과거인 鄕試-會試-殿試의 제1단계 시험)에 합격하여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었다.

 

계해년(충숙왕 10, 1323) 또 향시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 갑자년(충숙왕 11, 1324) 원나라 수도에서 정대(廷對 : 원나라 황제가 친히 뽑는 殿試임)에 제3갑 7명으로 뽑혀, 황제의 명령으로 개주판관(盖州判官)에 임명되었다. 

 

그때 충숙왕이 원나라 수도에 머물러 있은지 4년이었다. 

공이 동지들에게 “임금의 근심은 신하의 욕이며,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배운 것은 이러하다” 하면서, 상서하여 왕의 죄 없음을 호소하였다. 왕이 매우 아름답게 여겨 성균악정(成均樂正)으로 승진시켰다. 개주의 태수가 사람을 보내 예로 청하였으나, 왕은 (공을) 장차 등용시킬 생각이 있어, 공은 본국을 떠나 임지에 가지 못하였다. 

 

악정에서 전법 판도 군부 전리(典法 版圖 軍簿 典理)의 네 총랑(摠郞)으로 전직하였다가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영전하였다. 영릉(永陵 : 충혜왕) 재위때 강릉도(江陵道)를 다스렸다. 이 때를 기록한 문집이 『광동와주(關東瓦注)』이다. 

다시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 임명되었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충혜왕의 총애를 받은 자는 모두 쫓겨났다. 

 

어떤 사람이 공을 쫓겨난 자와 친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 직에서 파면되었다. 

사람들은 “얻은 것은 자신 때문이고, 잃은 것은 친한 사람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전법판서에 기용되었다가 뒤에 또 내수(內竪 : 내시) 가운데 세도하는 자의 비위를 거슬려 파직당하였다. 영릉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가 되었고, 과거고신관인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금의 판밀직사사 이공수(判密直司事 李公遂) 등 33명을 뽑았다. 사람들은 훌륭한 선비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판서에서 감찰대부로 전직하였는데, 악정 이상으로 있을 때는 관직(館職)을 항상 겸하였다. 

비록 헌사(憲司)의 장으로 있으면서도 그러했다. 외교문서와 각종 문장이 공의 손에서 나왔다. 

 

계미년(충혜왕 복위4, 1343)에 검교평리(檢校評理)로 상주(尙州)목사가 되었다. 

상주는 복주(福州)와 접경하여 있고, 대부인이 고향에 있어서 왕래 문안하면서 효도를 다하였다.

 

갑신년(충목왕 즉위, 1344) 봄 왕이 새 정치를 하는데 먼저 정승될 사람을 의논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소환되었다가, 조금 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의 직이 더해졌다. 또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贊成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의 직이 더해졌다.


정해년(충목왕 3, 1347) 가을 병이 났으며, 흥령군(興寧君)에 임명되었다. 대개 권력을 쥔 자들이 우리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 해 겨울 공론이 떠들석하게 일어나자 처음대로 복직하였다. 

 

무자년(충목왕 4, 1348) 봄 병이 다시 나서 은퇴하기를 청하였다. 여름 6월 초하루에 다시 흥녕군으로 임명하고, 관계도 개부(開府)로 올려졌다. 21일 부음이 알려지자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조상하게 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백관이 모여서 장사를 지내니 한 생애가 모자람이 없다고 할 만 하다. 7월 11일에 대덕산에 장사지냈다. 향년 67세이다. 부인은 감천군부인 문씨(甘泉郡夫人 文氏)이며,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구(龜)의 딸로서 2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 종기(宗基)는 보마배행수별장(寶馬陪行首別將)으로 먼저 죽었다. 다음 아들 종원(宗源)은 급제하여 현재 유비창부사(有備倉副使)이다. 딸은 별장 정양생(鄭良生)에게 출가하였다. 두 아우가 있다. 보(輔)는 급제하였고, 원나라의 을유년(충목왕 1, 1345)의 과거에 합격하여 요양성조마(照磨)에 임명되었다. 

 

부모를 모시려 귀국하였고, 현재 우대언(右代言)이다. 집(輯)은 급제하여 현재 성균제주(成均祭酒)이다. 공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공이 두 아우들을 가르치는데 자기 소생이나 다름없이 하였다. 

 

성인이 되자 두 아우는 공을 섬기기를 아버지같이 하였다. 본국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그 어머니는 종신토록 나라에서 녹을 주도록 되어 있다. 공은 두 아우와 함께 이미 급제하였고, 또 가운데 동생과 함께 원나라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실로 세상에서 드문 일이다.

 

공의 가르치고 기른 힘이다. 공은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집을 다스리기를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 발언할 때에는 명확하게 하여 꾸며대는 말이 없었다.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일하고 게으른 기색이 없으며, 착한 이를 보면 칭찬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칭찬이 많았고, 나쁜 이를 보면 피하며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이 적었다. 

 

스스로 거처하는 데를 근재(謹齋)라고 하였으니, 그 뜻을 알 만하다.
명하기를,


장수하지 아니했다 하랴, 나이가 7순에 가까웠고,
귀하지 아니 했다 하랴, 지위가 여러 봉군 중의 으뜸이었네.


아우 있고 자식이 있으며, 덕도 있고 칭찬도 있으니,
나의 묘지명의 글이 과장이 아니라 공의 봉분 그대로이네.

 

출전 : 가정집 제11권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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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元故將仕郞,遼陽路盖州判官。高麗國三重大匡,興寧府院君,領藝文館事。謚文貞安公墓誌銘。

 

이곡(李穀) 撰

 

余在京師。聞謹齋病。旣歸問疾。見余則潸然曰。吾不可久於斯世矣。指其子宗源曰。子如吾思。無忘吾兒。且以墓誌屬之曰。吾平生無可稱。吾四爲士師。凡民之屈抑奴人者。必理而良之。此其可記者也。余聞之悲。而姑復之曰。病豈皆不愈。言何遽如此。嗚呼。可謂知命君子矣。旣卒將葬。其弟輔與余同年。以公行狀來乞銘。嗚呼。余甞受業於公。而公又親命之。敢以辭爲。公諱軸。字當之。福州興寧人。曾祖得財。祖希諝。俱爲本郡戶長。考碩。及第。遂隱不仕。以故皆贈官。妣興寧郡太夫人安氏。同郡人檢校軍器監成器之子。公生而穎悟。知讀書。力學工文辭。中成均試。擢進士第。調金州司錄。選藝文,春秋館檢閱,修撰。再中鄕試。拜司憲糾正。癸亥。又中鄕試第一名。甲子。會試京師廷對。第第三甲七人。勑授盖州判官。時忠肅王被留輦轂四年矣。公謂同志曰。主憂臣辱。主辱臣死。吾曹之學如此。乃上書訟王之無它。王甚嘉之。超拜成均樂正。盖州守遣人禮請。王方嚮用。故不能去國之任。由樂正轉典法,版圖,軍簿,典理四捴郞。遷右司議大夫。永陵莅位。命存撫江陵道。有文集曰關東瓦注。再拜判典校知典法事。忠肅王復位。凡得幸於永陵者皆斥之。或以公爲所斥者之親。褫其職。時人語曰。得之自身。失則由親。旣而起爲典法判書。俄又忤內竪之用事者見罷。永陵復位。復起判書典法。同知貢擧。取今判密直司事李公遂等三十三人。時稱得士。由判書轉監察大夫。樂正以上常兼館職。雖長憲司。猶帶之。表牋詞命多出其手。癸未。以檢校評理出牧尙州。尙與福接境。而太夫人在桑梓。往來起居。以盡孝道。甲申春。王新政。首論相。召副使密直。尋陞政堂文學。明年。加僉議評理。又加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丁亥秋。遘疾。除興寧君。盖執事者不喜吾儒。故有是命。其冬。衆論紛騰。復職如初。戊子春。疾復作。乃乞致事。夏六月朔。復除興寧君。進階開府。至二十一日。訃聞。王命有司。予贈以禮。謚曰文貞。百官會葬。哀榮終始。可謂無缺矣。以七月十一日。窆于大德山。享年六十七。媲甘泉郡夫人文氏。檢校軍器監龜之女。生二男一女。長宗基。寶馬陪行首別將。先歿。次宗源。及第。今爲有備倉副使。女適別將鄭良生。有二弟。輔。及第。中京師乙酉科。除遼陽省照磨。因覲省歸國。今爲右代言。輯。及第。今爲成均祭酒。先公早世。公敎二弟。無異己生。以至成人。故其弟之事公如事父云。本國之制。三子登科。廩其母終身。公與二弟旣登第矣。又與其仲俱中皇朝甲第。實世所稀。而亦公敎養之力也。公處心公正。持家勤儉。發言便便無遁詞。居官矻矻無倦色。見善則稱之不已。故多譽。見惡則避之不近。故寡怨。自號所居曰謹齋。其志可見已。銘曰。

謂非壽耶。年薄七旬。謂非貴耶。位冠諸君。有弟有子。有德有言。我銘不諛。維公之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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