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야촌(1) 2011. 5. 22. 03:03

■ 소진(蘇秦, BC 300 ~ 280 /활동연대) - 유세가(遊說家)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 하남성 낙양(河南省 洛陽) 출신. 제(齊)나라의 귀곡자(鬼谷子)에게 사사(賜死)하였다. 

처음 진(秦)나라의 혜왕(惠王)을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뒤에 연(燕)나라의 문후(文侯), 조(趙)나라의 숙후(肅侯), 한(韓)나라의 선혜왕(宣惠王), 위(魏)나라의 양왕(襄王), 제(齊)나라의 선왕(宣王),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을 각각 설득하여, 이 6국의 연합을 성공시켰다(合從).

 

6국이 세로로 나란히 결속하여 서쪽의 진(秦)나라에 대항하려는 것으로, 소진 스스로 종약(縱約)의 우두머리가 되어, 6국의상(相)을 겸하고, 종약(縱約)의 서(誓)를 진(秦)나라에 보냄으로써 진(秦)나라는 수십 년간 동방진출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 안되어 동서연형설(東西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때문에 합종(合從)이 깨져 제(齊)나라로 피신(避身)하였는데, 그 곳에서 자객(刺客)에게 피살(被殺)되었다. 과거 동양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을 소진(蘇秦)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소진(蘇秦)은 민간의 미천(微賤)한 데서 몸을 일으켜 육국(六國)을 연결하여 종(縱)적인 맹약(盟約)을 맺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智慧)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진(蘇秦)                                            ↑전국시대 형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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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의[張儀, BC 329 ~ 307(활동연대)] 유세가(遊說家)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정치가. 유세객(遊說客). 위(魏)나라 출신.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에게 사사(賜死)했다. 초(楚)나라에서 유세했을 때 초(楚)나라 정승(政丞)의 옥(玉)을 훔쳤다는 혐의(嫌疑)로 수백 대의 태장[笞杖-볼기치는 형구(刑具)]을 맞았기 때문에 아내가 유세를 중단하자고 권했지만, <내 혀만 있으면 걱정 없다>고 했던 고사는 유명하다.

 

소진(蘇秦)이 그의 합종책(合縱策)을 유지(維持)하기 위한 책략(策略)으로 장의를 진(秦)나라에 보내 혜왕(惠王)을 섬기게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혜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고 진(秦)나라를 위하여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제(齊), 초(楚)등 6개 나라에서 유세하여 각각 진(秦)나라와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은 연형책[連衡策(서쪽의 진나라와 동쪽의 6개 나라가 횡으로 동맹한다는 뜻)]을 성공시켜 합종책(合從策)을 깼다.

 

혜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에게는 신임을 얻지 못했고 신하들로부터도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위(魏)나라로 도피하여 정승(政丞)으로 있다가 1년 후에 죽었다. 소진과 함께 제자백가 종횡가(諸子百家 縱橫家)의 한 사람이다.

 

장의는 진(秦)나라를 위하여 외교적인 활동을 많이 하였다. 소위 연횡책이다. 소진과 장의 두 사람은 변설의 대가이나 인간적인 성품으로는 존중받지 못하였다. 

 

 








장의열전(張儀列傳)에서                                ↑장의열전(張儀列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