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족보관련문

18세기 가짜 족보 성행

야촌(1) 2011. 5. 23. 01:23

金丁鉉 / 氏族史家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한양大 사학과 졸업. 사진작가. 신라문화보존회·한국씨족총연합회 자문위원. 現 고산자(김정호)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간사. 저서 ‘흥하는 성씨 사라진 성씨’, ‘한국의 성씨’, ‘姓은 무엇인가’, ‘고려명신 金之岱’ 등.

안동 權씨 成化譜가 최초의 족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안동 權씨 成化譜.


족보에「淸譜(청보)」와「濁譜(탁보)」라는 말이 있다.

청보는 그 내용이 사실적인 족보이고, 탁보는 과장되고 거짓이 많은 족보, 즉「가짜 족보」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성씨들의 門中(문중) 족보를 보면 始祖(시조)가 대부분 고려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부 姓氏(성씨)는 신라·백제·고구려 시대, 심지어 三國시대 이전인 三韓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과연 그 아득한 옛날부터 문자를 제대로 활용해 족보를 작성한 집안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고려 18대 毅宗(의종) 때 金寬毅(김관의)가 작성한 고려 왕실의 계보도인「王代宗族記(왕대종족기)」로 알려져 있다. 일반 백성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족보를 만든 것은 安東(안동) 權氏(권씨)의「成化譜(성화보)」가 최초이다.

 

성화보는 조선 成宗(성종) 때인 1476년 만들어졌다.「成化」는 당시 明나라의 年號(연호)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씨의 족보들을 보면 한국 최초의 족보라고 하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보다 앞선 것들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관직·작위 등에 거짓이 있는 경우 많아


많은 족보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시조로부터 수백 년 걸쳐서 내려온 조상의 이름과 행적이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중간에 끊기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삼국사기」나「고려사」등 正史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 많다.


각 성씨의 문중 사람들은 대개가 그들의 문중 족보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일이 많다.

족보에 나타난 官職(관직), 生沒(생몰)연대, 부인의 이름, 묘소 등을 살펴보면 기재 사실의 진실 여부를 알 수 있다.


가령 고려시대의 官職名, 品階名(품계명), 爵位名(작위명)을 신라 때 조상에게 붙인 것을 본다.

조상이 신라 때 사람으로 신라 조정에서 벼슬을 했다고 하면서 諫議大夫(간의대부), 平章事(평장사), 門下侍中(문하시중) 같은 고려시대의 관직명을 붙여 놓은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없던 君號(군호: 功臣에게 生前에「○○君」하는 식의 작위를 내리는 것)나 諡號(시호ㆍ功이 있는 신하에게 死後에 내리는 칭호)를 붙인 경우도 있다.


바로 이런 것들이 탁보!,

즉「가짜 족보」인 것이다. 벼슬에도 가짜 표기가 많다.


예를 들어「中樞府事(중추부사) ○○○」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바로 가짜 벼슬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중추부사라도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라 하는 품계별로 명칭이 있다. 막연히「중추부사」라는 관직명만 있으면 이것은 가짜라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오늘날 장관급인 平章事라는 관직이 있었다. 평장사에는 「中書侍郞(중서시랑)평장사」,「門下侍郞(문하시랑)평장사」하는 식으로 소속 부서의 명칭이 들어간다. 그냥 모호하게 평장사라는 벼슬 이름만 써 놓은 것은 믿을 수 없는 기록이다.


족보에 조상이 어느 시대의 사람인가 하는 시대 표기가 없는 경우, 그 眞僞(진위)가 의심받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이라면 어느 왕조에서 벼슬을 했으며, 언제 사망했는지의 기록이 있어야 한다. 墓(묘)가 失傳(실전)되거나, 墓碣銘(묘갈명)이 아니더라도 문중 조상들의 문헌에서 관련 기록은 찾아볼 수 있다.


부인의 경우 출생과 사망 연도를 몰라서 기록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성씨의 누구 딸이란 것쯤은 기록이 있어야 그 족보의 기록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다.


18세기 이후 탁보(濁譜) 많이 나와

 

↑조선 왕실의 족보인璿源譜를 보관하던璿源寶閣현판

 

족보 기록에 보면 1世, 2世 하는 世數(세수) 표기가 있다. 世數는 始祖로부터 내려오면서 후손들이 世代별로 갖는 숫자이다. 족보상 世數 간격을 30년 정도로 잡는다. 자기로부터 10대조가 되면 그 조상은 270년 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70년 전이라면 18세기경이 된다. 18세기경이라면 조선 숙종~영조 때이다.

이때에 각 성씨의 족보가 雨後竹筍(우후죽순)처럼 많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가짜 족보가 많이 나타났다.


16세기 이전에 있던 족보는 대개 깨끗하다는 의미로 청보라 한다. 이때까지는 족보를 만든 성씨가 많지 않았다. 16세기라야 안동 권씨 성화보가 나온 지 불과 1세기 정도 지난 시점이다.


우리나라 족보의 上系 계보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대개 고려시대에 시조를 둔 것으로 보고, 사실 그때부터 어떤 방법으로 족보편찬이 시작되고 계보파악이 되어 있었나 하는 데서 비롯된다.

물론 각 성씨의 문중에서 단편적으로 조상 계보를 만들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려진 바로는 그것이 처음부터 문중 자체에서 기록해 놓은 것은 아니고 묘갈명이나 비문에서 그리고 다른 어떤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흔적을 찾아 고증해서 작성한 것이다.


많은 성씨들이 그렇게 하여 상계 계보를 작성했다. 그 때문에 더러 정확하지 못한 계보작성이 있기도 했다.

그런 비문과 문헌에 나타난 것으로만 자료를 삼아 계보작성을 하다 보니 그런 것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상은 누락되었으며, 문헌에 있는 조상이라 하더라도 사실이 아닌 조상이 있기도 했다.


상계 조상의 행적에 대해서는 대개가「고려사」와「고려사절요」,「동국통감」혹은「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는 행적들을 족보에 올려놓은 경우도 있다. 문중 자체의 기록이라면 正史에 나타난 것 이외의 내용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록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王建, 功臣에게 食色으로 내린 지역 本貫으로 하는 姓 하사

↑조선 태조 이성계의 호적.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姓이라도 本貫(본관)이 다르면 血族이라 하지 않는다.

최초의 조상이 姓을 가지면 어느 지역이라는 본관을 표시한다.


본관제도는 각 지방마다 세거세력을 둔 豪族(호족)을 근거로 해서 나타났다.

신라 말~고려 초에는 지방마다 호족들이 웅거해 있었다. 고려 太祖 王建(왕건)은 이 집단들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功臣에게는 특정 지역을 食邑(식읍)으로 내려 주면서 그곳을 본관으로 하는 姓을 하사했다.

대표적인 것이 고려 개국공신인 申崇謙(신숭겸), 洪儒(홍유), 裵玄慶(배현경) 등이다.


平山(평산) 申씨의 시조인 신숭겸은 처음부터 황해도 평산의 호족이었던 것이 아니라, 평산을 식읍으로 받으면서 이곳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이다. 申씨 중에는 高靈(고령) 申씨도 있다.

 

고령 신씨는 신라 때 이 지역 호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성씨가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는 하지만 왕족과 귀족, 양반 등 지배계급에 국한된 얘기였다.


조선시대의 경우 양반계급이란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계층을 일컫는다.

이미 文臣이나 武臣으로 벼슬길에 나가 있었던 사람들의 가족들은 모두 양반 계급들이다.

 

그들의 후손은 官奴(관노)나 賤民(천민)으로 전락하지 않는 한 계속 양반 신분으로 남는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자신의 성씨와 족보이다. 본관이 있는 분명한 성씨에서 신분이 보장되는 증거로 족보가 있었던 것이다.


족보는 오늘과 같은 혈족 전체가 등재되는 大同譜(대동보) 형태가 아니더라도 家譜(가보)나 派譜(파보) 형태로 만들어 보관해 양반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 밖에 신분확인용 문서로는 나라에서 만든 戶籍簿(호적부)가 있었다.

 

고려 11代 문종(1046~1083) 때 만든 성씨를 가진 사람의 世系가 기록된 호적부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제출한 것이다. 姓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호적부를 제출했던 것이다.


중국, BC 2세기경 姓氏 사용 활성화

↑고려 왕씨 족보.

 

중국인의 족보는 5세기경 南北朝(남북조)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 족보보다 10세기나 먼저 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바로 이웃인데 족보 전래가 이토록 늦은 이유는 무엇일까?
성씨 전래가 상당히 늦어진 것이 그 원인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경인 前漢(전한)시대에 이미 성씨가 활성화되고 있었다.

이때는 고구려·신라·백제가 세워지기 전이다.


우리 민족이 삼국시대에 일부 지배계층에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三國의 건국 전후였다.

前漢시대와는 200년의 차이가 난다. 실제로 성씨제도가 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시기를 보면, 족보 등장의 시기와 같은 1000년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의 주요 성씨 가운데 거의 절반이 중국에서 뿌리를 찾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중국의 漢族(한족)이나 다른 어떤 종족의 후손이란 것이 되고, 순수 韓民族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된다.


일본인의 경우를 보면 설사 외국에서 귀화해 온 조상이라고 해도 오히려 신분을 감추지 자랑삼아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자기 성씨의 뿌리를 중국에서 찾는 것은 慕華(모화)사상의 발로라고 할 것이다.


양심 있는 성씨의 문중족보도 있다. 南陽(남양) 洪氏(홍씨) 중 土洪系가 그들이다.

이들은 자기 성씨가 신라 말 土豪(토호)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남양 홍씨 중 唐洪系(당홍계)가 있다.

 

그들의 始祖는 신라 선덕여왕 때 儒學(유학)을 강의하러 들어온 중국인 學士가 귀화했다고 한다.

이처럼 신라 때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성씨가 많다.

 

이들 성씨의 족보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그들의 조상들이 신라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姜(강)·盧(노)·安(안)·梁(양)·文(문)·柳(유)·方(방)·白(백)·卞(변)·宋(송)·辛(신)·張(장)·趙(조)·徐(서)·丁(정)씨 등이 그 예이다.


「삼국사기」를 통해서 알려진 신라의 성씨로는 사로6촌의 성씨, 즉 李(이)·鄭(정)·崔(최)·孫(손)·裵(배)·薛(설)씨와 王族의 성씨인 朴(박)·昔(석)·金(김)씨 정도이다.


그 외에 위에서 언급한 귀화 성씨가 신라시대에 있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중국에서 귀화해 온 이들이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했다면 그 행적이「삼국사기」등에 언급되었을 텐데, 正史에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반면에 고려 후기나 조선 초기에 등장한 귀화 성씨들의 경우에는「고려사」나「조선왕조실록」에서 관련 기록들이 보인다. 이들 성씨의 족보기록은 앞의 경우에 비해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붙인 집」과「겉다리 양반」

↑돌벽에 새긴 광주 潘씨들의 족보.

 

조선시대 후기에서 日帝 치하에 이르는 동안 많은 가짜 족보가 등장했다.

 

천민이고 常人(상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성씨를 갖게 하고, 軍役(군역)·稅收(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戶口를 파악하면서 가짜 족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양반의 경우 군역과 다른 여러 雜役(잡역)들이 면제되었기에 양반 신분을 사고, 가짜 족보를 만드는 일이 성행하게 되었다.


신분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한 대한제국 시대에는「붙인 집」,「겉다리 양반」이라는 말이 나왔다.

가짜 족보를 비꼬는 隱語(은어)였다.


「붙인 집」이란 조상이 분명치 않은 사람이 양반의 족보를 사서 자기 식구들을 올려놓은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상업을 해 부유층에 속했다.


「겉다리 양반」은 본래 양반층이었다가 몰락한 경우다. 가문의 후예들이 다시 옛적의 가문으로 돌려놓으면서 그간의 과정을 숨기고 족보를 새로 꾸며 양반 행세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영조 때 족보위조 사건이 있었다. 譯官(역관) 김경희라는 자가 다른 사람의 족보를 수집, 사사로이 주조한 활자로 위조 족보를 인쇄해서 시골에 있는 軍役 대상자들에게 판 사건이다.


조선조 영조 때에는 족보가 많이 만들어졌다. 門中에서 족보편찬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권한은 막강했다.

이들은 족보 작성 과정에서 집안사람에게서 뇌물을 받고 庶子(서자)를 嫡子(적자)로 올려 주고, 直系(직계) 조상에게 없던 벼슬을 기록해 주고, 미운 門中 사람이면 족보에서 누락시켜 버렸다.


그런가 하면 姦臣(간신)이나 嬖臣(폐신)이 있을 경우에는 족보에서 누락시키는 경우도 있다.

고려 의종 때 쿠데타를 일으켜 武人政治(무인정치) 시대를 연 鄭仲夫(정중부)는 본관이 海州(해주)이다.

 

「고려사」에도 그의 본관이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現 해주 정씨의 족보에서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해주 정씨는 고려 神宗(신종) 때 사람 鄭肅(정숙)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신종은 의종보다 2代 늦게 재위한 왕이다. 정숙의 윗대는 문헌이 失傳되어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시조로부터 4~5代까지의 조상은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다.


日帝시대부터 문중원들 수 크게 늘어

史書에 나타난 유명 인사인 데도 족보에 누락되는 경우도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재상이었던 安震(안진)이라는 인물이 있다. 본관이 「순흥」인 그는 진주 촉석루를 재건한 인물이었다. 案山君(안산군)이라는 封號(봉호)를 받을 정도로 당대에는 유명한 인사였다.

 

그는 鄭仲夫의 경우처럼 逆臣(역신)도 아니었는 데도, 그의 이름은 웬일인지 순흥 안씨 족보에서 보이지 않는다. 조선 宣祖(선조) 때 趙從耘(조종운)이 저술한「氏族原流(씨족원류)」라는 책이 있다.

 

540여 姓氏 門中의 계보를 수집해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이 편찬된 것은 탁보가 나오기 이전인 16세기경이다.

 

이 책과 17세기 이후 撰述(찬술)된 족보들을 비교해 보면 현격한 차이가 있다.

족보에 기재되는 문중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것은 日帝시대 때부터였다.

 

이때에는 모두 성씨를 가지고 본관도 표기해야 했다. 그간 姓이 없었던 천민이라도 윗대 조상이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姓을 붙였다. 인구가 많은 성씨를 자신의 성씨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상전의 본관을 따르든지,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본관을 만들었다.

이때는 班常(반상)의 제도가 무너진 터라 이를 단속할 수도 없었다.


중국 唐나라 劉知幾(유지기)라는 학자는 족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조들의 事蹟(사적)에 대해 史體(사체)보다 매우 眩耀(현요)하다』  이 말은 족보에서 자기 조상의 행적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기록하는 것을 비판한 말이다.


족보 편찬에서 과장이 심하면 족보의 신뢰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조상의 행적에 먹칠하는 꼴이 된다.

 

족보 편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특히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월간조선 2006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