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우리나라 문(文) - 사대(事大)하는 표(表)와 소(疏)를 이웃 나라에게 준 서(書)

야촌(1) 2011. 6. 8. 21:14

해동역사 제52권 >예문지(藝文志)11>

 

백제(百濟)의 개로왕(蓋鹵王)이 송(宋)나라 효무제(孝武帝)에게 올린 표문(表文).

    대명(大明) 2년(458, 개로왕 4)

 

신의 나라는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고 문무(文武)의 훌륭한 신하들이 대대로 조정의 관작을 받았습니다. 행 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등 11인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가엾게 여기시어 모두에게 관작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송서(宋書)》

 

백제의 개로왕이 후위(後魏)의 효문제(孝文帝)에게 올린 표문.

    연흥(延興) 2년(472, 개로왕 18)에 개로왕이 표문을 올려 군사를 보내 주어 고구려를 정벌하기를 요청하자, 위나라 효문제가 너그러운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조서는 중국문조(中國文條)에 나온다.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는데 승냥이와 이리에 의해 길이 막히었는바,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신(藩臣)으로서의 예를 받들 길이 없습니다. 이에 천자의 궁궐을 우러르면서 달려가는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소슬한 바람이 살랑살랑 일어나는 이때 황제 폐하께서는 시절의 변화에 잘 조화를 이루시는지요.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삼가 제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여례(餘禮),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장무(張茂) 등을 파견하여, 파도에 배를 몰아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하늘에 운명을 내맡기고 가서 만분의 일이나마 조그마한 정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귀신의 감응이 내리고 황제의 위령이 크게 감싸 주어 폐하의 대궐에 도착하여 신의 뜻이 펴지게 하소서. 그러면 비록 아침에 그 말을 듣고서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영원히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함께 그 근원이 부여(扶餘)에서 나왔으므로 선대(先代)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인 고쇠(高釗)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가볍게 깨뜨리고는 많은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할아버지인 수(須)가 군사를 정돈하고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틈타 질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간 지 잠깐 사이에 고쇠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씨(馮氏)의 국운이 다하여 그 유민(遺民)이 고구려로 도망하여 온 뒤로부터는 추악한 무리가 점점 강성해져서 끝내는 침략과 위협을 가하였습니다. 이에 원한이 얽히고 전화(戰禍)가 연이은 지가 30여 년이나 되어 재물도 다 떨어지고 힘도 다 떨어져서 자꾸만 쇠잔해지고 있습니다.

 

만약 천자의 인자함으로 곡진히 돌보아 주심이 먼 곳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속히 장수 한 사람을 파견하여 신의 나라를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後宮)에서 청소하게 하겠으며, 아울러 자제(子弟)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고구려는 고련(高璉)의 죄악으로 인하여 나라는 저절로 엉망이 되고 대신(大臣)과 호족(豪族)들은 죽임을 당함이 끝이 없는바, 죄악이 가득히 쌓여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는 멸망의 시기이며 손을 쓸 시기입니다.

 

또 풍 씨 일족의 사람과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을 품고 있으며, 낙랑(樂浪)의 여러 군(郡)은 여우가 제 살던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위엄을 한번 떨치시기만 한다면, 정벌만 있고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명민하지는 못하지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마땅히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르침을 받아 호응하겠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을 저지르고 속임수를 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隗囂)가 번병(藩屛)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들을 지껄이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어 저돌적인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유씨(劉氏)와 통호하기도 하고, 북쪽으로 유유(蠕蠕)와 맹약을 맺어,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폐하의 경략(經略)을 능멸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요(堯) 임금은 더없이 어진 성군(聖君)이었지만 남만(南蠻)을 단수(丹水)에서 쳐서 벌하였고, 맹상군(孟嘗君)은 어질다고 소문난 사람이지만 길에서 비웃는 말을 모른 체하지 않았습니다. 한 방울씩 새어 나오는 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일찍 막아야 하는 법으로, 지금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뒷날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440, 비유왕 14) 이후에 신의 나라 서쪽 국경에 있는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의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고 아울러 옷과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고구려의 물건들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이는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뱀처럼 흉악한 것들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이라고 하는바, 비록 확실히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옛날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때 송(宋)나라에서 신주(申舟)를 살해하자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맨발로 뛰쳐나갔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덮치자 신릉군(信陵君)은 끼니를 굶었습니다. 적을 이겨 명예를 드높이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일입니다.

 

저 외진 조그마한 나라에서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더구나 폐하께서는 기운은 하늘과 땅에 합하고 형세는 산하(山河)를 기울일 만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더벅머리 어린아이가 폐하께서 가시는 길을 걸터앉아 가로막게 하십니까. 

이제 주워 온 안장하나를 올리니 이것으로 그 사실을 징험하시기 바랍니다. 

《후위서(後魏書)》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남제(南齊)의 무제(武帝)에게 올린 표문 2수(二首).

    영명(永明) 8년(490, 동성왕12)에 왕이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저근(姐瑾) 등에게 정직(正職)을 제수해 주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원문 빠짐

공(功)에 대하여 보답하고 노고를 위로하는 것은 실로 그 명성과 공업(功業)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가행(假行) 영삭장군(寧朔將軍) 신(臣) 저근(姐瑾) 등 4명은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환란을 쓸어 없앴으니, 그 용맹함과 과감함은 명장의 등급에 들 만한바, 나라의 간성(干城)으로서 사직(社稷)의 튼튼한 울타리라고 할 만합니다.

 

그들의 노고를 헤아리고 공을 논하자면 환히 드러나는 지위에 있어야 마땅하겠으므로, 지금 전례에 따라 외람되이 임시로 행직(行職)을 주었습니다. 삼가 은혜를 베푸시어 임시로 내린 관직을 정식으로 인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 저근은 시무(時務)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 또한 뛰어났기에, 지금 가행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 도한왕(都漢王)으로 삼았습니다.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는 약관(弱冠)의 나이로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진작에 드러났기에, 지금 가행 영삭장군 아착왕(阿錯王)으로 삼았습니다. 

 

건위장군 여력(餘歷)은 본성이 충성스럽고 정성스러워 문무가 모두 두드러졌기에, 지금 가행 용양장군(龍驤將軍) 매로왕(邁盧王)으로 삼았습니다.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는 시무에 공로가 있고 국정을 빛내고 드날렸기에, 지금 가행 건위장군 불사후(弗斯侯)로 삼았습니다. 

 

신이 파견한 행 건위장군(行建威將軍) 광양태수 겸 장사(廣陽太守兼長史) 신 고달(高達)과 행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朝鮮太守兼司馬) 신 양무(楊茂)와 행 선위장군(宣威將軍) 겸참군(兼參軍) 신 회매(會邁) 등 3인은 지조와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과 정성이 일찍부터 드러났습니다.

 

지난 태시(泰始) 연간에는 나란히 송조(宋朝)에 사신으로 갔었고, 지금은 신의 사신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 지극한 공로를 따져 보면 벼슬이 올라가야 마땅하겠기에 전례에 따라서 각각 가행직(假行職)을 제수하였습니다.

 

천자의 은혜는 신령스럽고 아름다워 만리 밖에서도 바라보는 바인데, 하물며 몸소 천자의 뜰을 밟으면서 은혜를 입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특별히 살피시어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달은 변경에서의 공적이 일찍부터 뚜렷하였고 공무에 부지런히 종사하였으므로 지금 가행(假行)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로 삼았습니다.

 

양무는 지조와 행실이 맑고 한결같으며 공무를 폐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가행 건위장군(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로 삼았습니다. 회매는 생각이 찬찬하고 빈틈이 없어서 여러 차례 성과를 드러내었으므로 지금 가행 광무장군(廣武將軍) 청하태수(淸河太守)로 삼았습니다. 

《이상은 모두 남제서(南齊書)》

 

백제의 동성왕이 남제의 명제(明帝)에게 올린 표문 2수(二首).

    건무(建武) 2년(495, 동성왕17)에 왕이 표문을 올려서 사법명(沙法名) 등에게 정식 관직을 제수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신이 예전에 봉작을 받은 이래로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었고, 절부(節符)와 부월(斧鉞)을 받아 모든 변방을 평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앞서 저근(姐瑾) 등이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받아 신민(臣民)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오년(490, 동성왕 12)에는 험윤(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적을 토벌하게 하여 밤중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을 하니, 흉리(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이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추격하여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그들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계책이니, 그 공훈을 따져 보면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을 행 정로장군 매라왕(行征虜將軍邁羅王)으로 삼고, 찬수류(贊首流)를 행 안국장군 벽중왕(行安國將軍辟中王)으로 삼고, 해예곤(解禮昆)을 행 무위장군 불중후(行武威將軍弗中侯)로 삼았습니다. 목간나(木干那)는 지난날에 군공(軍功)이 있는데다가 또 성문과 배를 때려 부수었으므로 행 광위장군 면중후(行廣威將軍面中侯)로 삼았습니다.

 

삼가 하늘같은 은혜를 베푸시어 특별히 관직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 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 신 모유(慕遺), 행 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 신 왕무(王茂),茂겸참군 행 진무장군 조선태수(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 신 장색(張塞), 행 양무장군(行揚武將軍) 진명(陳明)은 관직을 맡고 있으면서 사사로움을 잊었고 오직 공무에만 힘썼으며,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신의 사신으로 가는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가 그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들의 관작을 올려 주어야 마땅하겠기에 각각 가행직(假行職)에 임명하였습니다. 삼가 성조(聖朝)에서는 특별히 정식 관직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모두 상동(上仝)》

 

신라(新羅)의 성덕왕(聖德王)이 당(唐)나라 현종(玄宗)에게 진봉(進奉)하면서 올린 표문.

     개원(開元) 11년(723, 성덕왕22)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과하마(果下馬), 우황(牛黃), 인삼(人葠), 두발(頭髮), 주(紬), 누응령(鏤鷹鈴), 해표피(海豹皮), 금(金), 은(銀) 등을 바치면서 표문을 올렸다.

 

신은 바다 모퉁이에 살고 있어 지역이 아주 멀고 궁벽진 탓에 본디 천객(泉客)의 진귀한 보배도 없으며, 객상(客商)들의 물화도 부족합니다. 이에 감히 토산물을 가지고 황제의 이목을 더럽히고 노둔한 재주를 가지고 황제의 조정을 추하게 하였으니, 마치 연(燕) 땅의 돼지나 초(楚) 땅의 닭과 비슷하여, 얼굴이 붉어짐을 깊이 깨닫고 몸이 떨려옴만 더할 뿐입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신라의 성덕왕이 당나라 현종에게 사은(謝恩)하면서 올린 표문.

    개원 21년(733, 성덕왕32)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 조회하였다. 앞서 황제가 왕에게 백앵무(白鸚鵡), 자라수포(紫羅繡袍), 금은전기물(金銀鈿器物), 서문금(瑞文錦), 오색채라(五色綵羅)를 하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 법을 쥐고 나라를 열자 문(文)은 성스러웠고 무(武)는 신묘하였으므로, 천년의 창성한 운에 응하고 만물의 아름다운 상서를 이루었습니다. 이에 풍운(風雲)이 통하는 곳마다 모두 지극한 덕화(德化)를 받고, 일월(日月)이 비치는 곳마다 함께 깊은 인덕(仁德)을 입었습니다. 

 

신이 사는 곳은 봉호(蓬壺)로 격해 있는데도 황제의 은혜가 멀리까지 널리 미쳤으며, 우리가 중국을 외면하여도 어진 은택이 먼 데까지 미치었습니다. 조서(詔書)를 엎드려서 읽고 옥갑(玉匣)을 꿇어앉아 여니, 구천(九天)의 우로(雨露)를 머금고 있었고, 오채(五彩)의 봉새와 난새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하사해 주신 영금(靈禽)을 보니 희고 푸른 두 마리의 앵무새였는데, 장안(長安)의 음악을 노래하기도 하고, 성주(聖主)의 은혜를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단의 채색과 금은의 그릇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이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정성을 바친 공의 근원을 따져 보면 실로 선조(先祖)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이런 비상한 은총을 내리시어 말손(末孫)에게까지 미치게 하셨습니다. 저의 하찮은 충성심은 티끌처럼 가벼운데, 황제의 무거운 은혜는 산처럼 큽니다. 저의 분수를 헤아려 보건대 무엇으로써 우러러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상동》

 

신라의 성덕왕이 당나라 현종에게 사은(謝恩)하면서 올린 표문]

    개원 24년(736, 성덕왕35)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신년을 하례하고 표문을 바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패강(浿江) 이남의 지역을 하사하였다.

 

삼가 은혜로운 칙서를 받들건대, 패강 이남의 지역을 하사해 주셨습니다. 신은 바다 모퉁이에 살고 있으면서 성조(聖朝)의 덕화(德化)를 입었는데, 비록 충성을 바치기로 마음먹었으나 공은 이루지 못하였고, 충정을 바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나 공로는 상을 받을 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우로(雨露)와 같은 은혜를 내리고 일월(日月)과 같은 조서를 내리시어, 신에게 땅을 하사해 주어 신의 나라를 넓혀 주셨습니다. 이에 드디어 땅을 개간하기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고, 농상(農桑)을 일삼으면서 제 살 곳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이 조서를 받들건대, 큰 영총(榮寵)을 입었는바, 이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더라도 우러러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상동》

 

정안국(定安國)의 왕이 송나라 태종(太宗)에게 올리는 표문.

     태평흥국(太平興國) 6년(981)

 

정안국왕 신 오현명(烏玄明)은 말씀드립니다. 삼가 성주(聖主)께서는 천지와도 같은 은혜를 두루 미치며 오랑캐의 풍속을 가진 나라까지 어루만져 주시니, 신 현명은 참으로 기뻐 손뼉을 치면서 머리를 조아려 재배(再拜)합니다.

 

신은 본디 고구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渤海)의 유민으로서, 한쪽 귀퉁이에 웅거하여 여러 해를 지내 오는 동안 고르게 베푸시는 큰 은덕을 우러르고 한량없이 적셔 주시는 큰 은택을 입어, 저마다 제 살 곳을 얻어 본성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거란(契丹)이 강포함을 믿고 국토를 침입하여 성을 공격해 부수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신의 조고(祖考)는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난리를 피하여 다른 지역으로 가서 가까스로 백성들을 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또 부여부(扶餘府)가 일전에 거란을 배반하고 모두 본국으로 귀속하였으니, 앞으로 닥칠 재화(灾禍)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천조(天朝)의 밀서(密書)대로 승병(勝兵)을 거느리고 가서 거란을 토벌하는 것을 도와 기필코 원수를 갚을 것이며, 절대로 명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신 현명은 진실로 정성을 다하여 기원하면서 머리 조아려 재배합니다.원흥(元興) 6년 10월 일에 정안국 왕 신 현명은 거룩하신 황제께 표문을 올립니다.《송사(宋史)》

 

고려(高麗)의 태조(太祖)가 남당(南唐)의 열조(烈祖)에게 올리는 전문(箋文).

  《남당서(南唐書)》에 이르기를, “승원(昇元) 2년(938)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글을 올리면서 전(箋)이라고 칭하였는데, 의식(儀式)은 표(表)와 같았다.” 하였다. 이때는 바로 태조 21년이다.

 

금년 6월에 본국의 중원부(中原府)에 들어온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장훈(張訓) 등이 돌아갔습니다. 삼가 듣건대, 대오(大吳)의 황제께서 이미 선위(禪位)하는 예를 거행하여 중외(中外)가 모두 추대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였다고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도(道)는 삼무(三無)에 부합되고 은혜는 구유(九有)에 스며들었습니다.

 

요(堯) 임금은 천명(天命)이 이미 떠나갔다는 것을 알고서 즉시 제왕의 자리를 선위하였으며, 순(舜) 임금은 역수(曆數)가 자신의 몸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서 마침내 옥새(玉璽)를 전해 받았습니다. 

 

용렬한 저로서는 일찌감치 생성해 주시는 은혜에 의탁할 생각은 하였으나, 한스러운 것은 해를 적시도록 파도가 높이 일고 하늘에 닿도록 바다가 드넓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폐하께서 즉위하신 조정을 만나서 대충이나마 축하하는 의식을 펴게 되었습니다. 어진 이에게 귀의하고 성스러운 분을 떠받들게 되매 용기가 솟아 마음이 격동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남당서(南唐書)》

 

고려의 성종(成宗)이 송나라 태종에게 사례하면서 올린 표문.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순화(淳化) 3년(992, 성종11)에 고려의 빈공(賓貢) 왕빈(王彬), 최한(崔罕) 등에게 급제(及第)를 내리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는데, 4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진정(陳靖) 등이 돌아올 때 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하였다.

 

학생(學生) 왕빈, 최한 등이 조정에 들어가 학업을 익혀 은혜를 입어 모두에게 급제까지 주셨으며, 장사랑(將仕郞) 수 비서성교서랑(守祕書省校書郞)으로 임명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도(當道)가 조공을 계속하여 온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상국(上國)은 하늘처럼 높고 고려는 바다로 막혀 있는 탓에 대궐에 나아가 직접 옥계(玉階)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려 알현하지 못한 채, 북극성을 우러르는 정성만 깊을 뿐 궁궐 뜰에서 조회하는 예도 펴지 못하였습니다.

 

왕빈, 최한 등이 어려서부터 못난 저를 따라서 우이(隅夷)에 섞여 살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는데, 이들은 외국에서 떠도는 것도 꺼리지 않고 일찍이 황성(皇城)에 빈공(賓貢)으로 들어서는 솜옷과 짧은 털옷을 입고 지내면서 쌀과 땔감에 대한 걱정 속에 가난하게 생활하며 유학 기간을 마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하늘 같은 어짊으로 그들을 양성하고 바다 같은 아량으로 너그러이 포용하여, 관곡(館穀)의 물자를 넉넉하게 하사하고 예문(藝文)의 학업에 힘쓰도록 권면하셨습니다.

 

작년에는 헌감(軒鑑)을 높이 걸어 놓고 성대하게 노유(魯儒)를 선발하셨습니다. 그런데 왕빈, 최한 등이 태학(太學)에 있으면서 감히 시험에 응시해 입격할 마음을 내었으며, 중국에서 외람되게 복건(幅巾)을 쓰고 있으면서 부질없이 과거 시험에 급제할 마음을 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이 만리 멀리 집을 떠나 10년 동안이나 중국에서 유학하였다는 이유로 계적(桂籍)에 이름을 올리도록 하는 동시에 운대(芸臺)의 관직을 임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의 부모가 그리워하는 마음을 위로해 주고자 하여, 특별히 칙지를 내려서 그들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천지의 조화처럼 곡진하게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그 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신은 하늘에 감사하고 폐하를 존숭하는 지극한 마음을 이루 다 표현하지 못하겠습니다.

《송사》

 

고려의 성종(成宗)이 송나라 태종에게 사례하면서 올린 표문.

  《송사》에 이르기를,  “고려의 사신 백사유(白思柔)를 따라온 공목리(孔目吏) 장인전(張仁銓)이 자신의 독단으로 글을 올렸는데, 백사유는 그가 고려의 기밀 사항을 아뢰었다고 의심하였다. 그러자 장인전은 두려워서 감히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 뒤 순화(淳化) 4년(993, 성종12)에 진정(陳靖)이 고려에 사신으로 갈 때 상이 장인전을 데리고 가도록 하고, 고려의 왕에게 조서를 내려서 장인전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하였다.

 

관고(官告)를 지닌 국신사(國信使) 진정(陳靖), 유식(劉式) 등이 도착하여 성지(聖旨)를 전하였습니다. 당도(當道)의 진봉사(進奉使)를 따라갔던 공목관(孔目官) 장인전(張仁銓)이 폐하의 대궐에 이르러 함부로 자신의 생각대로 말씀드렸다가 도리어 두려움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 사신 편에 딸려 보내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장인전은 동방의 변변치 못한 백성이자 해동의 미천한 관리인데 상국(上國)에 나아가서는 감히 어리석은 정성을 바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어두운 소견임을 생각지 않고 문득 제멋대로 일을 아뢰어, 망녕되이 폐하를 번거롭게 하였고 위로 조정을 더럽혔습니다.지금 윤음(綸音)을 받들건대, 장인전을 풀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인(小人)은 이욕을 따르는 법이니, 어찌 참람되게 요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성주(聖主)께서는 관대하고 인자하여 그를 불쌍히 여기라는 명령을 멀리서 내리셨습니다. 이에 장인전은 이미 조지(詔旨)에 따라서 그 죄를 용서하였고, 예전처럼 일도 관장하게 하였습니다.《상동》

 

고려가 금(金)나라에게 정조(正朝)를 하례하는 표문 연조(年條)는 상고할 수가 없다.

황제께서 동방에서 나오시매 삼양(三陽)의 생성이 이루어지고, 왕께서 정월을 정하시매 대일통(大一統)이 시작되었는바, 은혜가 미치는 곳에서는 모두들 기뻐하면서 경축하고 있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중부(中孚)로 하늘에 응하매 크게 황제의 자리를 얻었는바, 스치는 것마다 모두 교화되니 만물이 항상 새로워짐을 보겠고, 노하지 않아도 위엄스러우니 뭇 나라들이 복종함을 보겠습니다. 힘써서 새해가 다시 돌아오는 때에 맞게 하니 여러 가지 복의 아름다움이 갖추어졌습니다.

 

신은 다행히도 창성하는 시기를 만나 멀리 외복(外服)에 있게 되었습니다. 천세 만세 오래 사시라고 축수를 올리건만 마침 의식을 올리는 데에는 참예하지 못하였으며, 억조창생들의 마음은 모두 같은바 단지 축원하는 마음만 깊습니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위위소경 경거도위 사자금어대(衛尉少卿輕車都尉賜紫金魚袋) 이중연(李仲衍)으로 하여금 표문을 받들어 올리면서 축하드리는 말씀을 아뢰게 합니다.

《송막기문(松漠紀聞)》

 

조선(朝鮮)의 인조(仁祖)가 명(明)나라의 희종(熹宗)에게 올린 소(疏) 천계(天啓) 6년(1626, 인조4)에 인조가 소를 올려 모문룡(毛文龍)이 무고하여 아뢴 내용을 변명하였는데, 황제에게 보고하니, 조서를 내려 위로하라고 하였다. 조서는 중국문(中國文)에 나온다.

 

황조(皇朝)는 소방(小邦)에 대하여 끝없는 은혜를 베풀어 내복(內服)이나 다름없이 보살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어렵고 어지러운 때를 만나 몰래 적국과 내통하였더니 황천(皇天)이 진노하여 천명(天命)을 바꾸어 버리셨습니다. 

 

신이 국권(國權)을 서리(署理)할 적부터 감히 편히 있지 못하고서 곧바로 배신(陪臣) 장만(張晩)을 대장(大將)으로 삼고 이괄(李适)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나라에서 제일가는 정예 부대를 이끌고 영변(寧邊)에 가서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모문룡 진영(鎭營)의 절제를 받아 연합하여 공격하는 시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괄이 막중한 군대를 손에 넣자 분수에 넘치는 것을 엿보아 마침내 구성 부사(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켜 곧바로 경성(京城)을 침범하였습니다. 

 

장만이 남은 병사를 거두어 모아 그 뒤를 쫓아와서 서울에 있던 관군(官軍)과 함께 안팎에서 협공하니, 역적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쪽 변방의 군량과 병기 및 각 진(鎭)에 비축됐던 군량이 이로 인해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모문룡 진영은 요동(遼東) 전체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에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건너와 해상(海上)에 임시로 주둔하여 있으면서 요동 백성들을 불러 모은 것이 전후에 걸쳐 수십만 명이나 되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소방에서 물자를 보급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본국에서는 많은 변고가 일어나 토지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궁핍합니다. 안으로는 우리의 군수 물자를 공급해야 하고, 밖으로는 식량을 기다리는 모문룡 진영의 병사를 먹여야 하는데, 곡식의 생산은 한도가 있으므로 지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요동 백성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촌락으로 흩어져 돌아다니면서 강한 자는 약탈하고 약한 자는 구걸하고 있어 소방의 군민(軍民)들은 이러한 소요를 견디지 못하여 고향을 버리고 내지(內地)로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동 백성들이 먹을 것을 쫓아 또다시 따라 들어와 창성(昌城), 의주(義州) 이남에서부터 안주(安州), 숙천(肅川) 이북에는 타국인이 6, 7할이나 되고 본국인은 3, 4할밖에 안 됩니다. 

 

앞서 이러한 정황을 갖추어 상주하였는데, 병부(兵部)가 제복(題覆)하여 내려진 처분을 보았는바, 어찌 감히 다시 그런 처분을 요청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윤(韓潤)과 그의 아우 한담(韓潭)은 역적 한명련의 자질(子侄)로서 몰래 도망쳐서는 적을 꾀어내어 노략질하러 들어왔습니다. 

 

역적들은 이미 나라를 배반하고 갔으므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은 이미 신에게 없습니다. 윤의립(尹義立)은 판서를 지낸 적이 있을 뿐 본래부터 의정(議政)은 아니었습니다. 근년에는 모문룡 진영의 접반관(接伴官)에 차임되었는데, 직임을 맡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면직되어 집으로 돌아갔으며,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일은 없습니다. 

 

모문룡 진영에서는 왕중보(王仲保) 등이 하소연한 바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이는 모두가 사실이 아닙니다. 생각건대, 이는 반드시 마음이 바르지 못하여 남을 헐뜯는 자가 있어서 독무(督撫)를 속여 교묘하게 꾸며 내는 계략을 행하는 것입니다.

 

모 장군은 해외에 오랫동안 주둔하고 있어서 신과 서로 돌보아 준 지 이미 10여 년이나 되어 갑니다. 비록 양곡이 다 떨어져서 서로가 함께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지만, 정의(情誼)의 도타움은 실로 조금도 손상됨이 없습니다. 또 그들이 수미(須彌)로 옮긴 것은 지켜야 할 임무가 점점 무거워짐에 대비하여 마초와 땔감을 장만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 나아가고 한 번 물러서는 것은 병가(兵家)에서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잘못 전해진 말과 앞에서는 추켜세우고 뒤에서는 헐뜯는 행위는 본래부터 개의할 것이 못 됩니다. 

 

삼가 병부와 등래 순무(登萊巡撫)의 자문(咨文)을 살펴보니, 침범하지 않을까 걱정한다느니, 그 백성을 몰아내면 그 장수도 몰아낸다느니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군대를 풀어 방비하고 있으니 속국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라는 말까지 있는데, 해외의 정황을 다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이 요동 백성을 데리고 가기를 요청한 것은 그들을 구제할 힘이 부족해서이지, 당초부터 침입을 받을까 염려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은 현재 모문룡과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공을 세워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의심하여 방비하려는 뜻이 있겠습니까.

《명사(明史)》

 

조선의 인조가 명나라 의종(毅宗)에게 올린 소 

 《문헌통고보(文獻通考補)》에 이르기를, “인조 10년(1632)에 원종대왕(元宗大王)과 인헌왕후(仁獻王后)를 추숭(追崇)하고, 풍녕군(豐寧君) 홍보(洪寶) 등을 파견하여 추봉(追封)한 데 따른 고명(誥命)을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그다음 해에 홍보 등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갈 적에 황제의 칙서와 추봉한 데 따른 고명 및 시호(諡號)를 받들었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때 상주한 글이다. 숭정(崇禎) 5년(1632, 인조10) 10월에 조선국(朝鮮國)의 왕 이종(李倧)은 차서(次序)를 잇는 예가 중하기에 소를 올립니다.

 

신의 할아버지인 소경대왕(昭敬大王)의 여러 아들 가운데 큰아들은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인데, 병에 걸려서 즉위하지 못하고 후사도 없이 몰(歿)하였습니다. 다음은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인데, 이는 폐위된 사람입니다.

 

다음은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로, 바로 신의 아비입니다. 광해군의 부자(父子)가 이미 죄를 저질러 폐위되었으니, 종사(宗社)의 의탁이 신의 아비에게 돌아가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신은 소경대왕의 장손(長孫)으로서 소경왕비(昭敬王妃)의 명을 받들어 대궐에 들어와 할아버지의 왕통을 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조정에 청하여 봉전(封典)을 완결지었는바, 황은(皇恩)에 감격해하면서 뼛속에 새겨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은 이미 황상의 명을 받아 왕호(王號)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부(生父)와 생모(生母)에게도 시행하여야 할 전례(典禮)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 일이 많이 발생한 탓으로 인해 즉시 전례에 의거하여 주청(奏請)하지 못해 칭호에 흠이 있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않는다면 자식 된 지극한 정에 있어서 어찌 감히 하루인들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고례(古禮)를 상고해 보니, 방계(傍系)가 들어와서 후사(後嗣)를 이었을 경우에는 인후(人後)하였다고 칭하고, 손자(孫子)로서 할아버지를 이었을 경우에는 조후(祖後)하였다고 칭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었으면 중함이 인후에 있으므로 감히 사사로운 정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이었으면 아버지가 비록 일찍 졸하였더라도 정통(正統)의 순서에 끼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산 사람의 대륜(大倫)이고, 천지의 상경(常經)입니다. 무릇 사람은 할아버지가 있은 뒤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은 뒤에 손자가 있는 법입니다. 할아버지로부터 나라를 이어받았다고 하여 그 칭호를 칭하지 않고 할아버지로 칭해야 한다면, 명실(名實)이 달라지게 되고 윤서(倫序)가 분명치 않게 되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조사해 보건대, 성화(成化) 11년(1475, 성종6)에 신의 선조인 강정왕(康靖王 성종(成宗))이, 본생고(本生考)인 회간왕(懷簡王)이 세자가 되었다가 일찍 졸하였다는 이유로 배신 김질(金礩)을 파견해 사유를 갖추어 아뢰어 봉전(封典)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헌종황제(憲宗皇帝)께서 그 성효(誠孝)를 가상하게 여겨 칙서를 내려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고명(誥命)을 반사(頒賜)해 주셨습니다. 이에 동방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은 뒤를 이은 할아버지는 있으나 뒤를 이은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높이고 할아버지를 잇는 것은 그 할아버지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는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며 일이 타당하고 사리가 발라서, 인정(人情)과 사리(事理)를 모두 펴고 은혜와 의리를 모두 온전하게 함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외람되이 번복(藩服)을 지키고 있으면서 티끌만치도 정성을 바치지 못하였는데, 또다시 추은(推恩)하는 봉전을 내려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신의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은 여기에서 실로 깊습니다. 그러면서도 위로 천지 부모 같으신 황제의 어짊을 믿고 감히 전담 사신을 차임하여 우러러 하소연하는 바입니다.

 

삼가 성명(聖明)께서는 해당 부에 명을 내리시어 전례를 모두 조사하고 예전(禮典)을 상고하여 관작(官爵)과 시호(諡號)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의 어미인 구씨(具氏)에게도 아울러 고명(誥命)을 하사하여 효성을 넓히고 천륜(天倫)을 펼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이는 실로 황조(皇朝)의 총전(寵典)이며, 소방 신민들에게도 지극히 다행일 것입니다.

《춘명몽여록(春明夢餘錄)》

<이상은 사대(事大)의 글이다.>

 

발해(渤海)의 무왕(武王)이 일본의 성무천황(聖武天皇)에게 준 국서(國書) .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이르기를, “천평(天平) 4년(732, 무왕14)에 발해 왕 대무예(大武藝)가 고인의(高仁義) 등을 파견하여 발해 왕의 국서를 올렸다.” 하였는데, 이때는 바로 당나라 개원(開元) 20년, 발해 무왕 14년이다.

 

대무예(大武藝)는 아룁니다. 산하(山河)는 이역이고 국토(國土)는 같지 않기에, 풍교(風敎)와 덕화(德化)에 대해서 듣고는 우러르는 마음만 더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왕께서는 중국에서 명을 받아 일본에서 나라를 열어 성스러운 덕을 대대로 이어 빛내었으며, 자손들이 창성해서 대대로 쇠하지 않았습니다.

 

저 대무예는 열국(列國)의 자리에 있으면서 외람되이 제번(諸藩)을 다스려 고구려(高句麗)의 옛 강역을 수복하였고, 부여(扶餘)의 남은 풍속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만 하늘 끝에 있어서 길은 막히고 큰 바다는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소식을 통할 수 없었던 탓에 길흉(吉凶)을 묻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어진 이웃 나라와 선린(善隣) 관계를 맺는 것은 옛날의 법도를 따르려고 하였습니다만, 사신을 보내어 통호하는 것이 오늘에서야 시작되었습니다. 삼가 영원장군(寧遠將軍) 낭장(郞將) 고인의(高仁義), 유격장군(游擊將軍) 과의도위(果毅都尉) 덕주(德周), 별장(別將) 사나루(舍那婁) 등 24인을 파견하여 서장(書狀)을 싸 가지고 가게 하고, 아울러 표피(豹皮) 300장을 받들어 싸 가지고 가게 합니다. 

 

보내는 토산물이 비록 천하기는 하지만, 이것으로써 하찮은 것이나마 바치는 정성을 표합니다.예물이 진귀하지 않아서 도리어 비웃지나 않을까 부끄럽습니다. 다스림을 주관함이 한계가 있어 우러러뵈올 기약은 없지만, 때때로 소식을 받들어 올려 영원토록 우호를 도타이 하고자 합니다.

《일본일사(日本逸史)》

 

발해의 문왕(文王)이 일본의 성무천황에게 준 국서.

 

《일본일사》에 이르기를, “천평 10년(738, 문왕2)에 일본의 사신이 당나라에 조회하고서 돌아오다가 바다에서 표류하여 발해국에 도착하였는데, 그 나라의 왕이 대요덕(大要德) 등을 차임하여 사신과 함께 와서 조빙하였다.” 하였는데, 이때는 바로 당나라 개원 26년, 발해의 문왕 2년이다.

 

대흠무(大欽茂)는 아룁니다. 산하가 까마득히 멀고 국토가 아득히 멀어 풍교와 덕화를 바라보면서 오직 우러르는 마음만 간절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황의 성스러운 예지(叡智)는 지극한 덕이 멀리까지 퍼져 대대로 성덕(聖德)을 이어 빛내고 은택이 만백성들에게 흐를 것입니다.

 

저 대흠무는 선조들의 왕업을 이어받아 외람되이 국정을 총괄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고 있는데, 의로움은 두루 미치고 정은 두터워지도록 매번 이웃 나라와 우호를 닦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귀국의 사신인 조신광업(朝臣廣業) 등이 풍랑을 만나 길을 잃어 표류하다가 이곳으로 왔습니다. 

 

이에 넉넉한 상을 매번 내리면서 내년 봄이 오면 돌려보내려고 하였는데 사신 등이 굳이 올해 안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청하는 말은 지극히 중하고 이웃 나라와의 우의는 가벼운 것이 아니기에, 행자(行資)를 갖추어서 즉시 돌려보냈습니다. 

 

이어 약홀주도독(若忽州都督) 서요덕(胥要德) 등을 사신으로 차임하여 조신광업 등을 데리고 귀국으로 가게 하였으며, 아울러 대충피(大蟲皮)와 비피(羆皮) 각 7장, 표피(豹皮) 6장, 인삼(人蔘) 30근, 밀(蜜) 3곡(斛)을 진상하니, 그곳에 이르거든 살펴보고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상동》

 

발해의 강왕(康王)이 일본의 환무천황(桓武天皇)에게 준 국서 《일본일사》에 이르기를, “연력(延曆) 16년(797, 강왕3)에 발해국에서 여정림(呂定琳) 등을 파견하여 와서 국상(國喪)을 고하였다.” 하였는데, 이때는 당나라 정원(貞元) 13년, 발해의 강왕 3년이다.

 

하늘이 화를 내려 할아버지이신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대흥(大興) 57년(793, 문왕57) 3월 4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선린의 의리에 있어서 반드시 길흉(吉凶)의 일을 고해야 하는데, 푸른 바다로 막혀 있는 탓에 늦게서야 고하게 되었습니다.

 

저 대숭린(大嵩璘)은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 화를 불러오고서도 스스로 죽지 못한 채 불효를 저지른 데 대한 죄를 받아 혹독한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삼가 별도로 서장을 올려서 아룁니다만, 황급하고 혼미한 탓에 두서가 없습니다. 고손(孤孫) 대숭린은 머리를 조아리고서 아룁니다.

 

애통스러운 마음은 이미 별계(別啓)에 갖추어 적었습니다. 삼가 천황 폐하께서는 기거(起居)가 만안하시고 침식이 편안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저 대숭린은 구차스러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상제(祥制)를 맞게 되었습니다. 

 

관료들이 의로움에 감동하여 저의 뜻을 빼앗고 정을 억누른 탓에 크나큰 기업을 이어받아 선열(先烈)들의 뒤를 이었습니다. 이에 조정의 법도는 예전처럼 되었고, 나라의 강역은 처음처럼 되었습니다. 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실로 폐하께서 특별하게 돌보아 주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다가 땅을 두르고 물결이 하늘에까지 넘실대는 탓에 문안을 드릴 길이 없어서 우러르는 마음만 간절하였습니다. 삼가 광간대부(匡諫大夫) 공부 낭중(工部郞中) 여정림(呂定琳) 등을 차임하여 바다를 건너가 안부를 묻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닦게 합니다. 약간의 토산물을 별장(別狀)과 함께 올립니다. 황급하고 혼미한 탓에 두서가 없습니다.

《상동》

 

발해의 강왕(康王)이 일본의 환무천황(桓武天皇)에게 준 국서.

    연조는 미상이다.

 

대숭린은 아룁니다. 사신을 차임해 바다를 건네 보냄에 있어서는 정례(情禮)를 펴는 것이 귀한 법이기에, 특별한 은혜가 내려지기를 기다렸건만 그런 소망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천황께서 갑작스럽게 도타운 은혜를 내려 이를 하사하는 사신이 왔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이 귀에 가득 차고 진귀한 물품이 눈에 넘쳐나, 우러르고 굽어보면서 스스로 기뻐하노라니 기쁘고 위안되는 마음이 더욱 더합니다. 여정림(呂定琳) 등이 변경의 소요를 헤아리지 못하고 갔다가 적들에게 잡혀갔는데, 천황께서 잘 돌보아 주시어 본국으로 살아 돌아왔는바, 큰 은혜를 받음이 본국을 떠나가거나 본국에 머물거나 간에 똑같습니다.

 

저 대숭린은 외람스럽게도 밝지 못한 덕을 가진 사람으로 다행스럽게도 거룩한 시기를 만나 관직은 선대의 작위(爵位)를 이어받고 국토는 옛날의 강토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제명(制命)과 책서(策書)가 겨울에 내려졌으며, 금인(金印)과 자수(紫綬)가 요동 밖에까지 빛났습니다.

 

이에 승방(勝邦)에 대해 예를 닦고 귀국에 대해 우호를 맺어, 세시(歲時)마다 조근(朝覲)하러 가는 사신들을 줄 이어서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배를 만들 만한 큰 나무는 저희 땅에서 자라지 않고,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면 위태로워, 매번 바다로 나갔다가 삼가지 않아서 화를 당하였습니다. 이에 비록 성대한 덕화를 흠모하면서도 가는 길이 막힌 데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예전의 우호 관계를 다시 회복해 내왕하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사신의 숫자가 비록 20명이 넘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제한하여 영원한 규정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격년(隔年)의 길고 짧음에 대해서는 귀국의 사신들이 재정(裁定)하는 데에 따를 것이니, 재정할 사신들을 오는 가을에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덕스러운 이웃 나라가 항상 있을 것입니다. 일을 제가 바라는 바와 다르게 처리하실 생각이라면, 그에 대해 충분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내 주신 견(絹) 20필, 시(絁) 20필, 사(絲) 100구(絇), 면(綿) 200둔(屯)은 숫자대로 잘 받았습니다.

 

지금 광악(廣岳) 등이 사신의 일을 대략 마쳤는데, 제 마음속으로는 이때에 미쳐서 사람을 차임해 사신으로 보내어 신명(新命)의 은혜를 받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귀국의 사신들이 귀국 조정의 전지(傳旨)를 받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이곳에 머물도록 하였다가 이제야 그들의 뜻에 따라 돌려보냅니다.삼가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토산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서 올립니다. 스스로 하찮은 것인 줄 알기에 부끄러운 맘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상동》

 

발해의 강왕(康王)이 일본의 환무천황(桓武天皇)에게 준 국서.

  《일본사(日本史)》에 이르기를, “연력 18년(799, 강왕5)에 발해국의 사신 대창태(大昌泰) 등이 왔다.” 하였는데, 이때는 바로 당나라 정원 15년, 발해의 강왕 5년이다.

 

대숭린은 아룁니다. 보내신 사신 하만(賀萬) 등이 도착하여서 내려 주신 국서와 신물(信物)로 보낸 견(絹)과 시(絁) 각각 30필, 사(絲) 200구, 면(綿) 300둔을 숫자대로 잘 받았습니다. 

 

기쁘고 위로됨이 실로 깊습니다. 비록 다시 큰 바다가 하늘에 넘실거리고 푸른 파도가 해에 닿도록 솟구치며 길은 멀어서 끝이 없고 바라보면 구름만 아득히 바라보였지만, 동남쪽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배를 띄워 보내어 옛날에 갔던 포구를 향해 가도록 하고, 서북쪽으로 해안까지의 거리를 헤아려서 양식을 부족함이 없도록 대 주었습니다. 

 

이 어찌 피차간에 서로 마음이 통하여서 은연중에 인도(人道)에 부합되고, 남북(南北) 간에 서로 의리에 감동되어 특별히 천심(天心)에 합치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대숭린은 옛날에 봉해 받은 강역을 차지하고서 선대의 왕업을 계승하여 멀리서 장려해 주시는 은혜를 입어 조상들의 덕을 이어받아 닦았습니다. 천황께서 멀리서 덕음(德音)을 내리시면서 후한 물품까지 보내 주시니, 은혜가 마음속에서 나와 위로하고 유시함이 은근합니다. 

 

더구나 글을 올린 것에 대해 전에 요청한 대로 하도록 들어주었으며, 신물(信物)까지 빠뜨리지 않고 보내 주시면서 연한(年限)을 정해 준 경우이겠습니까. 글을 올리는 사이에 하자를 면한 것이 기쁘고, 비호하여 돌보아 주심이 다른 때보다 특별함을 알았습니다.

 

작은 배로는 건너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실로 유시하신 바를 받들어 알겠지만, 6년으로 기한을 정한 것에 대해서는 더딘 것이 몹시 탄식스럽습니다. 그러니 다시금 좋은 계책을 내려 주시고 아울러 거울처럼 환한 마음을 돌리시어, 사신을 보내는 기한을 앞당겨서 저의 뜻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제 스스로 마음속에서 거둘 수가 없을 것이며, 교화를 흠모하는 정성은 고구려의 뒤를 이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서에서 허락한 내용에는 비록 숫자의 다소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애오라지 사신의 뜻에 의거하여 사행(使行)의 숫자를 줄이겠습니다.

 

삼가 위군대장군 좌웅위도장 상주국 개국자(衛軍大將軍左熊衛都將上柱國開國子) 대창태(大昌泰) 등을 차임하여 사신으로 삼아 귀국에 보내고, 아울러 신물(信物)을 별장(別狀)에 쓴 대로 갖추어 올립니다. 토산물이라서 진기하고 기이한 것이 없기에 제 스스로도 부끄러울 뿐입니다.《상동》

 

발해의 강왕(康王)이 일본의 환무천황(桓武天皇)에게 준 국서.

    연조는 미상이다.

 

대숭린은 아룁니다. 귀국의 사신 선백(船白) 등이 도착하여 외람되이 저의 안부를 물어 주었으며, 겸하여 신물(信物)로 보낸 견(絹)과 시(絁) 각각 30필, 사(絲) 200구, 면(綿) 300둔을 숫자대로 다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마음 실로 깊으며, 아름다운 하사품과 두터운 정이 거듭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지난해에 첨부하여 아뢴 바에 대해 적당히 재량하여 오가도록 허락하였으며, 지난해에 국서를 받으니 드디어 6년으로 기한을 정하였습니다. 이에 저 대숭린이 온 마음을 부지런히 쏟아 일정을 단축시켜 주기를 요청하자, 천황께서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저의 요청에 따라 주어 곧바로 요청한 대로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물로 보낸 물품이 진귀하고 기이한 것이 아니었는데, 특별히 그대로 하도록 윤허하셨으니 기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천황께서 바다 밖에까지 국서를 내리고 사신을 보내 조정에 임하게 하시어 아름다운 명이 넉넉하게 가해지고 총애하는 장복(章服)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반열(班列)은 섭리(燮理)하는 데에 오르게 되었고, 등급은 국정을 총람(總覽)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는 못나고 재주 없는 저를 특별히 비호해 주신 것입니다. 제가 사신으로 보낸 대창태(大昌泰) 등은 재주가 사신의 임무를 맡기에는 부족하여 맡은 바의 사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너그러이 포용해 주심을 입었으니, 위로되는 마음이 배는 깊습니다.

 

이제 가을날의 햇살은 저물어 가 절서에 따라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사신은 돌아가기를 생각하여 해를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꼽고 있으니, 시절에 미쳐서 지체하지 않고 돌아갈 것입니다. 이미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을 받았으니 사신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나, 아직 기일이 되지 않았기에 감히 함께 보내지는 못합니다. 삼가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사소한 물품을 별장(別狀)과 함께 갖추어서 보냅니다.

《상동》

 

조선의 세종조(世宗朝)에 일본국왕에게 준 국서.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 이르기를, “후화원(後花園) 영향(永享) 11년(1439) 7월 12일에 조선의 국왕이 국서를 보냈다.” 하였는데, 바로 세종 21년이다. 한가을인데도 날씨가 오히려 뜨거운데 잘 지내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귀국의 이웃 나라로서 대대로 우호 관계가 도타웠습니다. 다만 두 나라 사이에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오랫동안 교빙(交聘)하는 예가 없었기에, 멀리서 그리워하는 마음이 실로 깊습니다.

 

이제 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고득종(高得宗)과 호용시위사대호군(虎勇侍衛司大護軍) 윤인보(尹仁甫)를 파견하여 경하하도록 함으로써 축하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변변찮은 토산물을 별폭(別幅)과 함께 갖추어 올리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절서에 순응하여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이칭일본전》

 

조선의 선조조(宣祖朝)에 일본국왕에게 준 국서.

《일본사》에 이르기를, “천정(天正) 18년(1590)에 조선국에서 일본국왕에게 국서를 보냈다.” 하였는데, 바로 선조 23년이다. 봄철이라 날씨가 화창하여 잘 지내고 계실 것입니다. 멀리서 듣기에 왕께서 60여 주(州)를 통일하였다고 하기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 수호(修好)를 맺어 우호 관계를 도타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는 길이 흐릿해서 사신들이 길을 잃고 지체할까 걱정스러웠기에 몇 년 동안 생각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귀국에서 보낸 사신과 함께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허성(許筬) 등 세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드리는 말을 올립니다. 

 

오늘 이후로 우호 관계가 더욱더 도타워진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토산물을 별폭과 함께 갖추어 올리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잘 지내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만력(萬曆) 18년 3월.

 

별폭(別幅)

 

양마(良馬) 2필, 대응자(大鷹子) 15연(連), 안자(鞍子) 2면(面), 안자에 붙은 여러 가지 기구, 흑마포(黑麻布) 30필, 백면주(白綿紬) 50필, 청사피(靑斜皮) 10장, 인삼(人蔘) 100곡(斛), 표피(豹皮) 20장, 호피(虎皮) 25장, 채화석(彩花席) 10장, 홍면주(紅綿紬) 10필, 청밀(淸蜜) 11석(碩), 해송자(海松子) 6석, 표피(豹皮)로 바닥을 하고 아호피(兒虎皮)로 가를 대고 전피(猠皮)로 속을 한 아다개(阿多介) 1좌(座).

 

《일본인정벌기(日本人征伐記)》

 

<이상은 인국(隣國)에 준 국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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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주01] 불사후(弗斯侯) : 후(侯)는 왕(王), 후(侯), 태수(太守)의 세 등급으로 구분하였던 백제의 제도 가운데 하나이고, 불사(弗斯)는 옛 명칭이 ‘비사벌(比斯伐)’인 전주(全州)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성격에 대해 백제의 지방 통치 조직인 담로(湛盧)의 장(長)으로 보는 견해와 백제의 직호(職號)로 보는 견해, 대중국(對中國) 외교에 있어서 백제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과정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譯註三國史記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672쪽》

 

[주02] 고쇠(高釗) :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이름이다. 사유(斯由)라고도 한다.

 

[주03] 수(須)가...매달았습니다 : 수는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이름이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에 근초고왕이 태자인 근구수(近仇首)와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第2》

 

[주04] 풍씨(馮氏)의...뒤 : 풍씨는 북연(北燕)을 가리킨다. 북연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의 한 나라로, 후연(後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시조인 풍발(馮跋)이 창려(昌黎)를 근거로 하여 나라를 세웠으며, 현재의 중국 요령성(遼寧省) 남부와 하북성(河北省)의 북부를 영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북연왕 풍홍(馮弘)이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의 공격을 받고 고구려로 망명해 왔다.

 

[주05] 고련(高璉) : 장수왕(長壽王)의 이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거련(高巨璉)으로 되어 있다.

 

[주06] 외효(隗囂) : 한(漢)나라 성기(成紀) 출신으로, 왕망(王莽) 말기에 농서(隴西)에서 웅거해 있으면서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라 자칭하였다. 처음에는 유현(劉玄)을 떠받들다가 뒤에 광무제(光武帝)를 섬겼으며, 그 뒤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공손술(公孫述)에게 붙었다가 광무제의 정벌로 인해 서역(西域)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이로 인해 외효는 번복(反覆)이 무상(無常)한 대표적인 인물로 칭해진다.《後漢書 卷13 隗囂公孫述列傳》

 

[주07] 유씨(劉氏) :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나라를 말한다. 송은 동진(東晉)의 권신(權臣)이었던 유유(劉裕)가 공제(恭帝)의 선양을 받아 세운 나라로, 현재 강소성(江蘇省)의 남경(南京)인 건강(建康)에 도읍하였으며, 8대 59년 만에 망하였다.

 

[주08] 유유(蠕蠕) : 북방에 있는 오랑캐 종족으로, 성씨는 욱구려씨(郁久閭氏)이다. 처음에는 탁발씨(拓跋氏)에 속하였다가 사륜(社崙)이 유연가한(柔然可汗)이 되면서 내외몽고(內外蒙古) 지방을 영유하였다. 그 뒤에 후위(後魏)에게 패하고, 이어 돌궐(突厥)에게 멸망당하였다. 송나라와 제(齊)나라 때에는 ‘예예(芮芮)’라고 칭하였으며, 주(周)나라와 수(隋)나라 때에는 ‘여여(茹茹)’로 칭해졌다.

 

[주09] 요(堯) 임금은~~~벌하였고 : 옛날에 요 임금이 단수포(丹水浦)에서 남만(南蠻)인 유묘씨(有苗氏)를 정벌하였다.

 

[주10] 맹상군(孟嘗君)은...않았습니다 : 맹상군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인 전문(田文)을 가리킨다. 그는 어진 인재들을 끌어 모아 식객(食客)이 3000명에 달하였는데, 일찍이 조(趙)나라에 들렀을 적에 조나라 사람들이 그를 비웃자, 노하여 동행자와 함께 수백 명을 쳐 죽이고 한 현(縣)을 멸하였다.《史記 卷75 孟嘗君列傳》

 

[주11]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譯註三國史記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676쪽》

 

[주12] 송(宋)나라에서~~~뛰쳐나갔고 : 신주(申舟)는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문지무외(文之無畏)이다. 초나라 장왕(莊王)의 명을 받아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송나라를 지나던 중 송나라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장왕은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송나라를 치러 달려 나갔다.《春秋左傳 宣公14年》

 

[주13] 왕이 사신을 보내어 : 원문에는 ‘三遣使’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王遣使’로 바로잡았다.

 

[주14] 가행(假行) : 가(假) 자는 중국 왕조에서 임명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당시에 백제는 가행(假行)의 형식을 빌려 관원을 임명한 다음에 중국으로부터 추인(追認)을 받은 뒤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주15] 태시(泰始) : 송나라 명제(明帝)의 연호로, 백제의 개로왕 11년(465)에서 17년(471)까지에 해당된다.

 

[주16] 험윤(獫狁)이...쳐들어왔습니다 : 험윤은 중국 북방의 오랑캐 가운데 한 종족으로, 여기서는 북위(北魏)를 낮추어서 부르는 말로 쓰였다. 깊숙이 쳐들어왔다는 것은, 북위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를 쳐들어온 것은 아니고 중국에 진출해 있던 백제의 지역에 쳐들어온 것을 말한다.

 

[주17] 흉리(匈梨) : 역시 북위를 낮추어서 부르는 말이다.

 

[주18] 과하마(果下馬)...은(銀) : 과하마는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키가 작은 말의 이름으로, 일찍부터 중국에 이름이 알려져서 중요한 조공품이 되어 왔다. 두발(頭髮)은 미체(美髢)로, 여자들이 머리를 꾸미는 데 쓰는 것이다. 주(紬)는 조하주(朝霞紬)와 어아주(魚牙紬)이다. 해표피(海豹皮)는 바다표범의 가죽이다.

 

[주19] 천객(泉客) : 교인(鮫人)으로, 이들은 남해(南海) 바깥의 물속에 사는 종족인데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된다고 한다.

 

[주20] 연(燕)...닭 : 바치는 사람은 소중한 것으로 여기나 받는 사람은 하찮은 것으로 보는 물품을 뜻한다. 옛날에 요동 사람이 기르는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가 희었다. 이에 기이하게 여기어 임금에게 바치려고 서울로 가지고 올라갔는데, 하동(河東)에 이르러서 보니 모든 돼지들이 다 희었으므로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되돌아갔다고 한다.

 

또 초(楚) 땅 사람이 닭을 들고 있는데 길 가던 사람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흰 봉황(鳳凰)이라고 속여서 답하자, 길 가던 사람이 이를 비싼 값으로 사서 초왕(楚王)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닭이 죽어 버리자 돈을 허비한 것은 아까워하지 않고 닭이 죽은 것만 애석해하였다고 한다.《後漢書 卷33 朱浮列傳》

 

[주21] 봉호(蓬壺) : 봉래(蓬萊)와 방호(方壺)로, 모두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있는 신선이 산다고 하는 산이다.

 

[주22] 패강...주셨습니다 : 패강은 대동강(大同江)이다. 성덕왕(聖德王) 34년(735)에 신라에서 김사란(金思蘭)을 사은사(謝恩使)로 파견하면서 패강 이남 지역을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그 결과 당나라에서는 패강 이남의 지역에 대해 신라의 영유권을 정식으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당나라가 신라를 통하여 발해(渤海)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신라는 선덕왕(宣德王) 3년(782)에 이곳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였다.《譯註三國史記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277쪽》

 

[주23] 삼무(三無) : 불교 용어로,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을 가리키는데, 불법(佛法)을 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왕발(王勃)의 석가불부(釋迦佛賦)에, “은혜는 구유에 젖어 들었고, 행실은 삼무에 흡족하였다.[恩沾九有 行洽三無]” 하였다.

 

[주24] 구유(九有) : 불교 용어로, 중생들이 윤회하는 삼계구지(三界九地), 즉 욕계(欲界) 1지(地), 색계(色界) 4지, 무색계(無色界) 4지를 가리킨다.

 

[주25] 빈공(賓貢) : 제후(諸侯)가 천자에게 천거한 선비라는 뜻으로, 당송(唐宋) 시대에 변방 제국의 출신들을 등용하기 위하여 빈공과(賓貢科)라는 과거제도를 두었다.

 

[주26] 급제(及第) : 원문에는 ‘笈第’로 되어 있는데, 《송사(宋史)》 권487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27] 우이(隅夷) : 해가 뜨는 곳, 즉 동방 바닷가에 있는 족속이란 뜻으로 고려를 가리킨다.

 

[주28] 헌감(軒鑑) : 헌원경(軒轅鏡)으로, 곧 사람들의 사특함을 조감(照鑑)하는 거울을 말한다.

 

[주29] 노유(魯儒) : 노(魯) 땅의 유생이란 뜻으로,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선비를 가리킨다.

 

[주30] 계적(桂籍) :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이다.

 

[주31] 운대(芸臺) : 도서(圖書)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비서성(祕書省)의 별칭이다.

 

[주32] 공목리(孔目吏) : 고려 때 예빈시(禮賓寺)의 하급 관리이다.

 

[주33] 관고(官告) : 옛날에 관리에게 주던 위임장(委任狀)으로, 요즈음의 신임장(信任狀)과 비슷한 것이다.

 

[주34] 연조(年條)는 상고할 수가 없다 : 《고려사(高麗史)》 권16 인종 9년 조에, “경술년에 상의 봉어(尙衣奉御) 이중연(李仲衍)을 금나라에 보내어 정조를 하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보낸 것인 듯하다.

 

[주35] 삼양(三陽) : 음력 정월(正月)로, 봄이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동짓달에 1양이 생기고, 12월에 2양이 생기며 정월에 3양이 생긴다고 하였다.

 

[주36] 대일통(大一統) : 천자의 나라가 천하를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 대(大)는 중시(重視), 존중(尊重)의 뜻이고, 일통(一統)은 천하의 제후가 모두 천자에게 통속(統屬)되는 것을 뜻한다.

 

[주37] 중부(中孚) : 주역(周易) 육십사괘의 하나로, 태하손상(兌下巽上) 괘(卦)인데, 마음이 성실하여 만물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을 상징한 괘이다.

 

[주38] 어렵고 어지러운 때 : 광해군(光海君)이 폭정하던 시기를 말한다.

 

[주39] 천명(天命)을 바꾸어 버리셨습니다 : 원문에는 ‘降出厥命’으로 되어 있는데, 《명사(明史)》 권320에 의거하여 ‘降黜厥命’으로 바로잡았다.

 

[주40] 배신(陪臣) : 원문에는 ‘部臣’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명사》 권320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41] 제복(題覆) : 명나라 시대에 황제에게 올렸던 공문서를 말한다.

 

[주42] 양곡이 다 떨어져서 : 원문에는 ‘餼牢將竭’로 되어 있는데, 《명사》 권320에 의거하여 ‘餼牽將竭’로 바로잡았다.

 

[주43] 수미(須彌) : 신미도(身彌島)로, 모문룡이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다가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곳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주44] 회간왕(懷簡王)이...졸하였다 : 회간왕은 덕종(德宗)을 가리킨다. 덕종은 세조(世祖)의 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인데,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20세의 나이로 죽어 즉위하지 못하였으며, 뒤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주45] 김질(金礩) : 원문에는 ‘金礸’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46] 발해(渤海)의...국서(國書) : 발해의 국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는 일본의 역사서에 실려 있는 것 자체가 오자(誤字)가 많으며, 여러 종류의 교감본(校勘本) 역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이에 뜻이 통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여러 종류의 교감본을 참고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47] 우러러...없지만 : 원문에는 ‘披膳未期’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披瞻未期’로 바로잡았다.

 

[주48] 천황의 성스러운 예지(叡智)는 : 원문에는 ‘天皇聖殿’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天皇聖叡’로 바로잡았다.

 

[주49] 조신광업(朝臣廣業) : 평군조신광업(平群朝臣廣業)을 말하는데, 어떤 데에는 ‘조신광성(朝臣廣城)’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당나라 개원(開元) 26년(738, 문왕2) 3월에 조신광업 등이 당나라에 조회하러 갔다가 소주(蘇州)로 돌아서 바다를 건너오던 중 표류하여 곤륜국(崑崙國)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대부분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조신광업 등 8명만 겨우 빠져나와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가 등주(登州)를 경유해서 바다를 건너 5월에 발해의 국경에 도착하였다.

 

[주50] 16년 : 원문에는 ‘十五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51] 이에...아룁니다만 : 원문에는 ‘謹狀力奉啓’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謹狀另奉啓’로 바로잡았다.

 

[주52] 기거(起居)가 만안하시고 : 원문에는 ‘動止萬社’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渤海考)》에 의거하여 ‘動止萬福’으로 바로잡았다.

 

[주53] 관료들이 의로움에 감동하여 : 원문에는 ‘官遼感義’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官僚感義’로 바로잡았다.

 

[주54] 광간대부(匡諫大夫) : 원문에는 ‘庭諫大夫’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55] 연조는 미상이다 : 이 국서에 나오는 광악(廣岳)이 발해에 사신으로 온 것은 강왕(康王) 3년(797)인데, 이때에 보낸 국서인 듯하다.

 

[주56] 저...사람으로 : 원문에는 ‘嵩璘狠以冥德’으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嵩璘猥以冥德’으로 바로잡았다.

 

[주57] 국토는...되었는데 : 원문에는 ‘土統舊奉’으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土統舊封’으로 바로잡았다.

 

[주58] 사신의 …않더라도 : 원문에는 ‘送使雖不過二年’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送使雖不過二廿’으로 바로잡았다.

 

[주59] 일을 …바랍니다 : 원문에는 ‘事與望則異足表不依’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事與望異則足表不依’로 바로잡았다.

 

[주60] 보내 주신 : 원문에는 ‘其所奇’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其所寄’로 바로잡았다.

 

[주61] 하만(賀萬) : 내장하만(內藏賀萬)을 말하며, 내장하무(內藏賀茂)로 표기되기도 한다.

 

[주62] 이 어찌...통하여서 : 원문에는 ‘豈非彼此齊契’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豈非彼此契齊’로 바로잡았다.

 

[주63] 특별히...아니겠습니까 : 원문에는 ‘特叶天心者我’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特叶天心者哉’로 바로잡았다.

 

[주64] 실로...알겠지만 : 원문에는 ‘奉知實輸’로 되어 있는데, 《발해고》에 의거하여 ‘奉知實諭’로 바로잡았다.

 

[주65] 사신을...앞당겨서 : 원문에는 ‘從其期限’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促其期限’으로 바로잡았다.

 

[주66] 선백(船白) : 자야숙녜선백(滋野宿禰船白)을 말하는데, 자야숙녜선대(滋野宿禰船代)로 표기되기도 한다.[주

 

[주67] 재주가...부족하여 : 원문에는 ‘愗專對’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才慙專對’로 바로잡았다.

 

[주68] 허성(許筬) : 원문에는 ‘許荿’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69] 청사피(靑斜皮) : 청서피(靑黍皮)의 잘못인 듯하다. 청서피는 담비 종류의 털가죽이다.

 

[주70] 해송자(海松子)...1좌(座)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豹皮心兒虎皮邊 海松子六碩 猠皮裏阿多介一座’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海松子六碩 豹皮心兒虎皮邊猠皮裏阿多介一座’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아다개(阿多介)는 털가죽으로 만든 요이다.

 

<옮긴이 : 野村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