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춘당 송선생 준길 묘표
(同春堂 宋先生浚吉之墓表)
[생졸년] 1606년(선조 39) ~ 1672년(현종 13)』
외손 숭정대부 행 병조판서 민진후 근술
(外孫 崇政大夫 行 兵曹判書 閔鎭厚 謹述)
유명조선국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좨주 세자찬선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시 문정공 동춘당 송선생 묘표 음기
선생의 이름은 준길이요, 자는 명보이다. 선계는 은진에서 나왔다. 고려 판원사 대원의 후손이다. 명의라는 분은 사헌부 집단이었고 그 손자 유는 호가 쌍청당이다. 쌍청당의 증손은 이름이 여즙인데 이가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는 세영이며 조부는 응서인데 군수이다.
아버지는 이창인데 또한 군수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행첨추 은휘의 따님으로 사계 문원공은 그 종형이 된다. 선생께서 만력 병오년(1606년) 12월 28일에 한성에서 출생하였는데 신유년(1621년)에 어머니 김부인이 돌아갔다.
상을 마치고 문원공에게 나가 배우고 또한 우복 정 문장공의 문하에 들어가서 스승으로 섬겼다. 천계 갑자년(1624년)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정묘년(1627년)에 외간상을 당하였는데 상을 집행함에 있어 한결같이 의식에 맞게 하여 문원공이 장차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숭정 경오년(1630년)에 세마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임신년(1632년)에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돌아왔다. 병자년(1636년)에 조정 신하들이 문천(文薦)하여 예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미년(1643년)에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이로부터 출사하라는 교지가 자주 있었다. 을유년(1645년)에 상소하여 원손의 위호를 바르게 할 것과 문정공 김상헌을 불러들여 원손의 보도를 맡기라고 청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기축년(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여 제일 먼저 별유(別諭)를 내려 불렀다. 드디어 명을 받아 진선, 장령, 집의에 제수되었는데, 김자점의 벼슬을 빼앗고 귀양 보냄과 동시에 그와 접촉하는 무리들도 물리치라 청하였다.
경연관을 겸하여 경연에 출입하여 강론하였다. 경인년(1650년)에 휴가를 얻어 돌아왔고 을미년 (1655년)에 사도시 정이 되었다. 그리고 승지와 이조참의 겸 찬선에 올랐다. 편안히 올라오도록 수레를 보내 재촉하고는 이미 도착하자 접견하고 술을 베풀었다.
임금이 상을 내리고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세자의 학문이 발전한 것은 찬선의 공이다.’라고 하고 또 은밀히 차자로써 북벌의 뜻을 펼칠 것을 청하였다.
무술년(1658년)에 여가를 얻어 돌아왔는데 특별히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왕께서 편치 않다는 말을 듣고 궁궐에 나아가 기거하자 대사헌과 이조참판 겸좨주에 제수하였다. 기해년(1659년)에는 특별히 병조판서로 승진시켰다가 대사헌으로 옮겨 제수하였다.
현종께서 처음 이조판서에 임명하자 소매 속에 넣고 간 차자로 ‘가까운 종친들이 궁중에서 머물며 힘을 기르지 못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경자년(1660년)에 체직되어 참찬이 되었는데, 차자를 올려 자의대비 복제를 고쳐야 한다고 했다가 윤선도의 무고에 얽혀 드디어 돌아왔다. 사관을 보내고 또 특별히 도승지를 보내어 위로하며 만류하였으나 끝내 서울에 머무르지 않았다.
신축년(1661년)에 부르자 달려갔으나 효종의 대상일이 지나자 이내 돌아왔다. 을사년(1665년) 임금께서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 행궁에 입대하였다가 어가를 수행하여 도성으로 돌아와 원자 보양관이 되었다가 몇 달 만에 물러나 돌아왔다. 병오년(1666년)에 또 온천 행궁에 이르러 어가를 호종하여 가다가 도중에 사양하고 돌아왔다.
무신년(1668년)에 또 온천에 따라가다가 세자의 병이 급하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들어갔다. 기유년(1669년)에 왕이 온천으로 거둥하면서 도성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다. 왕의 행차가 돌아오자 여가를 얻어 돌아왔다.
경술년(1670년)에 세자의 관례에 참여하고 곧바로 돌아왔다. 이미 강(한강)을 건넜는데 임금과 동궁이 다 각별히 타이르고 힘써 만류하므로 잠시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임자년(1672년)에 병에 걸렸는데 스스로 고치기가 어려움을 알고 상소하여 허적의 간악한 죄상을 극언하자, 왕께서 기뻐하지 않았다.
병이 악화되어 또한 유서를 초고하였는데 ‘성현의 학문에 힘쓰고, 군자를 가까이 하며 소인을 멀리하라.’는 도리를 언급하였다.
임금께서 의원을 보내어 진찰할 때에는 이미 지각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12월 2일에 하세하자 왕께서 부음을 듣고 특별히 영의정을 증직하면서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였다. 연기 죽애리에 장사지냈는데, 후에 묘소의 징조가 이롭지 못하므로 세 번이나 이장하여 비로소 진잠 사점동 서쪽 언덕에 안장하니, 곧 경진년(1700년) 10월이었다.
이보다 앞서 여러 간사한 무리들이 임금이 유충함을 기화로 예송으로 함정을 만들어 벼슬을 추탈하고 형을 내리는 것이 심지어는 묘지에까지 이르렀다. 경신년(1680년)에 다시 풀려 특별히 벼슬을 되돌려 주고 또 적신을 논한 것이 징험이 있는 것으로 상을 내리고 장곡강의 고사에 따라 묘소에 제사를 내렸다.
또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려 문정이라 하고 사손에게 벼슬을 주도록 하는 한편 유고를 수집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연신이 이장할 것을 아뢰자 관리에게 시켜 이장 도구를 마련토록 하고 내전에서 중사를 보내 호상하게 하여 숭종(崇終)하는 의식에 더욱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평소 장구(이름만 사람의 머무른 자취)가 미쳤던 지역에 후학들이 조두를 마련하여 정성껏 봉사하였다.
부인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맑고 착하며 덕성이 어질고 도타우며 경서와 사기에 대략 통하였으므로 식견이 밝고 총명하였다. 어버이이게 효도하고 가장에게 순종하며 자제를 가르치는 데에는 법도가 있었다.
친척들에게는 성의껏 대하니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수신제가한 공은 부인의 내치로 이루어진 것이니, 참으로 부인의 아름다운 덕으로 아름다움에 짝한다고 하였다.
갑진년(1604년) 8월 27일에 태어나서 을미년(1655년) 7월 20일에 하세하였다. 처음에는 공주 땅에 장례하였다가 선생을 이장하면서 합장하였다. 아들 광식은 정랑이고 두 따님은 선비 나명좌와 여양부원군 민유중에게 출가하였다.
정랑의 아들 중 병문은 현감이고, 병하는 정랑이며 병원은 도사요, 병익은 전직 부사이다. 따님은 판관 원몽익의 아내가 되었고, 여양부원군의 아들 중 맏이는 곧 이 글을 쓰는 진후이며 다음은 진원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유수이다.
따님은 진사 이만창과 현령 신석화의 아내가 되었으며 인현왕후는 차례가 둘째이다. 병문의 양아들 요경도 벼슬을 받아 군수가 되었다. 내외 증손은 모두 70여 명이나 된다. 측실의 아들 광림은 현감이며, 광연과 광영이 있다. 광림과 광연이 또한 아들딸을 두었다.
아! 선생의 큰 덕과 대업을 소자가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엿보아 헤아리지 못할 것이로되 그 언행과 사적은 사람의 이목에 뚜렷이 알려져 있고 또한 사관이 기록한 글이 있어서 묘에 같이 묻혀 있으므로 진실로 금석에 새기는 것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명장과 뇌문을 구하지 말고 다만 작은 표석에 이름만 밝히라는 것이 선생의 유언이었다. 이에 우암 송선생이 지은 묘지에서 그 대략을 골라 대강 세계와 벼슬 경력과 낳고 죽은 해와 자녀의 이름을 작은 표석의 음기에 위와 같이 공경히 적는다.
숭정 기원 84년 신묘년(1711년) 정월 일
외손 숭정대부 행병조판서 민진후는 삼가 짓고
증손 조산대부 행의성현령을 지낸 민요좌는 삼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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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鎭岑 宋浚吉墓表
同春堂宋先生浚吉之墓
贈貞敬夫人晋州鄭氏 附左(表面)
(裏面)
有明朝鮮國正憲大夫議政府左叅贊兼成均館祭酒 世子贊善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諡文正公同春堂宋先生墓表陰記
先生諱浚吉。字明甫。系出恩津。高麗判院事諱大原之後。有諱明誼。司憲執端。其孫諱愉。號雙淸堂。雙淸之曾孫諱汝楫。寔先生之高祖。曾祖諱世英。祖諱應瑞。郡守。考諱爾昌。亦郡守。妣光山金氏。行僉樞殷輝之女。沙溪文元公其從兄也。先生以萬曆丙午十二月廿八日。生于漢師。辛酉。金夫人沒。沒喪。就學文元公。又委禽於愚伏鄭文莊公之門。仍師事之。天啓甲子。中司馬兩試。丁卯。丁外憂。執喪一如儀文。少有疑晦。必稟兩師門。文元公稱以將作禮家宗匠。崇禎庚午。除洗馬不就。壬申。差童蒙敎官。未幾謝歸。丙子。廷臣交薦。特除禮山縣監。不赴。癸未。除持平辭遞。自是召旨頻仍。乙酉。上疏請早正元孫位號。召致金文正公尙憲委以輔導。不報。己丑。孝廟卽位。首先別諭召之。遂拜命。除進善,掌令,執義。請竄金自點。幷論附麗之徒。兼經筵官。出入講論。庚寅。乞暇歸。乙未。除司䆃寺正。陞承旨,吏曹參議兼贊善。安車促召。旣至。引見宣醞。上嘗敎曰。世子進學。贊善之功也。上密箚請伸拱北之義。戊戌。乞暇歸。特陞戶曹參判。聞上違豫。赴闕起居。除大司憲,吏曹參判兼祭酒。己亥特陞兵曹判書。遞拜大憲,參贊。顯廟初。拜吏曹判書。袖箚請抑損近宗之留養宮中者。庚子。遞爲參贊。箚論慈懿大妃服制。被尹善道搆誣。遂歸。遣史官勉留。又特令都承旨追往挽止而終不留。辛丑。赴召。過孝廟祥日。乃歸。乙巳。上幸溫泉。入對行宮。隨駕還都。爲元子輔養官。居數月退歸。丙午。又詣溫宮。扈駕行。中路落後。戊申。又如之。及聞世子疾劇。遂入京。己酉。幸溫命留都。駕還乞暇歸。庚戌。入參世子冠禮。卽歸。已渡江。大朝及東宮皆別諭勉留。暫入旋還。壬子。感疾。自知難醫。上疏極言許積奸狀。上不悅。疾革。又草遺疏。勸勉聖學。仍及親君子遠小人之道。及上遣醫診視。則已不能知矣。竟以十二月二日易簀。訃聞。特贈領議政。且給葬需。葬于燕岐竹岸里。後以宅兆不利。凡三啓舊封。而始克永窆於鎭岑沙店洞酉向之原。卽庚辰十月也。先是。群姦欺上幼沖。以禮訟爲穽追謫。至及泉壤。庚申更化。特命復爵。且以嘗論賊臣有驗。依張曲江故事。賜祭于墓。又不待狀。而贈諡曰文正。錄用嗣孫。蒐刊遺稿。及是。筵臣白其移葬。命官庀窆具。內殿遣中使護喪。崇終之儀。益無憾矣。平日杖屨所及之地。後學多爲之俎豆虔奉焉。夫人稟質淸淑。德性仁厚。略通書史。識見明悟。孝於親。順於家長。敎子女有法。待親戚以誠。世謂先生修齊之功。夫人內治之成。允爲媲美而匹休云。生於甲辰八月廿七日。終於乙未七月廿日。初葬公州地。及先生遷奉而合祔焉。男光栻正郞。二女。適士人羅明佐,驪陽府院君閔維重。正郞男炳文縣監。炳夏正。炳遠都事。炳翼縣監。女爲縣監元夢翼妻。驪陽男長卽不肖鎭厚。次鎭遠。文科府使。女爲進士李晩昌,申錫華妻。而仁顯王后。於序居二。炳文繼后子堯卿。亦錄用爲縣監。內外曾玄摠三十餘。側室男光林察訪。光梴,光榮。林與梴亦有男女。嗚呼。先生之盛德大業。不肖旣不敢窺測萬一。而其言行事蹟。昭人耳目。又書在史官。可與天壤俱弊。則固無事乎金石之刻。況勿求銘狀誄文。只以小表揭姓名者。是先生之治命也。茲就尤菴宋先生所撰墓誌。撮其梗槩。略敍世系官歷生卒子姓。敬書于小表之陰如右。崇禎紀元之七十五年壬午六月日外孫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閔鎭厚。謹述。愚伏先生初諡文肅。後改今諡。
崇禎紀元之八十四年辛卯(1711年) 正月日
外孫崇政大夫行兵曹判書閔鎭厚謹述
曾孫朝散大夫行義城縣令堯佐謹書
동춘당집 > 同春堂先生別集卷之九 /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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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春堂宋公墓誌銘 - 宋時烈
崇禎壬子十二月初二日。同春先生宋公諱浚吉。字明甫。易簀于懷德縣之村舍。公治命曰。勿求銘狀誄文等。只以小表揭姓名。其孫炳文,炳夏,炳遠,炳翼等不敢違。雖門人知舊有言而皆不聽也。時烈獨謂曰。公之道德事實。旣在人耳目。將愈久益顯。而又書在史官。余又嘗爲遺事一通。以收其細大。則固無事於金石之鐫刻。然所謂幽誌者。朱夫子嘗曰。陵谷變遷。此誌先見。嗚呼。孔子之墓泗水尙逼。則其欲爲無窮之圖者。宜在於此。有此而不見猶可也。不幸焉有可見之日而無見焉。則吾恐百世之後。有受其責者矣。炳文等泣而言曰。敢不惟命。余方以妄論大禮。待刑癘土。而炳文等以其事屬余。余敢犯萬死之罪而爲之敍曰。公恩津人也。東方之宋。始自諱惟翊,天翊。惟翊籍礪山。而天翊則恩津云。高麗有判院事諱大原。自是斑斑而譜於世。其來懷德者執端諱明誼。其孫曰雙淸堂諱愉。其玄孫諱世英。生郡守諱應瑞。是生榮川郡守諱爾昌。榮川公娶僉樞金殷輝女。以萬曆丙午十二月廿八日。生公于漢師寓舍。隣舍有一官人來賀曰。公所得兒必貴人也。夜夢有一人持產時具曰。我天人也。將以此遺宋氏家云。時榮川公年已四十六而無嗣。及是宗黨相慶曰。公晩暮得男。而又絶異如此。豈非積善之報也。洎有知。敬信長者言。見長者。必斂容危坐。榮川公嘗灑掃室堂。坐公於客位而對之。公輒縮瑟不安而避之。稍長喜讀書。長者或以事闕課。則公必請之。雖夜不得則不寢。又好習字。未十歲。李竹窓時稷素善書。見之曰。汝已勝我矣。與隣兒交。必以書札往復。辭筆俱中度。人多取去而觀玩焉。辛酉。金夫人沒。榮川公愍其淸弱。凡飮食居處看護倍於平日。而其情文。亦自有可見者矣。沒喪。就學於文元公金先生長生。受小學家禮等書。天啓甲子。中司馬兩試。丁卯丁外憂。執喪一如儀文。少有疑晦。必稟於師門。文元公喜而酬答曰。此哥將作禮家宗匠也。先是癸亥。公委禽於鄭愚伏文肅公經世之門。文肅公亦期以遠到而常敬待焉。及是來弔。相與論難喪禮。殊亹亹焉。崇禎庚午。除翊衛司洗馬。不就。文元公嘉其志趣。聞文肅公勸之就。以書責之曰。宋某有志於學而不肯仕。其意甚善。而公欲降其志。無乃近於賊夫人之子乎。文肅公有媿謝語。公自是益委己於學。往來於二氏之門。日以進益。辛未。文元公歿。公仍師金文敬公集。公嘗曰。吾游金先生父子門久矣。妄謂規模宏大。無如老先生。條理精密。無如少先生。論者以爲知言云。壬申。差童蒙敎官。公以爲輒辭除命。不無求退獲進之嫌。遂黽勉就職。癸酉。聞文肅公捐館。卽謝歸會葬。喪之以師弟之服。丙子。上延訪人才。大臣以下薦公者多。又有重臣陳箚論列其學行之實。上特除禮山縣監。公不赴曰。非所敢當也。是冬。避兵至安陰。愛其山高水淸。居一年。始還鄕里。學徒日衆。時新經大亂。戎虜僭號。賢士大夫多處江湖間。日造公廬。質疑講道焉。癸未。有司憲府持平之命。辭遞。自是召旨頻仍。乙酉。昭顯世子薨。公適被召命。上疏辭。因請亟冊元孫。以繫人望。兼陳召致金文正公尙憲。委以敎養輔導之責。上時已屬意於孝宗大王。不報。顯示未安之意。白江李相公敬輿其意與公同而遠謫。人益爲公懼。而公固悠然也。自是終仁祖朝。一切廢置。樂靜趙公錫胤嘗爲公訟辨其忠讜而亦不入。己丑。孝宗大王卽位。人謂禍將不測。上首先別諭召公。京外莫不驚賀曰。此卓冠百王之盛事也。國其庶幾乎。公遂拜命。連除進善掌令。特賜月廩。陞拜執義。公感戴恩眷。自念新宁有大有爲之志。而收召士流。若不以此時殫竭心力。以輔聖德。則因循遷就之間。日失歲亡。負此好幾會。豈不爲千載之大恨乎。然四維不張。則不可以爲國。而曩者權臣執命。濁亂朝廷。而搢紳之趨附者頗多焉。若無激揚之擧。則終未有淸明之日矣。遂與同僚相議。請竄金自點及論其附麗之徒。遞復拜。承命封陵。例陞通政。臺諫以資格改正。玉堂請使兼經筵官。出入講論。允之。又賜衣資及帽掩廏馬。應旨上疏。又請虜變時失行婦女。許其夫離異改娶。時上方講中庸。公開析深奧。仍進規諷。上一皆傾聽。同入諸公。退必嘖嘖嘆曰。文義固其本業。何其於朝儀閑習如此也。庚寅正月。乞暇南歸。蓋自應召至是。除拜繹續。賜賚便蕃。公皆固辭不得然後始受。時自點等怨公讒構。虜人遣兵壓境。七使連續來嚇。事將不測。賴上以身自當。竟以解釋。然自是事機又大變矣。公旣歸。上思公啓沃之益。召旨連降。間有別諭。辭旨懇惻。又有米豆之賜。乙未。陞通政拜承政院承旨,吏曹參議。上必欲公上來。歷四月然後始遞參議。先是仁祖大王爲文敬公。特置侍講院贊善。至是除公吏議。俾兼是職。而別諭召之。特命乘轎。公知上意繾綣。丁酉七月。遂入京。上聞公至喜甚。卽引見宣醞。世子亦以酒饌勞之。世子自是課學甚勤。上面諭曰。世子進學。贊善之功也。宮掖人皆言之矣。又因冬至。極陳陽長復善之道。上批有曰。日新之目有八。誠所謂責難陳善之義。十二月。上密疏請以計潛通中朝。以伸拱北之義。其事祕。人不得而知也。戊戌二月。乞暇南歸。上賜以所御貂衣。仍命諭意於賤臣時烈。已而特陞戶曹參判。再辭不許。七月。聞上違豫。赴闕起居。除司憲府大司憲。仍帶贊善兼成均館祭酒。己亥三月。特拜兵曹判書。屢辭。又上箚論時務然後出謝。復辭得遞。由大司憲遞拜議政府參贊。五月。孝宗大王昇遐。顯宗卽位。以大司憲。論山陵等事。拜吏曹判書。時梓宮在殯。上下哀遑。而猶力辭不已。上倚公亦甚重。不敢終辭。遂拜命。箚論五禮儀節目。自孝廟朝。撫養楨,柟等如己出。至是氣勢益張。出入無復防限。公亟以疏請加抑損。疏留中不下。山陵復土。又辭遞爲參贊。庚子。論大王大妃服制。其略曰。諸大臣之意皆謂我朝典禮。實無爲子三年之制。其在古禮。倘不十分明白。或有他日之悔。則無寧遵用國典之爲愈。故臣亦無異見。遂以期制爲定矣。今者掌令許穆之疏。引經據義。論說甚勤。臣於此論。雖不敢索言相難。而亦有所不能無疑者。蓋儀禮父爲長子。通上下而言者也。若如穆之說。則設令大夫士適妻所生有十餘子。而第一子死。其父爲之服三年。第二子死。其父又服三年。不幸而第三死。第四第五六死。皆爲之服三年。竊恐禮意決不如此也。且註疏。旣明言第二適子以下。通謂庶子之義。而其下文謂體而不正。卽庶子爲後者也。此庶子。穆必以妾子當之。果爾則疏家之說。前後自相逕庭。似無是理。而期年條所謂長子長子婦等處。穆亦皆以妾子爲斷。未知禮意果如是否。此臣之所未能曉也。竊疑疏所謂第一子死者。卽下文所謂適子有廢疾。若他故若死而無子。不受重。不得三年者也。第一子之不受重者死。則取適妻所生第二長者。立以爲後。亦名長子。不幸而又死。則旣不爲第一子服三年。故應爲第二爲後者服三年。若第一子不至有廢疾無子。旣爲之服三年。則第二子雖他日陞爲後。而亦不服三年。只服期。卽下文所謂體而不正是也。若妾子爲後。則雖第一子廢疾無子而死。不服三年。而亦不爲妾子服三年。故上文特言適妻所生以明之。臣雖不敢質言。而無乃禮意自如是也耶。又論練祭變禮。被尹善道搆誣。上疏待罪。遂南歸。上遣史官勉留。又特命都承旨疾速追往挽止。館學章甫。亦上疏請留。則御批益隆重。而公終不敢留連。有司憲府吏曹之命。辛丑。又以參贊召。遂入京。三月。疏論時事。四月。趙絅疏斥甚深。公以疏自劾。五月初四日。卽孝宗大王大祥也。初五日乞退。上留之甚懇。遂上箚陳時事。七月。始許歸。癸卯正月。與時烈聯名疏進規諫。又以疏辭大憲之命。因請以延平李先生從祀文廟。幷及本朝文成李公,文簡成公。洪宇遠紹述善道。上疏詆毀。公遂自劾。甲辰夏。上疏陳戒。冬。又論君德。乙巳夏。上幸溫泉。以大司憲入對行宮。隨駕還都。遞拜參贊。箚論輔養元子之道。遂置輔養官。以公處之。辭不許。又引文正公趙光祖,文元公李彥迪所論輔養之要。爲箚以進。及論廟樂之差。校進心經句讀。元子受學不懈。公亦盡心開導。十月退歸。丙午春。柳世哲等推演善道意。上疏持之益急。公入溫泉行朝自劾。扈駕行中路。以疾落後。八月。辭召旨。仍論奮發之要。其略曰。嗚呼。臣民之平昔蘄望於聖明者如何。謂宜興衰撥亂。嘉靖邦國。以維新舊命。慰答神人之望。而至今八年之間。天心未豫。災異荐臻。軍民交怨。國事日非。外侮內憂。靡有紀極。率是以往。其將稅駕何地。往歲七月之旬。忽有怪風之變。向來北塵之來逼。恰在其期月之時。其符驗之不僭。有如是者。人言風災應速。似亦非誣。近歲以來。多少變異。不知其幾。則又安知其應遲者。其禍愈大耶。此臣之所尤懼也。傳曰。有恥而後能知憤。知憤而後能自強。自強而後。能行其政令。保其國家。今番殿下所遭之困厄。實丙子以後所未有者。人心慘怛。國勢愈挫。而事過之後。恬嬉偸安。一循前套。殿下之不御經筵如舊。罕接臣隣如舊。委靡頹塌。因循姑息。又如舊。曾未聞一施措一政令。有憤恥自強底意思。噫。天未欲作新我東耶。何殿下之志氣苶然。甘聽伸縮於人至是耶。今日股肱之不能自保。固可痛哭處。萬一異時侵辱有大於此。則不知將何以應之。將何以處之。時蓋虜人來喝。羞辱備至。故公疏如此。丁未正月。乞致仕。校進小學諺解。以疏論事。又因黃壖捏誣。陳情自劾。戊申九月。入謝溫宮。因扈駕行中路移疾。聞世子疾劇遂入。世子疾瘳。公頻入兩筵。兩宮皆虛己以聽焉。己酉。進太極圖說。以明造化之本源。圖差祭官謁寧陵。以伸追慕之情。大駕南幸溫泉。命公後。進講書筵。暇日與諸生行鄕飮禮於泮宮。幸還。乞暇歸。歸時上引見。恩禮款洽。庚戌。世子行冠禮。遂膺召命。時適有湖南伯金澄是非之爭。公爲訟其冤狀。以致詆訶多端。冠禮畢。卽歸以渡江。大朝及東宮皆下諭。館學諸生又上章請上勉留。公遂還入少留。然已有左腹之入矣。遂申前懇。竟蒙許歸。俄遭凶人誣告之變。至於時烈則又加以馮異咸陽之說。上遣承旨慰諭勤至。然公猶不敢自安。詣近畿請罪。承批卽還。壬子四月感疾。自知難醫。遂上一疏。極言小人熒惑之害曰。殿下以尹敬敎之事。怒太暴聲太厲。命令失當。擧措顚錯。殿下何用如此聲氣於臺閣直言之臣乎。形勢所在。擧朝風靡。阿諛競進。慫臾迭作。終使殿下施之以千古所無之恩例。俾彼委蛇盤礴。還坐於百僚之首。其爲倖相地則至矣。其於聖明重貽千萬古千萬人譏且笑何哉。往在己酉。臺臣權格大觸天怒。其譴責八字。臣隣無不失色。臣與相臣鄭太和力言其非。遂命政院付標改之。今於敬敎之事。聖敎之發於忿懥者。非止一二。如所謂兇狡禽獸鬼心引類等語。中外共駭。誠願亟下明旨。依權格例。快施悔悟之意。召還敬敎。復置臺職。以旌直氣。國家其庶幾乎。臣嘗讀唐史。至德宗謂李泌曰。人言盧杞奸邪。朕則不知。泌對曰。此所以爲奸邪也。臣未嘗不掩卷而歎。德宗邪媚之惑。誠可爲後王之鑑戒。而泌之所對。何其切中而有味也。噫。今殿下不但不知而已也。臣每以三代聖王精一之傳。望於殿下。而今反駸駸於叔世事。此豈臣平昔所期者也。可爲痛哭之不足也。上不悅。十一月。疾尤革。又草遺疏。勸勉聖學。因極言親君子遠小人之道。時戶曹判書金壽興上言宜有恩命。上乃遣太醫。而公已不能知矣。訃聞。上驚悼。特贈領議政。優給葬需。於是館學儒生。相率擧哀。官居野處。無不相弔。子光栻先逝。炳文等與門人知舊以禮襲斂。癸丑二月。葬于燕岐竹岸里巽向之原。鄭夫人先歿而別葬于公州。女二人。長適士人羅明佐。次適判書閔維重。光栻官正郞。其一女爲士人元夢翼妻。公天資絶異。精明溫粹。瑩澈無瑕。色夷氣和。見者心醉。早從儒賢。得聞學問之方。孶孶勉勉。至老不已。蓋公渣滓自少。故不甚用力而易至融化。識見精透。故不費勤苦而自詣理致。心旣無疵。而所知克明。則其行於家者。孝親刑妻。敎子御下。各得其道。而最謹於喪制之節。大抵仁愛爲主。而禮以治之。故倫理克正。恩義克篤。皆可以爲後世法矣。丙丁以來。世道大變。則斂藏愈密。有確乎不拔之志。而乙酉一疏。爲世所諱人。甚危之。而公之守經之意則大矣。及孝廟臨御。少不介意。延聘禮遇。迥出常規。而公亦不存形跡。盡誠棐輔。匪躬蹇蹇。聖德益光。而公之賢愈著矣。庚寅之變。幾禍宗國。而公亦徊徨却步。復尋初服矣。逮孝廟末年。恩遇有加。由是感激。益思報效。自以尊周之義復讎之志。爲己任。不顧國力之萎弱。不憂吾勢之單寡。終始一心。如日星之昭。如河漢之東。此則可質於神明而無媿矣。至於顯考。則益盡隆師之禮。要使國人矜式。公亦竭心殫智。入論道德。出贊謨猷。時與靑衿在泮講誦。士類慶喜。相與彈冠矣。公於筵席。常以懲忿窒慾遷善改過。爲聖學切要之道。至於天理人欲之際。則尤反復丁寧。剖析微密。嘗於孝廟朝論舜,跖善利間不容髮之訓。公曰。今殿下恤民之政至矣。然如有一毫要譽之心參錯於其間。則其事雖善而其實則僞也。此天理人欲之分岐至微。而公私之道王伯之略所以相遠也。孝廟竦然俯答曰。此寡昧之所嘗猛省者也。蓋公於此着力旣深。故所以告於君者如此。據此一段。可以知公爲學之知要也。公難進易退之義。仰承朱門成法。前後爲持平者三。爲進善者六。爲執義贊善者皆七。爲大司憲者廿六。爲參贊者十二。爲吏書者三。三十年之間。恩旨未嘗不在。而公必量時揆理義然後動。故在朝之日。僅一歲餘矣。而其有輔於君德世道者大矣。公得力最在心經近思諸書。一切沿遡於洛閩之淵源。而又於先儒。最慕延平之質愨精明。常以不得祀於聖廟爲歉。於本朝則以李文純公滉爲終身師法之地。故卒逝之年。有夢見之作。豈精神感通而然歟。於此可見公之心志氣象之大槩也。然遇事正義。不顧利害。則又有賁育不可奪之節。故或失君上之志。而一番人仇嫉亦已極矣。豈其溫厚和平之中。自有正直剛大之氣耶。噫。以公之學之德。宜爲百世之宗師。而墓草再宿。禮訟仍爲禍阱。追謫之律。遽加於泉壤。而孝廟之盛德至善。亦爲之剝蝕。豈不痛哉。余與公自八九歲時傳服同案。以至白首而相與切磨。昔溫公有言吾與景仁。姓不同兄弟也。今公與余姓又同焉。則是但父母不同而已也。然余性偏駁滯泥。非不悅公。而終不能近似。是蓋氣質一定而不可易也。然溫公蜀公於鍾律。終不能相合。故余強引此自諉曰。不苟同是公高處。而在余則性相遠而然也。嗚呼。伊川嘗稱溫公曰。如其可贖。人百其身。死生旣極於哀榮。名德永高於今古。余於公亦云爾。崇禎乙卯十月日。宋時烈撰。
公所藏燕岐墓地勢卑濕。懼非久計。乃以丙辰十一月十八日。奉遷于懷德治南興農里甲坐庚向之原。以夫人祔焉。後五年庚申。上誅除奸凶。登崇俊良。用大臣言。復公官贈。又依張曲江故事。賜祭于墓。蓋思公嘗極論賊臣也。後贈諡文正。錄用炳文。有踰常例。炳夏,炳遠皆登仕籍。閔判書克誕聖女。歲辛酉。正位坤極。封判書爲驪陽府院君。夫人爲恩城府夫人。蓋公餘慶與自存焉。嗚呼盛哉。癸亥閏六月二十四日。時烈追書。
송자대전 > 宋子大全卷一百八十二 / 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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