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윤씨(南原尹氏)의 시조는 윤관(尹瓘)의 증손 위(威)이다.
신종 때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호남안렴사(湖南按廉使-從二品으로 오늘날의 도지사)가 되어 남원의 적을 토평하고, 남원군에 봉해진 뒤, 자손들이 관적을 남원으로 하였다.
● 윤형(尹衡)
(고증자료 조사할것).
형조(刑曹),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를 지냈다.
[문과]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
[문과] 중종(中宗) 21년(1526) 병술(丙戌) 중시(重試) 병과(丙科) 4위
[생원진사시] 연산군(燕山君) 2년(1496) 병진(丙辰)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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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섬(尹暹)
[생졸년] 1561년(명종 16) ~ 1592년(선조 25)
[문과] 선조(宣祖) 16년(1583) 계미(癸未) 별시(別試) 을과(乙科) 1위/합격연령 : 23세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진(如進), 호는 과재(果齋) 지사(知事) 우신(又新)의 아들이다.
1587년(선조 20)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태조의 조상(祖上)이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아, 그 공으로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교리(校理-正.從五品)로 있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 용인이씨)의 종사관(從事官-從六品)이 되어 싸우다가 상주성(尙州城)에서 전사하였다. 유고로 시 22수와 대책(對策) 1편이 《삼절유고 三節遺稿》에 전한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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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계(尹棨)
[생졸년] 1583년(선조 16)∼1636(인조14).
[문과] 인조(仁祖) 5년(1627) 정묘(丁卯) 강화정시(江華庭試) 병과(丙科) 2위/합격연령 : 25世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16위/합격연령 : 22世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新谷). 교리(校理-正·從五品) 섬(暹)의 손자이며, 현감(縣監-從六品) 형갑(衡甲)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상소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다.
같은해 정시문과(增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전적(典籍-正六品)·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正·從五品)를 지냈다.
1629년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이 되었고, 1636년에 남양부사(南陽府使-從三品)가 되었다.
같은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다. 청병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몸에 난도질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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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집(尹集)
[생졸년]1606년(선조 39)∼1637년(인조 15).
[문과] 인조(仁祖) 9년(1631) 신미(辛未) 별시(別試) 을과(乙科) 1위-합격연령 : 26世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5년(162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6위-합격연령 : 22세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 고산(高山). 현감(縣監-從六品) 형갑(衡甲)의 아들이며, 남양부사(南陽府使) 계(棨)의 아우이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따라 공부하여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설서(說書-正七品)가 되고, 1636년 이조정랑(吏曹正郞-正五品)· 부교리(副校理-從五品)를 거쳐 교리(校理-正·從五品)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오달제(吳達濟)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入對)하여 승지(承旨-正三品)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하여 사필(史筆)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진회(秦檜)와 같은 대간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하였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하였으며, 국왕이 대간(臺諫)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여 그는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하여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여 청병이 오히려 감복하여 존경하였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 홍익한(洪翼漢)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뒤에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高靈)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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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휴(尹鐫)
[생졸년] 1617년(광해군 9)∼1680년(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초명은 갱(鍞),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이조참의(吏曹參判-從二品)· 호(虎)의 증손으로, 희손(喜孫)의 손자이고, 대사헌(大司憲-從二品). 효전(孝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正三品).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1. 가계및 사우
아버지의 임지인 경주부(慶州府)의 관사에서 만득자(晩得子-늙어서 낳은 자식)로 태어났으며, 6년 위의 서형(庶兄) 영(鍈)이 있었다. 두 돌에 못 미쳐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돌아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여주의 옛집으로, 정묘· 병자 두차례의 호란 때에는 보은(報恩) 삼산(三山)의 외가로 가서 각각 피란하였다.
그리고 난 뒤에는 한때 선영이 있는 공주 유천(柳川)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선비가문으로서, 고조부인 자관(子寬)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으며, 증조부는 성균관생원으로 벼슬에 나아가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에 이르고, 할아버지는 이중호(李仲虎)를 사사하였다.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인 민순(閔純)에게 수학하고, 1617년(광해군 9)에 대사헌((大司憲-從二品)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從二品)으로 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아버지의 계열인 소북이 자멸하자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입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1635년(인조 13) 19세 때에 이미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송시열(宋時烈)과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宋時烈)이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權雋)그리고 이유(李維)· 장충함(張冲涵)· 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의 교분이 특별하였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 등 서인계열의 명유들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민정중(閔鼎重) 유중(維重)형제는 특히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2. 관직
1636년에 벼슬에 나아갈 뜻으로 만언소(萬言疏)를 초하였으나, 바로 그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신자(臣子)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책하여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다시 벼슬에 나아갈 뜻을 가진 것은 38년 뒤인 1674년(현종 15) 7월에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 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이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고 하여 대의소(大義疏)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마침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한 뒤인 이듬해 정월에 유일(遺逸)로서 정4품벼슬인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正四品)의 직을 받았다. 이후 5개월 만에 대사헌(大司憲-從二品에 오르고, 이어서 판서(判書-正二品)직을 몇 차례 거쳐 1679년(숙종 5) 9월에 우찬성(右贊成-從一品)에 올랐다.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庚申換局)의 정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3. 예송에서 남인지원
그는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을 통하여 서인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기해 예송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宋時烈)의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하였으며,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남인으로서 그는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하여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일세를 이루었다. 재직중의 업적으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萬科)를 설행하는 한편, 병거(兵車: 戰車)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 보급하고자 한 것 등은 모두 그의 평생의 신념이던 북벌을 실현시키려는 뜻에서였다.
그 중에 군권(軍權)의 통합을 기한 도체찰사부의 설치는 서인 및 종척인 김석주(金錫胄) 등의 반발을 사서 경신환국이 일어나게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4. 학문과 저술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포의로서 보내어 정치적인 면보다도 학문적인 업적이 더 많았다.
1638년 〈사단칠정인심도심설(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이기(理氣)· 심성(心性)의 문제에 대하여 일가견을 가졌다.
그뒤 《중용》·《대학》·《효경》·《상서》·《주례》·《예기》·《춘추》 등 여러 경서들에 대한 자신의 분장(分章)·분구(分句)·해석을 가한 《독서기(讀書記)》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저술은 20대 유천시절에 〈홍범설 洪範說〉·〈주례설 周禮說〉·〈중용설 中庸說〉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울 하헌시절에 〈효경장구고이 孝經章句攷異〉·〈대학설 大學說〉·〈중용장구보록서 中庸章句補錄序〉·〈중용대학후설 中庸大學後說〉 등을지어 마무리된 일생의 역저로서, 조선 유학사상으로도 매우 중요시되는 업적이다.
그는 주자(朱子)가 성학(聖學)발전에 최대의 공로를 세웠다고 높이 평가하는 한편, 후학들이 성학 발전에 기여하는 길은 주자가 일생 동안 학인(學人)의 자세로 일관하여 새로운 업적을 이루었듯이 선유의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라는 견지에서 새로운 분장·분구 및 해석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학문자세는 처음에는 당색을 초월하여 칭양 받았으나, 나중에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받았다. 이밖에 〈현종대왕행장(顯宗大王行狀)〉·〈가어주수설해(家語舟水說解)〉·〈어제주수도설후(御製舟水圖說後識)〉·〈전례사의(典禮私儀)〉·〈제진공고직장도설(製進公孤職掌圖說)〉·〈만필(漫筆)〉·〈통제사이충무공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중간화담집서(重刊花潭集序)〉 등의 글들이 중요시된다.
그의 저술들은 문집간행을 위하여 하제(夏濟)·경제(景濟) 두 아들이 이미 정리하였으나, 18세기 이후 정치적 적대세력인 서인과 노론계열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햇빛을 보지 못하고, 1927년에야 진주 용강서당(龍江書堂)에서 처음으로 《백호문집(白湖文集)》을 석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문집은 중요저술인 《독서기》가 빠진 것을 비롯하여 결함이 많았으나, 1974년에 직계손 용진(容鎭)에 의하여 비전(祕傳)의 원고들을 모두 망라한 《백호전서(白湖全書)》가 출판되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記言 ◇宋子大全 ◇儒敎淵源
◇魯西遺稿 ◇白湖全書 ◇白湖尹鑴硏究(韓㳓劤, 歷史學報 15·16·19, 1961·1962)
◇白湖尹鑴의 四端七情人心道心說(韓㳓劤, 李相佰博士回甲記念論叢, 1964)
◇白湖全書解題(韓榮國·李泰鎭, 1974)
◇十七世紀朝鮮における正統と異端―宋時烈と 尹鑴―(三浦國雄, 朝鮮學報 102,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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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행임(尹行恁)
[문과] 정조(正祖) 6년(1782) 임인(壬寅) 정시(庭試) 병과(丙科) 3위/합격연령 : 21세
1762년(영조 38) - 1801년(순조 1). 초명은 행임(行任). 자는 성보(聖甫), 호는 석재(碩齋). 용안군(龍安君) 종주(宗柱)의 손자이고, 익찬(翊贊) 염(琰)의 아들이다.
1782년(정조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正九品)· 주서(注書-正七品)를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어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正九品)에 임명되었다. 시파(時派)로서 1788년 민치화(閔致和)와 더불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였다는 벽파(僻派)의 탄핵을 받아 성환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從六品)으로 복직되었으며 1792년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에 이르렀다. 그해 대사간(大司諫-正三品)·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를 거쳐, 이듬해 비변사부제조로 특차되었다가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로 복직되었으나 벽파의 공격으로 제학(提學-從二品) 정민시(鄭民始)와 함께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1794년 유배에서 풀려나와 서유방(徐有防)· 이시수(李時秀) 등과 함께 정리사(整理使)가 되었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로 재차 임명되었으나 황단대향(皇壇大享)의 헌관으로 의빈(儀賓)을 전차(塡差)하였다 하여 파면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 도승지(都承旨-正三品)에 임명되었고, 선혜청제조· 관상감제조·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從二品)을 거쳐 실록청이 개국될 때 양관 대제학(大提學-正二品)을 겸하였다.
이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시파를 추방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신유박해로 강진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예조판서(禮曹判書-正二品)·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從二品)를 역임하였다.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從二品)로 재직할 때 척신 김조순(金祖淳)의 사주를 받은 옥당(玉堂)으로부터 서학을 신봉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신지도에 안치되었다가 곧 참형당하였다. 헌종초에 신원되었고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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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현(尹定鉉)
[생졸년] 1793년(정조 17)∼1874년(고종 11).
[문과] 헌종(憲宗) 9년(184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위/합격연령 : 51세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계우(季愚), 호는 침계(梣溪). 예조판서(禮曹判書-正二品)를 지낸 행임(行恁)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성균관에서 행한 특별시험 황감응제(黃柑應製)에 뽑혀, 1843년 식년문과 전시(殿試)에 직부(直赴), 급제하였다.
51세의 나이로 늦게 출사하였으나 이듬해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正九品)에 뽑혀 들어간 뒤 학문· 문장의 조예와 가문적 배경으로 인하여 급속히 승진하였다.
2년 뒤인 1846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正三品)을 거쳐 이듬해 정월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라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從二品)을 역임하고, 1848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從二品)로 나갔다가 1년 만인 1849년 2월 병조판서(兵曹判書-正二品)가 되었다.
과거급제 후 6년 만에 판서(判書-正二品에 오른 것이다.
이후 이조(吏曹)· 예조(禮曹). 형조(刑曹)의 판서判書-正二品를 두루 거치고, 1856년(철종 7) 9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從一品)를 겸직하였으며, 11월에는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從二品)이 되었다.
판서가 된 뒤 줄곧 비변사당상관(備邊司堂上官-正三品)을 겸임하였는데, 특히 호남구관당상(湖南句管堂上)을 오래 지냈다. 1858년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正二品)·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從一品)등의 명예직에 임명되었다가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그 덕망이 널리 알려졌고,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비문에 능하였다. 문집으로 《침계유고》가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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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병정(尹秉鼎)
[생졸년] 1822년(순조 22) ~ 1889년(고종 26).
[문과] 철종(哲宗) 2년(1851) 신해(辛亥) 정시(庭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합격연령 : 30세
[생원진사시] 철종(哲宗) 1년(1850)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진사 1등(一等) 3위/합격연령 : 29세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홍(士弘), 호는 파강(巴江), 태주(泰周)의 아들. 1851년 문과 정시에 갑과로 급제하고 훈련원 정(訓鍊院正-正三品)을 거쳐 1857년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재직 중에 암행어사 이정현의 탄핵으로 파직당했다.
그후 다시 등용되어 1861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조참의. 대사간(大司諫). 승지. 강원도 관찰사를 안동 김씨 세력에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였다. 1885년 이조 판서. 한성부 판윤을 재임한 뒤 공조판서로 문과초시의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과폐(科弊)로 인하여 유배의 명을 받았다가 한달 뒤에 석방되었다.
1883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된 뒤, 이조판서(吏曹判書), 한성부 판윤, 제학(提學), 판의금부사.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유신환(兪莘煥)의 문인(文人)으로 그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으며, 윤정현(定鉉)에게도 수학하였다. 저서로는「파강유고(巴江遺稿)」가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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