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이씨제식(李氏祭式)

야촌(1) 2011. 6. 4. 23:39

명재유고 제32권>발문(跋文)/윤증(尹拯,1629∼1714) 著

 

《이씨제식(李氏祭式)》 발문  신유년(1681, 숙종 7)

 위의 《이씨제식》은 고(故) 목사(牧使) 이공 시현(李公時顯)이 지은 것이다.

 

공은 지차(之次) 종가(宗家)로 고조(高祖)의 조주(祧主)를 받들고 와서 집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 대소 종손들과 상의하기를, “우리 조부 문충공(文忠公-백사 이항복을 말함)께서는 일찍이 《사례훈몽(四禮訓蒙)》을 저술하고 또 《예기(禮記)》 〈제의(祭義)〉를 손수 써서 병풍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에 정성을 다하셨으나 당신이 종손이 아니었으므로 집안의 제례에 관한 규범을 만들지는 못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 세대에 와서 근거할 만한 규례가 없게 되었으니, 이번에 한번 정비를 하여 선조의 뜻을 계승하면서 후대의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하고는 이에 널리 예서(禮書)를 상고하여 이 책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대체로 망자(亡者)의 생일에 지내는 제사는 폐하고 기일(忌日)의 제수(祭需)는 줄이되 시향(時享)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하였으며, 제수의 진설에 대해 논한 조목에서는 구준(丘濬)의 공탁(共卓)에 대한 예문(禮文)을 없앴고 토신(土神)에게 제사 지내는 조목에서 주자가 아들을 경계시킨 편지를 인용하고 있으며, 천신(薦新), 헌작(獻爵), 참알(參謁), 고유(告由)의 의식에 대해서는 모두 각각 도설을 만드는 등, 적절히 참작하고 가감하여 한 집안의 정식(定式)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큰 요지는 옛 제도로 돌아가고 시속을 바꾸되, 한결 같이 주자의 《가례》를 준수하는 것을 위주로 했다는 점이다. 공의 아들 수옹(壽翁) 이세귀(李世龜)가 근래 나에게 이 책을 보여 주었는데,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감탄하기를, “문충공이 몸소 행동으로 가르친 뜻이 크고 목사가 선조를 받드는 정성이 지극하기가 이 정도구나. 무릇 예(禮)는 책에 갖추어져 있어 모두 분명하게 볼 수가 있는데, 다만 사람이 그것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책은 책대로이고, 나는 나대로인 폐단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비록 그 예를 행하더라도 그 의미를 연구하지 않으면 역시 맹자(孟子)의 말처럼 그것을 행하면서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익히면서도 그 원리를 살피지 못하게 되어, 결국에는 그 예가 폐지되거나 해이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면에서 이미 그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내용면에서는 그 의식(儀式)까지 상세히 언급하되, 모두 문충공(文忠公)이 제시한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선조를 친애하고 정성을 다하는 뜻이 실로 그 사이에 깃들어 있다 하겠다.

 

이 책에서 제시한 대로 하고서야 망자를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것이니, 아아, 참으로 훌륭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수옹이 그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것을 제대로 정리하고 보완하여 오랫동안 변함없이 행할 수 있게 하겠는가. 《소학(小學)》이란 책에서 재상(宰相) 이방(李昉)의 가법(家法)을 본보기로 취하고는 이종악(李宗諤)이 선조의 뜻을 제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라고 칭찬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시경》에 ‘지극한 효심이 끝이 없으니 그 효성 영원히 이어주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 하였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하였다. 마침내 이런 내용으로 그 책의 뒤에 소감을 써서 돌려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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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解]

 

[주01]이공 시현(李公 時顯) : 1622년(인조 원년)~1678년(명종 1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영(士榮). 이항복(李恒福)의손자이고, 이성남(李星男)의 아들이다. 기민(飢民=굶주린 백성) 구제의 공으로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고, 이어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주02]공은~~~되었는데 : 4대의 제사를 받드는 것이 상례이므로 그 대수(代數)가 다 되면 그 집 사당에 신주를 모시지 못하고 모실 대수가 되는 지차 종가의 사당으로 신주를 옮기는데, 그 신주를 조주(祧主)라 한다. 여기에서는 이시현의 대종가에서 고조의 제사를 모실 대수가 지나자, 지차 종가인 이시현(李時顯)이 고조의 신주를 모셔 와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03]문충공(文忠公) :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으로, 문충(文忠)은 그의 시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ㆍ백사(白沙)ㆍ동강(東岡)이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흔히 오성대감으로 불렸다.


[주04]사례훈몽(四禮訓蒙) : 선조 때 이항복이 집안의 자제를 위하여 《가례(家禮)》에서 제의(祭儀)를 채록하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奉先雜儀)》와 대조한 뒤에 아울러 삼례(三禮)의 중요한 말을 취해 편집하여 만든 책이다.

 

책을 만들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국역 백사집(白沙集)》 1 권2 〈사례훈몽(四禮訓蒙)에 대한 서〉에 자세하다. 1622년(광해군14)에 목판본 1권으로 간행하였고 1674년(현종15)에 중간(重刊)되었다. 관례(冠禮) 8장, 혼례(婚禮) 14장, 상례(喪禮) 110장, 제례(祭禮) 5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05]구준(丘濬) : 명(明)나라 경산(瓊山) 사람으로 자는 중심(仲深), 호는 심암(深菴) 또는 경산 선생이라 하는데, 문헌에는 보통 경산 구씨(瓊山丘氏)로 많이 나온다. 저서에는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보완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와 주희(朱熹)의 《가례(家禮)》를 해설한 《가례의절(家禮義節)》이 유명하다. 《明史 卷181 丘濬列傳》


[주06]공탁(共卓)에 대한 예문(禮文) : 공탁(共卓)이란 집의 청사(廳事)가 매우 좁은데 제사 지낼 대수(代數)가 많을 경우나 제사 지낼 묘소의 상석(牀石)이 좁을 경우, 각 위(位)에 별도로 제수를 진설하기 어려우므로 제사상을 같이 쓰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구준의 《가례의절》과 《국조오례의》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으며, 《학봉집(鶴峯集)》 권7에는 공탁진설도(共卓陳設圖)가 상세히 그려져 있다.


[주07]주자가~~~편지 : 《가례(家禮)》 〈묘제(墓祭)〉의 주(註)에 주자가 아들 주숙(朱塾)을 경계시키는 편지가 있는데, “근래에 묘제를 지낼 때 토신제를 지내는 예를 보면 매우 지리멸렬한데, 나는 이 점이 매우 염려가 된다.

 

선조의 체백(體魄)을 산림(山林)에 의탁해 놓고 그 신을 섬기기를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이후로는 묘제와 똑같이 나물, 과일, 젓, 포(脯), 밥, 다탕(茶湯)을 각각 한 그릇씩 장만하여 차별을 두지 않도록 함으로써 조상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신을 섬기는 뜻을 다하도록 하라.”라는 내용이다.

 

[주08]이세귀(李世龜) : 1646년(인조 24)~1700년(숙종 26). 호는 양와(養窩)이고 자는 수옹(壽翁)으로, 이항복의 증손자이며 목사 이시현(李時顯)의 아들이다. 예설(禮說)과 역사에 능하였고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소론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저서로 《양와집(養窩集)》이 있다.


[주09]소학(小學)이란~~~것이다 : 《소학집주(小學集註)》 권6 〈선행(善行)〉에 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송대(宋代)의 공경(公卿) 중에 선대의 가법을 변함없이 꾸준하게 지켜 오는 집안은 돌아가신 재상 이방(李昉)의 집안뿐이다. 자손이 몇 대를 거치면서 200여 식구가 되었는데도 함께 기거하고 밥도 함께 지어 먹는 등,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농지와 객점(客店)에서 나오는 수입과 관직이 있는 자의 봉록을 모두 한 창고에 모아서는 식구 수대로 날마다 양식을 공급하며, 혼례와 장례에 소요되는 경비에도 모두 액수가 정해져 있고 자제들에게 그 일을 나누어 맡기는 식으로 치른다.

 

이러한 틀은 이 재상의 아들인 한림학사 이종악(李宗諤)이 선대의 뜻을 받들어 그렇게 만든 결과이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소학》의 내용처럼 이세귀가 선대의 뜻을 잘 받들어 예를 행하고 있다고 칭찬한 것이다.

 

출처 : 한국고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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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氏祭式 跋 辛酉

 

右祭式者。故牧使李公時顯之所爲也。公以長房。奉其高祖祧主。而祀于家。乃謀於其大小宗子曰。吾王考文忠公嘗著四禮訓蒙。又手寫祭義以爲屛。其眷眷於追遠之道如此。而身非主鬯。未有成法。降及後裔。無所据依。不可不一加整頓。以繼先志而垂後式也。於是博攷禮書。以爲此本。蓋廢生忌之祀。減忌辰之饌。而歸重於時享。論設饌則黜丘氏共卓之文。祭土神則用朱子戒子之書。至於薦獻參告之儀。莫不各爲圖說。斟酌損益。以成一家之制。而大要以復古變俗。一遵家禮爲主焉。公之子世龜壽翁。間以示拯。拯卒業而歎曰。有是哉。文忠身敎之遠。而牧使奉先之篤也。夫禮具於方冊。非不粲然可見也。特人不行之故。未免於書自書我自我之弊。雖或行之。而不究其義。則亦行不著習不察。而卒同歸於廢弛而已。今此書旣著其義於前。又詳其儀於下。悉以文忠遺矩從事。而藹然愛愨之意。實寓於其間。如是然後可以能事亡矣。嗚呼賢哉。然不有壽翁爲之子。則孰能彌綸補贊以厎於行。而又不替於久遠耶。此小學書所以取李相昉家法。而美宗諤之能有述也。詩云。孝子不匱。永錫爾類。其此之謂歟。遂題所感於其後而歸之。<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