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 군자감 판관 윤후 묘갈명 병서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이사균 찬.
급모 김노 서.
군(君)의 휘(諱)는 은(訔)이요. 자는 화중(和仲)이니 남원 대성이다. 함길도도관찰출척사(咸吉道都觀察黜陟使)로청백(淸白)함으로써 이름을 나타낸 이는 휘(諱) 임(臨)이니 선공감지득(繕工監之得)을 낳았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곧 군(君)의 아버지다.
공조전서(工曹典書) 기면(奇勉)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니 기(奇)씨 또한 이름난 씨족이다.
부인은 집안을 다스림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가훈(家訓)을 잘 지켜 그러 했던 것이다.
군(君)이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장성 하매 능히 스승에게 취학하여 경전(經傳)을 통달하고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연달아 뜻을 얻지 못하다가 만년(晩年)에 음사(蔭仕)로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從六品)에 제수(除授)되고 뒤에 금화사 제검(禁火司提檢-從四品)에 제수(除授)되고,옥과현감(玉果縣監-從六品)으로 옮겨졌으나, 임관 한지 얼마 안 되어 질병(疾病)으로 사직하였고 ,조금 있다 다시 벼슬하여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從六品), 사축서사축(司蓄暑司畜-從六品)을 역임하고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從五品)으로 벼슬을 마치었다.
작은 벼슬에도 게을리 아니하고 미세한 일도 소홀히 아니하여 三十餘年을 근신하였으며 이로써 가범을 삼아서 자손에게 남겨 주었다. 향년 82歲로 1528년(중종 23) 11월 27일에 졸(卒)하였다. 사람들은 군(君)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건강함을 보고 오히려 더 장수(長壽)하지 못함을 한하였다.
군(君)의 아내는 곧 지승문원사 (知承文院事) 조원희(趙元禧)의 따님이요. 승정원지신사(承政院知申事) 서노(瑞老)의 손녀로 부도를 겸비하여 일가와 친척이 그 행실에 탄복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 착함을 칭찬하였다. 나이 七十六에 먼저 병으로 돌아가니 즉 갑신(甲申) 1524년(중종 20)이다.
김포 임촌(林村)리에 장사 지냈다가, 기축(己丑) 1529年二月 여기에 이장(移葬)하니 유언에 따른 것이다.
네 아들을 낳으니 맏이는 시영(時英)인데 갑자(甲子) 1504년(연산군 10) 과거에 합격하여 현재 군자감 정(軍資監正-正三品)이 되었고, 다음은 시웅(時雄)인데 봉직랑(奉直郞-從五品)이요,
다음은 시호(時豪)인데 병자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正六品)에 이르렀으나, 요절 하였으며, 다음은 시걸(時傑)인데 경진년(庚辰) 1520년(중종 15)에 과거에 합격하여 현재 형조 정랑(刑曹正郞-正五品)이 되었다.
딸은 셋인데 맏이는 학자(學者) 유종범(柳宗蕃)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습독관(習讀官) 박현령(朴玄齡)에게 출가하여 조졸하였고, 다음은 생원(生員) 김장(金璋)에게 출가하였다. 내 외손자및 증손이 삼십 여명인데 아들과 사위의 앞길이 아직 상원(尙遠 : 요원함)하여 성취함이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군(君)의 남은 경사가 없어지지 않음을 알 것이다.
명(銘)에 이르되,
모습이 고아(古雅)하고, 마음이 옛 사람과 같아서 집안에선 순리를 좇고, 관직에선 보필함이 있었네.
굳셈[剛牣:강인]이 마음속에 가득차서 법도를 넘지 않았고, 아이들의 가르침에 엄숙하되, 또한 노여움을 품지 않았네.
과거에 급제한 세아들은 문호(門戶)를 영광스럽게 빛냈고, 자식들이 제사하여 보답함은 모두가 부모의 은덕이라네.
嘉靖 1537년(중종 32) 五月 日 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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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軍資監判官尹侯墓碣銘 幷序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義禁府事 李思鈞 撰. 及茅 金魯 書
君諱訔字和仲南原大姓也咸吉道都觀察黜陟使以淸白行於世者曰臨生繕工監奉事之得早世卽君之考妻以工曹典書奇勉之女奇亦望族也內治無違得家訓者然也君少孤長能就師通經傳應擧連不得志晩用蔭仕除銀溪道察訪後授禁火司提檢轉玉果縣監莅不久以疾辭旋復仕歷司䆃寺主簿司畜署司畜終於軍資監判官不懈小官不忽細事恪謹三十餘年以此爲家範遺子孫享年八十二歲嘉靖戊子十一月二十七日以微恙不諱人見君愈老愈健猶恨其不克壽君之內卽知承文院事趙元禧之女承政院知申事瑞老之孫婦道備至宗戚服其行里閭稱其善年七十六病先逝盖甲申歲也葬于金浦林村里己丑二月窆于此用治命也有四子長曰時英中甲子第時爲軍資監正次曰時雄奉直郞次曰時豪中丙子第官至成均典籍而夭次曰時傑中庚辰第時爲刑曹正郞女三人長適柳宗蕃學者也次適習讀官朴玄齡先歿次適生員金璋內外孫若曾孫三十餘子婿之途尙遠所就必不止此君之餘慶知未艾也
銘曰貌之古心人古內理順車有輔剛牣中不越矩敎兒肅亦匪怒三乘龍禁瑛戶子食報莫非父. <끝>
嘉靖十六年五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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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인소개]
이사균[李思鈞 : 1471(성종2)~1536(중종31)]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자(字)는 중경(重卿). 호는 눌헌(訥軒). 시호는 문강(文剛). 경상도 관찰사 이희(李暿)의 증손자요, 조부(祖父)는 계반(繼潘), 아버지는 판관(判官) 식(湜)으로. 출생지와 거주지는 미상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承文院 權知)로 들어갔다가 2년 뒤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正九品)에 제수 되었다. 이어 저작(著作-正八品)을 거쳐 1503년(연산군 9) 부수찬(副修撰-從六品)으로 승진 하였으나,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추숭(追崇)에 소극적이였다는 이유로 보은(報恩)으로 유배 되었다가 곧 곤양(昆陽)으로 옮겨졌다.
그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부수찬으로 복직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正五品) · 이조 정랑(吏曹正郞-正五品) · 부응교(副應敎-從四品) · 집의(執義-從三品) 등의 관직을 지낸 뒤, 1510년(중종 5) 동부승지(同副承旨-正三品)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여러 승지직을 두루 지내고 1513년에 이르러 도승지에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체직되어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3년 뒤에는 공조 및 형조의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從二品)가 되어 왕비 책봉을 위한 주청사(奏請使)의 부사(副使)로 뽑혀 명(明)에 다녀왔다.
중종 1518년(중종 13)에는 전주 부윤(全州府尹-從二品)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특지(特旨)로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副提學-正三品)에 제수되었다. 이후 함경도(咸鏡道). 전라도(全羅道) · 충청도(忠淸道)의 관찰사(觀察使-從二品)와 형조(刑曹) 및 이조(吏曹)의 참판(參判-從二品)을 역임하고 중종 24년(1529) 8월에 왕의 특명을 받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이 되었으나 한달만에 체직되었다.
그 사이 1522년(중종 17년) 명(明) 황태후의 책봉에 즈음하여 진하사(進賀使)로 선발되어 다시 명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32년(중종 27년)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에 오른 뒤 이듬해에는 병조(兵曹) 및 호조(戶曹) 의 판서(判書-正二品를 역임하고 참찬(參贊)이 되어 나세찬(羅世纘)을 구하려다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從二品)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536년(중종 31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에 다시 제수되어 돌아왔고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正二品)로 자리를 옮겨 타계하였다. 문무를 겸비하였고 기개가 있었으며, 뜻이 굳어 적지 않은 비방이 있기도 하였으나, 많은 사대부들로 부터 칭송을 받았다.
토목공사를 좋아하여 건축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민폐를 끼치기도 하였다. 한편 성품이 방탕하고 익살스러우며 조심성이 없었다는 사평(史評)이 있기도 하다. 시호는 문강(文剛)이며, 문집(文集)으로는 《눌헌집(訥軒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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