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곳에 자추사를 세우고 -소금강산
경주 벌판의 북쪽 얕으막한 산이 금강산(金剛山, 143m)이다.
남쪽에는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이 이어진 남산이 장엄하게 뻗어있고, 서쪽에는 선도산(380m)과 송화산(214m)이 솟아있다.
동쪽에는 명활산(245m)을 비롯하여 만호봉(505m), 토함산(745m)이 연이어 있다. 그러나 북쪽에는 형산강이 흘러가므로 산다운 산이 없고 모두가 나즈막 하니, 지세로 보아 가장 약하고 허(虛)한 편이다. 허약한 곳은 이름이라도 강하게 붙여야 다른 곳과 균형이 맞을 것 아닌가? 그래서 강한 이름! ‘금강(金剛)’인 것이다.
백두대간의 중허리에 자리잡은 강원도의 금강산이야 돌들이 뼈만 남은 것같이 단단하게 엉킨 모습이라 생김새 대로 표현하여 금강산(金剛山)이라 한 것이지만... 그 산과 구분하기 위하여 경주 금강산은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고도 부른다.
경주 북쪽 산봉우리가 금강산이라는 기록은 일찍부터 여러 곳에 나온다.『삼국유사』「흥법 제3 」'원종(법흥왕의 이름)이 불교를 진흥시키고 염촉(이차돈)이 몸을 희생하다’라는 제목의 글에 '향전에는 … 그의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 하였고, 이어서 '북산(北山)의 서쪽 고개(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에 장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탑과 불상 제4」' 백률사(栢栗寺)'라는 제목의 글에는 '계림의 북악(北岳)을 금강령(金剛嶺)이라 이른다. 산 남쪽에는 백률사가 있고, 이 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1구(軀) 있다.'라 했다.
「굴불산(掘佛山)」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경덕왕이 백률사에 가시는데 산 아래에 닿으니 땅 속에서 염불 소리가 나는지라, 거기를 파게 하니 큰 돌이 나오므로, 4면에 4방불을 새겨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굴불(掘佛)이라 하였는데, 지금(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당시)은 잘못 불러 굴석(掘石)이라고 한다.'고 씌어 있다.
기이(紀異) 제2의 「신라 시조 혁거세왕」 제목 아래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니, 마을 어른은 호진이라 하고 처음에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씌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편찬)에는 '금강산은 부(府)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산 남쪽에는 박바우가 있는데, 신라 때 북쪽에 바위가 드러나 보이는 것이 서라벌에 좋지 못하다 하여, 박을 심어 가리게 했으므로 박바우라고 불렀다 한다.
이 박바우를 한문으로 표기하면 표암(瓢巖)인데, 경주 이씨 시조인 알평공(謁平公)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 하여, 표암재(瓢巖齋)를 지어두고, 봄 가을로 향사를 지낸다. 그 동쪽에는 석탈해왕릉이 있고, 능 남동쪽에는 숭신전이 있다.
숭신전은 석탈해와 인연 있던 월성 만댕이에 있었는데, 반월성 정화 계획에 따라 1970년대에 이곳에 옮겨 지었다.
북동쪽 자락에는 이름 모를 절 터가 있고, 낮은 바위에는 삼존불이 돋을 새김 되어 있다.
이산과 동쪽 금학산 사이에는 다부리 마을이 있는데, 한문으로 다불리(多佛里)라고 쓴다. 산등성이에는 신라때 고분을 비롯해 근래까지의 많은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화장장(火葬場)도 이 산 골짜기에 있으니, 죽은 이가 가는 북망산(北邙山)이 여기가 아닐른가?
경주에는 옛부터 세가지 진기한 물건과 여덟가지 괴이한 풍광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삼기(三奇) 팔괴(八怪)라 불러오고 있다. 그 팔괴 가운데 하나가 백률송순(栢栗松筍 - 栢栗筍松이라고도 한다)이다. 토박이 소나무는 순(筍)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백률사 부근의 소나무는 가지를 친 뒤에 거기서 순이 생겨 나온다는 것이다.
불교 공인 때 이차돈(異次頓)은 불교를 위해 희생되었다.
사형을 당해 떨어진 이차돈의 목이 하늘에 올라 갔다가 다시 금강령에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자추사(刺楸寺), 즉 백률사를 세우고 이차돈의 명복을 빌었다.
그래서 백률사 부근의 소나무에서 만이 솔순이 돋아났다 하며, 이는 비록 이차돈의 목은 떨어졌으나 불교(佛敎) 소생의 계기가 되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즉 죽었던 이차돈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률사의 송순(松筍)은 유명해 졌으며, 다음과 같은 노래 가락의 한 구절이 생겼다.
백률송순(栢栗松筍) 솔을 베어
자그맣게 배를 모아
안압부평(雁鴨浮萍) 뜨는 물에
달맞이나 가자구나.
또한 일설(一說)에는 이 절(백률사)에는 울창한 대숲이 있었고, 이 지방의 대나무들은 대개 가느다란 것 뿐인데, 여기 것은 굵은 종류의 대나무들이었다 한다. 이 대숲은 특히 봄이 되어 죽순이 돋아날 때에는 굵은 것들이 한꺼번에 힘차게 돋아나서 송화가루 날리는 송순과 같아 그 정경을 찬미하여 '백률송순'이라 불렀다는 말이 있다.
-『경주박물관학교 교본1』,윤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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