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뉴스. 기사

민족시인 이상화

야촌(1) 2011. 3. 14. 02:05

영남일보

2005-01-04 09:57:09 입력

 

[이상화]3.1운동 때 대구서 만세운동 주도한 민족시인.ㅣ 경북 대구에 살고 지고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제52] 이상화

 

●글로 몸으로 일제에 저항

●3·1운동때 학생동원 대구서 만세운동주도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발표

●후진양성에도 힘써…광복2년 앞두고 숨져

●題字 : 토민 전진원

 

↑아상화시인 고택(대구 중구 계산동)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 가도다.
망각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아가도다.
자갈을 밥으로 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으면 단잠을 얽을 것을 인간을 만든 검아 하로일즉/ 차라리 주린목숨 뺏어가거라
('가장 비통한 기욕(祈慾)' <개벽>55, 1925년)

 

시인의 문학작품은 식민지 대중이 처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못내 등질 수 없었다.

시인 이상화(李相和 : 1901~1943, 호 : 尙火· 相華· 白啞)는 제국주의 지배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현실 사회의 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벌인 일제시기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이었다.

 

상화는 1901년 4월5일 대구 서문로 2가에서 경주 이씨 가문의 우남(又南)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 사이에서 4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화가 8세 되던 1907년에 사망하여, 어린 형제들은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들 형제는 백부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의 보살핌 속에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부 이동진(李東珍)은 구한말 무일푼에서 시작하여 서문시장의 시전(일종의 돈놀이)과 낙동강 무역을 통해 3천섬의 거부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제권을 장남에게 넘겼고, 이일우 역시 경제활동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자산을 늘려 나갔다. 이일우는 부호이면서도 당시 사회 변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중국 등지에서 수집한 수 십만권의 책을 확보하여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도서관을 열었다.

장지연, 장지필, 윤세복과 같은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지식인이 이곳에 모여들어 근대성에 관한 지식 활동을 펼쳤다.

 

그는 또한 서상돈과 더불어 인재 양성을 위해 시무학당(時務學堂),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와 같은 교육기관의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7년에는 대구지역을 거점으로 전국 각처로 퍼져나간 '국채 보상운동'을 주도했으며, 1908년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대구지회'에 가담하여 평의원, 총무를 역임했다. 상화의 어머니 김신자 또한 남편을 잃은 슬픔을 딛고 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녀는 '대한협회 대구지회'가 설립된 것을 계기로 1909년 '교육부인회'의 창립에 참여했으며, 달서여학교에 기부금 200원을 희사하고 '부인야학교'의 설립을 주도했다. 그녀는 청상(靑孀)의 고절(高節)을 지키면서도 대구지역의 근대적 여성운동의 선구적 위치에 서 있었다.

 

상화와 그의 형제들은 대구 계몽운동의 중심에 있던 집안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상화의 생애는 몇 번의 큰 굴곡과 변화를 거치면서 펼쳐졌다.

 

14세 때까지 대구의 한 사숙에서 공부한 상화는, 15세가 되던 해인 1915년 서울 중앙학교로 진학하였다.

이때 계동의 전진한(錢鎭漢)의 집에 하숙하면서, 야구선수로 활동할 만큼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끝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향한 다음, 강원도 일대를 유랑하였다.

 

동향의 친구 백기만에 따르면 상화는 1917년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과 더불어 프린트판 '거화(炬火)'를 출간하면서 시작(詩作)을 개시했다고 한다. 상화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백기만과 함께 계성학교와 대구고보의 학생을 동원하여 대구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자, 서울로 은신처를 옮겨 박태원(朴泰元)의 하숙집에서 한동안 숨어 지냈다.

그곳에서 영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박태원과 교유하면서 인생과 예술에 관한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해 10월 상화는 백부의 강권으로 충남 공주의 명문 서한보의 딸 서순애(徐順愛)와 결혼하였다.

상화는 21세 때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백조'동인이 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백조'창간호에 '말세의 희탄'(1922)을 발표하고, 1923년에 '나의 침실로'를 계속하여 발표하였다.

이때 상화는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일본으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한국인 학살 사건을 현장에서 직접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프랑스 유학에 대한 꿈을 접었다. 이후 상화는 서울에서 적극적인 문단활동을 벌이면서 식민지 현실을 노래하였다.

 

1925년 문학단체 '파스큘라'에 가담하고, 그 해 8월에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26년 '개벽' 70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 식민지시대의 대표적 저항시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1927년 상화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대구로 돌아 왔다. 그의 사랑방은 담교장으로 불리면서 많은 친구들이 모여 들었다. 상화는 대구의 진보적 성향의 청년들과 함께 식민지 현실에 관해 많은 토론을 벌이면서, 문학보다는 실천적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대구에서 발생하여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의열단 '이종암사건'(1927),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1927) 등에 각각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한편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된 '신간회 대구지회'에 참여하여 출판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지회' 내부의 좌파 계열의 청년들과 함께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투쟁을 지향하는 'ㄱ당'을 결성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형을 살아야 했다.

상화는 인재 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교육활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1928년 9월 대구의 노동야학원에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가 하면, 백부 이일우가 건립한 '우현서루'를 전신으로 하는 교남학교(嶠南學校-오늘날 대구 대륜중고들학교 전신))에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상화는 1940년 교단을 떠나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1941년 '문장' 25호에 '서러운 해조(諧調)'를 발표했고, '춘향전' 영역과 '국문학사' '프랑스 서시정석'의 집필 계획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위암으로 고생하던 상화는 생전에 염원했던 민족 광복을 2년 남짓 남겨둔 1943년 3월 21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가을 백기만 서동진과 같은 생전의 벗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묘비를 세웠다.

광복이 된지 3년이 지난 1948년, 대구의 문학단체 '죽순시인회'는 달성공원에 상화 시비를 세웠다.

이 시비는 한국 최초로 세워진 시비로 그의 대표작 '나의 침실로'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혁명가 형… 체육인 동생…아버지 일찍 여의고도 형제들 근현대사 큰 족적 상화의 형제들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근대 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어머니의 가르침과 백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맏형 청남(晴南) 상정(相定)은 1923년 중국 만주로 망명한 뒤 중국군 고위 장교와 임시정부의 의원을 역임하는 등, 한 평생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펼쳐나간 혁명가였다. 상정은 시·서·화에 모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표박기(飄泊記)'란 제목의 유고를 남긴 시인이자, 전각에도 뛰어난 예술가였다.

 

동생 상백(相佰 : 1904~1966)은 대구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에서 사회학, 철학, 역사학을 두루 익혔으며, 대학원에서 일본인 스승 쓰다(津田)로부터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유학 시절 그는 적극적인 체육활동을 펼쳐 일본 체육계를 대표하는 인사가 되었으며, 광복 이후 한국 체육의 발전과 국제 올림픽 활동에 큰 공헌을 남겼다.

 

상백은 일제 말기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했는가 하면, 광복 이후 여운형(呂運亨)이 사망할 때까지 '인민당'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막내 동생 상오(相旿: 1905~1969)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렵인으로 수렵, 야생동물, 개 등에 관련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렇듯 상화 형제들은 한결같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었다.

 


↑상화가 작고 2년 전인 1941년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상화, 충희(차남), 아내 서순애씨, 태희(3남), 처제, 뒷줄 서있는 소년은 장남 용희.

↑대구 두류공원 내 인물동산에 있는 상화 동상. 동상 옆에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구가 새겨져 있다.

 

대구매일신문

<2001년 04월 27일>

 

민족시인 상화탄생 100돌-(1)상화의 흔적찾기

 

28일(음력 4월5일)은 대구가 낳은 위대한 시인 상화(尙火)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 일제의 칼날에 맞선 저항 시로, 나라 잃은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은 독립투사로, 학생들에게 민족을 깨우쳐주던 스승으로 짧은 생을 불태운 시인 이상화(李相和)!.

 

빼앗긴 땅에 소생의 봄을 목놓아 불렀던 민족시인 '상화'를 배출한 대구는 그가 태어 난지 한 세기가 되도록 불멸의 정신을 이어갈 기념관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유산이 바로 도시의 경쟁력이 되는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려나가기 위한 첫걸음으로 상화를 재조명한다.

 

●편집자

지금부터 꼭 58년 전인 1943년 4월25일 아침결인 오전 8시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싹 야윈 43세의 상화는 힘없이 몇 마디 입속말을 지순한 아내 서순애(徐順愛·84년 작고)에게 건네고 영면의 길을 떠났다.

 

큰아들 용희 씨가 18세(작고, 당시 중학생), 충희(현 서울 거주, 흥국공업주식회사 명예회장)씨가 10세, 막내 태희(서울 거주)씨가 6세였던 때였다. 정월에 위암으로 판명된 지 불과 석달 만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그렇게 급하게 떠나버렸다.

 

그해 2월 중순 만주로 떠나 기 앞서 목우 백기만(시인, '고월과 상화'의 저자)이 계산동 고택으로 병문안을 가보니 벌써 눈빛만 형형한 채 여윌 대로 여위어 있었다."집필하려던 국문학사를 탈고나 해놓고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틀린 모양이지…".

 

서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왜놈들한테 무릎 꿇지 않았고,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고초를 겪는다고 동지들을 밀고하지도 않았던 불굴의 상화였지만 병마 앞에 그렇게 힘없이 무너졌다. 민족을 위해 해야 할 태산 같은 일들을 다 남겨두고….민족의 큰 별이 뚝 떨어져버린 슬픈 그날 이후 상화는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경주이씨 가족묘지에 안장돼 울창한 소나무 숲에 잠들어있다.

 

그해 가을 시인 백기만, 서동진, 화가 박명조, 김봉기, 이순희, 주덕근, 이흥로, 윤갑기, 김준묵 등 해방 전후 공간의 대구를 정신적으로 이끌던 지인 10여명이 힘을 합쳐 묘비를 세웠다.

 

묘비명은 상화가 주권을 빼앗긴 민족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초기에 스스로를 귀머거리, 벙어리로 지칭한 호 '백아'(원래 白啞인데 묘비에는 白亞로 새겨짐)를 써서 '시인 백아 월성 이공 휘 상화 지 묘'(詩人白亞月城李公諱相和之墓)라고 새겨져있다.

 

교남학교(현 대륜학교 전신) 교사 시절, 수업시간에 관동대지진의 참상과 일본의 실상을 제자들에게 들려준 게 단초가 돼 출근길에 일본 형사들에게 끌려가서 대구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고생, 결국 단명으로 이어졌음을 아는 지인들은 왜경의 눈을 피해 그렇게 간략한 묘비로 섭섭함을 달래며 민족의 울분을 삼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詩碑)로 대구 달성공원에 들어서 있는 상화시비는 1948년 3월 김소운의 제청으로 시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고 이윤수 시인 등 대구 '죽순' 동인들이 발벗고 나서서 건립됐다.

 

이 시비에 비로소 국민시인 상화의 의기로운 기록과 대표시 '나의 침실로'를 새겨, 영원한 생명의 길인 좁은 문, 험난한 길을 고고히 걸어갔던 시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젊은 한때 방황도 있었지만 40평 민족을 안고 궁글었던 '상화'는 일제가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1901년 5월9일(음력 4월5일) 대구부 본정 2정목(大邱府 本町 2丁目) 11번지(현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현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뒤편)에서 태어났다.

 

다들 현재 서성로의 상화 일족 집을 상화의 생가로 잘못 알고 있으나 대구시 중구청에서 상화의 제적부를 확인하고, 중구청 지적계장과 동반 답사한 결과는 달랐다.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태어나 43년에 타계하기까지 상화가 서울 유학시기와 도쿄 체제기간을 빼고 상화가 대구에서 머문 거처는 생가와 유명을 달리한 고택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군데로 최종 확인됐다.

 

이제까지 상화의 백부인 소남공 이일우의 직계가 사는 서성로(조흥은행 뒤편)가 상화의 생가로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상화의 제적부와 자필 이력서(대륜고교 소재) 등의 확인을 통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아직 상화에 관한 기초 자료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음을 방증함에 다름 아니다.

 

서문로 상화 생가 사랑방은 담교장(談交莊)으로 일컬어졌다. 상화의 당호를 따서 담교장으로 불리던 이곳은 스스로 애국지사요, 항일을 자처하던 20여명들의 모임처요, 시국 토론장이었다. 젊은 혈기에 피압박 민족의 통탄과 좌절을 지기들과 함께 술로 달랜 4, 5년 세월의 결과는 상화의 가산 탕진과 건강악화로 이어졌다.

 

맏형 이상정 장군의 집에 나란히 딸렸던 113평 궁궐 같은 서문 로 생가를 판 상화는 33년에 대구시 중구 장관동(대구 부 西千代田町) 50번지에 살았으며, 34년에는 대구시 중구 남성로(대구 부 남성 정) 35번지에, 다시 38년에 대구시 중구 종로(대구부 경정) 2가 72번지로, 40년에는 마지막 거처가 된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대구부 명치 정 2정목) 84번지로 이사를 다니는 곡절을 겪게 됐다. (대구시 중구청 제적부 추적 결과)

 

이 가운데 상화가 숨진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1925년 신축)은 상화가 숨지던 안방, 친구들과 제자들을 맞던 사랑방, 울적한 마음을 달래던 감나무, 손님들로 벅적이던 살평상이 놓인 자리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있어 더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랑방 이곳에서 원고 심부름을 나온 저를 맞아주던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김동춘(82) 시인은 회고했다. 제자들은 이제사 상화의 대구거처 다섯 곳을 확인하자 "대구가 이게 뭐꼬?"라고 개탄했다. 

 

도움 주신분=상화가 교남학교에 만든 권투 부 '태백구락부'(회장 정원용), 전 대륜고 교장 이성수 시인, 대구시 중구청 민원실과 지적계.

 

최미화기자 magohalmi@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