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부(猝富), 명부(名富), 의부(義富)
「천석군」「만석군」할 때의 '군(君)'은 '임금 군(君)'자에서 비롯된 말이다.
옛날 사람들도 암암리에 부자(富者)를 임금과 같은 반열로 대접하였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군(君)이 제 역할을 못하면 '꾼'으로 전락한다. '노름꾼', '사기꾼'의 꾼이 바로 이 '꾼'이다.
졸부(猝富)는 꾼에 해당한다.
자기 먹고 마시는 데에만 돈을 쓰는 사람이 졸부이다.
어디에다 돈을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품격을 알 수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주 인색하면서도 자신의 밑구멍에 들어가는 돈에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 졸부이다. 이 졸부는 죽을 때도 나머지 재산을 자기앞수표로 바꾸어서 관 속에 넣고 가는 사람이다.
불가(佛家)의 고승들은 이런 사람들이 죽고 나면 금줄을 칭칭 감은 대맹이(큰 뱀)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금사망보의 과보를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옛날에 집을 고칠 때에 큰 구렁이가 나오면 어른들이 못 잡게 했던 것도 이런 구렁이를 재물신(財物神)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꿈에 큰 뱀이 보이면 돈 들어올 징조이다.
명부(名富)는 경주 최부잣집 같은 부자이다.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 없게 하고, 과객 대접을 후하게 하고, 흉년에 가난한 사람이 헐값에 내놓는 땅을 절대로 사지 말자고 다짐한 부자였다. 경주사람들은 최부자를 단순한 부자가 아닌 경주의 비공식 임금(君)으로 존중하였다.
명부 외에 의부(義富)도 있다. 의로운 일에 돈을 쓰는 부자가 의부이다. 진주시 지수면의 5백 년 부잣집이었던 허씨 집안이 여기에 해당한다.
만석 군이었던 허 씨 문중에서는 돈을 모아 의장답(義莊畓)을 만들었다. 일종의 공익재단이다. 흉년에 배고픈 사람 먹여주고, 공공사업에 돈을 썼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회사였던 백산상회를 출범시킬 때에도 허 씨들은 경주 최 부자와 함께 거금을 내놓았다.
오늘날 진주여고도 원래는 1930년대에 허 씨들이 세운 학교였다.
해방 후에 공립으로 내놓았지만 몇 년 전에도 소리 안 내고 허 씨들이 100억원을 다시 내놓았었다.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에도 허 씨들이 돈을 댔다.
이 집안 후손이 이번에 전경련회장으로 취임한 GS 허창수이다.
졸부(猝富)가 아닌 의부(義富) 집안의 후손이 '만석군연합회'인 전경련을 맡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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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이란?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을 말한다. 1923년 4월,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水平運動)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학찬(李學贊), 장지필(張志弼)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姜相鎬), 신현수(申鉉壽), 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했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했던 차별을 해소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형평사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지만, 내부 분열과 일제의 압력으로 10여 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주2]백정((白丁)
백정이라는 칭호는 고려시대에는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살업(屠殺業)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계층을 뜻하게 되었다.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해방의안'(解放議案)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백정들은 기와집에서 살거나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외출할 때는 상투를 틀지 않은 채 '패랭이'를 써야 했으며, 장례 때도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학교나 교회에서도 함께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고, 상민들과 떨어져 집단으로 거주했다. 더욱이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온존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
즉 민적(民籍)에 올릴 때 이름 앞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하거나 도한(屠漢)으로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주3] 수평운동(水平運動)
일본의 특수부락민인 에다(穢多) 계급의 해방운동으로 인간의 편견으로 말미암은 부당한 신분적 차별을 없애기 위한 사회운동으로서 1922년 결성되었다. 이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 백정의 형평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사진=GS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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