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족보관련문

고전(古典)에 나타난 가짜족보(族譜)의 실상

야촌(1) 2011. 5. 22. 21:27

■고전(古典)에 나타난 가짜족보(族譜)의 실상

 

우리나라에서 발간한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癸卯)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영락보(榮樂譜)』라고 알려져 있으나 서문만 전해지고 실물은 없다.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467년(성종 7)에 간행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 『성화보(成化譜)』이다.

 

태종(太宗) 때 집현전 대제학이었던 권제(權踶)와 세종 때 영의정이었던 권람(權擥) 부자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족보의 서문은 서거정(徐居正)이 작성했다. 조선 초기의 족보는 일반적으로 사위나 외손도 그 성을 기재했으며 아들·딸(딸은 사위 이름으로 기재)의 기재 순위는 출생 순위, 즉 연령순으로 기재했다.

 

특히 친손을 19대손까지 기재했다면 외손도 19세손까지 기재했다.

반면에 조선 후기의 족보는 출생 순위와 관계없이 언제나 아들을 먼저 기재하는 '선남후녀'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문예전고(文藝典故)

 

● 족보(族譜) - 가짜 족보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족보는 가정(嘉靖)연간에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가 가장 먼저 창시되었는데,미세한 데까지 두루

  미쳐서 외가도 자세하게 기재하였다.때문에 뒤에 족보를 꾸미는 집에서 그 족보를 고정(考訂)하였다.《여술보(藜

  述補)》

 

○ 숙종 을축년(1685 숙종 11)에 지평(持平-正五品) 최규서(崔奎瑞-海州人)가 소(疏-임금에게 올리던 글)를 올

     려 간사한 사람이 족보(族譜)를 위조하여 종파(宗派)를 옮겨 바꾼 것에 대한 죄를 논하였더니, 윤허를 받아 법

     대로 다스렸다.

 

   그때에 무뢰배(無賴輩)들이 남의 집 족보를 많이 모아두고 만약 선대에 공음(功蔭)이 있으면 그 끝에다가 이름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활자(活字)로 박아내어서 군역(軍役)을 모면하는 계책으로 삼았다.

 

   의금부의 하리(下吏)를 시켜서 수탐하여 들이니 몇몇 집의 족보가 모였는데, 해주(海州) 최씨(崔氏)의 족보도 그

   중에 있었으며, 규서(奎瑞)의 여러 종파의 이름 아래에도 역시 6, 7대나 기록되어 있었다.《간재만록》

 

○ 근래에 간사한 자가 금성(錦城) 임모(林某)라고 사칭하면서, 위조 족보를 영남에서 간행하였는데, 금성 임씨

     평택(平澤) 임씨(林氏)의 족보를 합치면서, “본래는 같은 선조였으나 형제가 분봉(分封)이 되어 마침내 본관이

     다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현족(顯族) 및 집을 집어넣어 파종(派宗)을 뒤바꾸고 대수(代數)를 바꿔 고쳐서 선조의 세

   계(世系)를 어긋나게 하여 인륜의 서차(序次)를 문란케 한 것이 매우 많았다.

 

   또한 여러 도(道에) 두루 다니면서 임(林)가 성을 가진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족보 책을 팔아 생계로 삼는 것이

   었다. 서울에 있던 여러 임씨(林氏)들이 발견하여 관에 고발하였으므로 그 사람을 조사하여 잡아 가두었다가 귀

   양 보냈고,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거짓 족보를 거두어 모아 불살랐는데 근래의 족보의 폐단이 매우 크다.

 

   사람들이 모두 족보가 없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며, 시골 천한 사람으로서 군역을 면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뇌

   물을주고 거짓으로 이름을 넣었으니, 보첩(譜牒)의 잡되고 어지러움이 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근래에 항간(巷間)에 어떤 사람이 여러 집안의 족보를 모아서 집에 은밀히 감추었다가, 자기 조상의 계보를 알지

   못하여 어떤 일가 집에 붙으려 하는 자가 많은 뇌물을 들고 오면 자손이 없거나 자손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자를 골

   라서 이름자를 바꾸고 세대를 적당히 조절하여 주었다.

 

   여러 집안의 족보 중에서 구보(舊譜)에는 후손이 없다고 되었는데 자손이 아무 지방에 산다면서 단자(單子)를 만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이런 유이다. 이 때문에 성과 관이 알려지지 않았던 자가 점차로 높은 문벌과 영예로

   운 관향(貫鄕)으로 옮겨 붙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세상 도의에 하나의 큰 변고가 아니랴.

 

   인륜을 문란하게 하고 세상을 속임은 왕법(王法)으로 반드시 죽여야 하는데, 엄벌하지 않아도 괴상하게 여기지

   않음은 무엇 때문일까. 《여술보》

 

○ 새로 간행한 행주기씨(幸州奇氏) 족보는 기자(箕子) 이후의 세대를 41대까지 기록하였다.

    대개 주(周) 나라 무왕(武王) 기묘년에 기자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한(漢) 나라 혜제(惠帝) 정미년에 기준

    (箕準)이 마한(馬韓)이라고 하였으니, 합하여 9백 29년이 된다. 그런데 지금 이 보첩에 기록된 41대는 1천 36

    년이 되니 의심스러운 것의 첫째이다.

 

    또 41대 중에 《동사(東史)》에는 기부(箕否)ㆍ기준(箕準)이 있는데, 여기에는 기부(箕否)조차 없으니 의심스

    러운 것의 둘째이다. 또 삼국 시대 중엽 이후에 비로소 시호(諡號)를 내리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 여기에 기록된

    것은 모두 시호인듯하니 의심스러운 것의 셋째이다.

 

   이것은 반드시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가 전거(典據)가 확실치 못한 것을 꾸며내어서 세상을 속인 것인데, 간행

   (刊行)하는 보첩(譜牒)에 기재하였으니 괴이하다.《기년아람(紀年兒覽)》

 

○ 창원(昌原) 공씨(孔氏)의 시조(始祖)는 공소(孔紹)이다. 공소의 아들은 노(帑)이며, 노의 아들은 중랑장(中郞

     將) 공백(孔伯)ㆍ어촌(漁村) 공부(孔俯)ㆍ서령(署令) 공숙(孔俶) 등 셋이다. 공백은 곧 이예(李藝)의 사위이고,

    이예는 곧 중랑사(中郞使) 문화(文化) 유인수(柳仁脩)의 사위이다.

 

   문화유씨(文化柳氏)의 가정 연간에 간행된 보첩에 인수(仁洙-府使)의 밑에 공백의 자손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

   였으므로 상고하여 증거 할 만하였다. 공기(孔頎) 형제는 곧 공백의 아들인 성길(成吉)의 아들이다.

 

   내가 창원공씨(昌原孔氏)가 간행한 족보를 한 권 얻어 보니 더럽고 지저분하여 논의할 것이 못 되었는데, 공부(孔

   俯)의 형제인 공백ㆍ공숙 두 사람은 없고, 다만 공부ㆍ공은(孔㒚)이 있었다.

 

   다른 책에는 공부는 자손이 없다고 하였으나 공서린(孔瑞麟-大司憲)은 곧 공숙(孔俶)의 증손인데 지금 이 보책

   에는 공석ㆍ공기가 공부의 증손으로 되었고, 공부의 밑과 성길의 위에 공달(孔達)이라는 한 대(代)가 있으며, 또

   공서린(孔瑞麟)은 공기의 아우인 분(賁)의 5대손(孫)으로 되었고, “숙(俶)”자를 “숙(淑)”자로 적었다.

 

   과방(科榜)을 살펴보면, 기(頎)는 세종 정묘년에 과거하였고, 서린(瑞麟)은 중종 정묘년에 과거하였으니 그 동안

   이 어찌 5대나 되었을 이치가 있을 것인가. 서린은 곧 어촌(漁村)의 종증손(從曾孫)인데, 지금 이 보첩에는 어촌

   의 팔대손(八代孫)이라고 하니 더구나 이럴 이치가 없다.

 

   또 공기가 어촌의 증손이라고 할 것 같으면 비록 일찍 벼슬길에 올랐다 하더라도 세종 정묘년 과거에 올랐을 이치

   가 어찌 있을 것인가. 또 공종주(孔宗周)가 은(㒚)의 증손으로 되었는데, 종주(宗周)는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과거하였으니 어촌의 종증손이라는 것은 더구나 말이 안 된다.

 

   이같은 것은 빨리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데, 모두 이 가정(嘉靖) 연간의 유씨의 족보에 따라 시정하는 것이 마땅하

   다. 《기년아람(紀年兒覽)》

 

[문헌자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후기 역사가 이긍익(李肯翊 : 1736~1806)이 지은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로 된 역사책으로, 조선 태조이

   래, 현종까지의 400여 가지에 달하는 중요한 역사적 야사(野史)자료를 수집분류하여 사견(私見)이 섞이지 않은

   공정한 필치로 59권 42책으로 엮었다.

 

출처 : 순흥 안씨문숙공파종회 |작성자 치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