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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화의 고향

야촌(1) 2011. 3. 14. 18:56

시인 이상화의 고향

2006/03/13 21:44

[명작기행 .22] 시인 이상화의 고향, 대구시내 일대

 

다시 한 시인의 이름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문학사 속에서 뚜렷이 큰 족적을 남겼지만 세인들의 일상에선 잊혀진 존재였던 시인 이상화!.

 

암울했던 한 시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대표되는 격렬한 저항시인의 이미지로 각인된 그의 이름이 다시 시민들의 뇌리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가 그의 탄신 100주년이었던 데다 최근 그의 고택에 대한 보존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이 지역주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시인이었기에 고택보존운동을 지지하는 서명자만 해도 38만여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다시 상화의 이름과 시가 시민들의 정신 세계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든 셈이다.

 

세월이 흘러 희미해지긴 했지만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계산동의 고택뿐만 아니라 대구시내 곳곳에 상화의 흔적은 남아 있으니 이 참에 그의 자취 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먼저 먼곳부터 둘러볼 요량으로 그의 묘소를 찾아 나선다.

 

앞산순환도로를 지나 화원에서 월배로 가는길. 언덕바지에 육교 두개가 서있고, 그 중간쯤, 왼쪽골목으로 들어가면 대곡성당과 시립희망원이 나온다. 거기쯤에서 상화의 묘소 위치를 물어보면 금세 찾을 수 있다. 주공아파트 신축현장 옆으로 난 산길을 잠시 오르면 40여기의 분묘가 가지런히 줄지어선 가족묘를 볼 수 있다.

 

이상화 시인의 집안, 월성이씨의 가족묘지이다. 묘지 앞에는 제각이 서있고, 주변에는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얼핏 봐도 조성된지 얼마 안된 묘지라는 느낌이 든다. 실상 이상화와 그의 가족들의 묘소는 주공아파트 신축부지에 있었으나 아파트 부지에 편입 되면서 후손들이 현재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다.

 

잠시 숙연한 기분으로 묘소를 바라보다 울타리 너머 상화의 묘를 확인하기 위해 입구를 찾아보지만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있다. 실례를 무릅쓰고 울타리를 넘는다. 아래쪽에서부터 상화의 묘를 찾아 한기 한기 더듬어 올라가 본다.

 

맨 윗줄 오른쪽 끝에서 상화 부부의 묘를 확인한다. 그 왼쪽에는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그의 형 이상정 장군의 묘가, 바로 밑에는 한국 체육계의 거목으로 IOC위원을 지낸 동생 이상백 박사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의 막내 아우 상오 또한 수렵가로 이름을 날렸다니 묘비명이 갈수록 희미해지더라도 이들 네형제의 성취는 좀체 빛이 바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초여름의 햇살을 받아 봉분의 잔디는 푸름을 더하고, 묘소 주변에는 제법 키큰 소나무가 무성하다.

 

바로앞 아파트공사 현장에서는 타워크레인이 커다란 철골조를 천천히 천천히 옮기고 있다. 그리고 요란한 망치소리와 소음이 활기차다. 저 아파트가 완공되고 입주가 시작되면 새로운 입주 자들도 상화가 이곳에서 영면하고 있음을 알게 될테고, 그러면 꽃을 들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평일의 한낮, 달성공원에도 햇살은 따갑다. 더위를 피해 공원을 찾은 노인들은 그늘에서 환담으로 소일하고, 우리에 갇힌 동물들의 움직임도 둔하다. 코끼리사 인근에도 인적이 없다. 상화의 시비만이 따가운 햇살을 안고 우두커니 서 있을뿐....

1948년에 세워진 이곳의 상화시비는 국내 최초의 문학비로도 이름이 높다. 김소운 선생 등의 노력으로 세워진 이 시비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함께 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나의 침실로'중 마지막 연이 새겨져 있다.

 

음료수를 한캔식 마시며 갈증을 푼 우리일행은 다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화 고택이 있는 계산동으로 향한다.

한나라당 대구중구사무실이 있는 골목길 안쪽에 그 고택이 있다. 낡고 생각보다는 작은 한옥. 최근 이집에 세인의 눈길이 모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등살에 질렸는지 집주인은 매주 월요일에만 전화를 받는다는 쪽지를 대문에 붙여놓고 출타중이다.

 

좁은 마당은 지붕위로 불쑥 솟은 감나무 한그루가 다 차지하고 있다. 이 집은 상화가 병마와 싸우며 2년 6개월여동안 말년을 보냈으며, 비교적 당시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편에 속한다.

 

상화와 형제들, 그리고 그의 사촌들이 나고 자란 생가는 서문로에 있었다. 서성네거리에서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방면으로 50-60여m쯤 올라가다 왼쪽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서문로 2가 11의 1번지를 확인하면 바로 그집이다. 이 집에서 태어난 상화는 7세때 아버지 이시우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기를 보낸다.

 

그의 백부 일우 또한 당대에 이름높던 민족주의자로 현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 일대에 '우현서루'라는 학숙을 건립,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인물이다. 상화의 민족주의와 저항정신이 그의 백부로부터 비롯됐음을 짐작케 해준다.

 

솟을대문이 굳게 잠긴, 담장이 높은 집을 기웃거리다 초인종을 눌러 집구경을 청한다. '안된다'는 대답에 다시 한번 신분을 밝히고 정중히 부탁한 끝에야 문이 열린다. ㄷ자형의 한옥. 제법 오래된 집처럼 보이지만 상화가 살던 당시의 집은 아니라는게 소설가 윤장근씨의 고증이다. 이 집의 상량문에서 광복이후 새로 지었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윤씨의 고증에 따르면 상화의 유년시절에는 이 집뿐만 아니라 바로 남쪽의 서문로 1가 12번지 또한 한울타리 안의 같은 집이었다고 한다. 두집을 합치면 지금의 기준에서도 상당히 큰집에 속한다. 당시 그의 집안의 재력을 감안하면 그정도의 규모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12번지에는 지금 번듯한 양옥이 자리잡아 완전히 다른 집이 됐고, 두 집 사이에는 좁은 골목길마저 나있다.

이러니 우리는 지금 상화의 생가는 볼 수 없고, 생가터만 둘러보고 있는 셈이다.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든다. 말년을 잠시 보낸 고택도 보존의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는 생가복원의 의미가 더욱 크지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각하면 상화뿐만이 아니지 않은가. 그의 형 이상정이나, 아우 이상백이 각각 역할을 한 분야에서의 명성이 상화의 아랫길이 아닌 바에야 그들 형제를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사업이 더욱 보람있고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생가복원이 더욱 가치있는 일일테고, 게다가 대한체육회와 광복회 등의 협조까지 받을 수 있어 일이 더욱 순조롭게 풀릴 수도 있 지 않을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맘에는 내혼자 온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자란 보리 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머리 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기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르던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후략.......

/정근재기자 kayjay@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