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연원(慶州李氏淵源)
1. 시조탄강(始祖誕降)
전한(前漢) 무제(武帝) 원수(元狩) 6년 갑자(甲子: 서기전 117)에 하늘에서 육대인(六大人)을 경주(慶州) 땅에 탄강(誕降)시켜 육촌(六村)의 장(長)을 삼았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니 촌장(村長)은 알평(閼平)으로 처음 표암봉(瓢巖峰)에 강림(降臨)하였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忖)이니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道利)로 처음 형산(兄山)에 강림하였고,
셋째는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니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 화산(花山)에 강림하였고,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니 촌장은 구례마(俱禮馬)로 처음 이산(伊山)에 강림 하였고,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이니 촌장은 지타(祇沱)로 명활산(明活山)에 강림하였고,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니 촌장은 호진(虎珍)으로 처음 금강산(金剛山)에 강림(降臨)하였다.
2. 입군주(立君主)
전한(前漢)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 서기전 69)년 3월 1일에 여섯분의 촌장과 더불어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에 모였다가 숲 사이에 흰 말이 구부려 절하는 모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보니 흰 말은 보이지 않고, 박(瓠 : 표주박)같이 생긴 큰 알이 있어 깨어보니 어린 아이가 있었다.
이점을 이상히 여긴 육촌장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이 아이가 13세가 됨에 모든 것이 우뚝하였다.
그 아이의 태어남이 신이(神異)하여 육대인(六大人)이 그 아이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 나라의 이름을 서나벌(徐那伐 : 지증왕 4년에 신라로 고침)이라 하니 즉 혁거세(赫居世)이다.
육촌장(六村長)이 모두 좌명공신(佐命功臣 : 천명을 받아 임금이 될 사람을 도운 공로가 있는 신하)이 되니 이때가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 서기전 57)년 여름 4월이다.
3. 사성(賜姓)
유리왕(儒理王) 9년 임진(壬辰,서기 32) 봄에 부명(部名)을 고칠때에 육대인(六大人)의 후손에게 성(姓)을 내리니,
양산부(楊山部)를 급양(及梁)으로 하고 성(姓)을 이씨(李氏)로 주고,
고허부(高墟部)를 사양(沙梁)으로 하고 성을 최씨(崔氏)로 주고,
대수부(大樹部)를 점양(漸梁)으로 하고 성을 손씨(孫氏)로 주고,
우진부(于珍部)를 본피(本彼)로 하고 성을 정씨(鄭氏 : 지백호의 현손인 동충때)로 주고,
가리부(加利部)를 한지(漢祇)로 하고 성을 배씨(裵氏)로 주고,
명활부(明活部)를 습비(習比)로 하고 성을 설씨(薛氏)로 주었다.
4. 증시(贈諡) 및 추봉(追封)
법흥왕(法興王) 3년 병신(丙申 : 서기 516)에 육부장(六部長)에게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였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3년 병진(丙辰 : 서기 6546)에 육부장(六部長)을 왕(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알평(閼平)의 자(字)는 천서(天瑞)니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고 은열왕(恩烈王)으로 봉하였다.
소벌도리(蘇伐都利)의 자(字)는 당운(當雲)이니 시호(諡號)는 충선(忠宣)이고 문열왕(文烈王)으로 봉하였다.
구례마(俱禮馬)의 자(字)는 경운(景雲)이니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고 문의왕(文義王)으로 봉하여다.
지백호(智伯虎)의 자(字)는 인세(仁世)니 시호(諡號)는 문화(文和)이고 감문왕(甘文王)으로 봉하였다.
지타(祇沱)의 자(字)는 즙문(葺文)이니 시호(諡號)는 문양(文讓)이고 장열왕(壯烈王)으로 봉하였다.
호진(虎珍)의 자(字)는 백양(白楊)이니 시호(諡號)는 무신(武信)이고 장무왕(壯武王)으로 봉하였다.
5. 철향(腏享)
광복후(光復後) 24년(1971)에 경주(慶州)의 관민(官民)이 육촌장(六村長)의 개국(開國)의 공(功)을 기리는 뜻에서 경주시(慶州市) 탑정동(塔井洞) 나정(蘿井)에 촌장각(村長閣)을 세워 묘(廟)는 입덕묘(立德廟)라 하고 재(齋)는 양산재(楊山齋)라 하여 육촌장을 철향하니 그 위차(位次)에 있어
첫째는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이고
둘째는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忖長)이고
셋째는 자산진지촌장(觜山珍支村長)이고
넷째는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이고
다섯째는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이고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장(明活山高耶村長)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1787년(정조 11) 후손 이집성[李集星 : 1741년(영조 17)~1794년(정조 18)]이 영천(永川-오늘날 영주, 영양)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표암(瓢巖)이라는 두 글자를 바위에 각자(刻字)하고‚ 1806년(순조 6)에는 부근에 세거(世居)하던 당령(掌令) 이진택(李鎭宅 :1738-1805)과 오은공 이경일(鰲恩公 李敬一 : 1734-1820), 파서공(琶西公) 이집두[李集斗 :1744(영조 20)-1820(순조 20))] 등이 종중에 건의하여 비(碑)와 비각(碑閣)을 세우고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거행하게 되었다.
그 후 1846년(헌종 12)에는 동천공 이계조(桐泉公 李啓朝 : 1793-1856)가 비각(碑閣)을 중수(重修)하고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 : 1814-1888)등이 그 경위를 기록하였으며‚ 1878년(고종 15)의 수해로 말미암아 비(碑)와 비각(碑閣)이 피해를 입게 되자 이듬해인 1879년(고종 16)에 연산현감蓬山縣監) 이한정(李漢井)이 중심이 되어 비(碑)와 비각(碑閣)을 표암(瓢巖) 정상으로 이건(移建)하였다.
그리고 비각(碑閣)의 보수와 제사 등에 소요되는 경비를 추렴하고자 결성된 화수계(花樹稧)가 근간이 되어 1921년에 5가(架) 15간(間)의 재실(齋室)을 건립하고 표암재(瓢巖齋)라 이름 하였다.
↑알평공(謁平公)을 모신 사당(祠堂)이 경주시 동천동에 있는 악강묘(嶽降廟)이고, 우측에 재실(齋室)
표암재(瓢巖齋)가 있다. 표암재의 뒷쪽 박 바위가 그분의 탄강지(誕降地)로서 문화재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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