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의 대구이야기(27) / 문화계 분열
[매일신문 2006-07-03 13:27] /뉴스-문화일반
해방정국의 좌우대립현상은 문화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45년 10월25일에 발족한 ‘죽순(竹筍)시인구락부’(대표 李潤守시인)나, 이해 12월30일에 결성된 ‘조선아동회’(대표 李永植목사)가 닻을 올리던 무렵만 해도 박영종(朴泳鍾. 필명 박목월), 김홍섭(金洪燮), 김진태(金鎭泰), 이원식(李元式) 등이 이념을 초월하여 어울렸다.
그러나 1946년 5월27일 “향토예술의 탐구발전을 기 한다”는 기치아래, ‘경북예술가협회’(회장 崔海鍾. 문학부장 박목월)가 결성될 무렵은 이미 분열의 징후가 뚜렷했다. 범 우익성격의 이 단체는 사실 45년 12월16일에 결성된 범 좌익단체인 ’경북문화건설연맹‘(위원장 李命錫. 부위원장 白基萬)의 좌편향적 활동에 자극받아 결성된 대항세력이었다.
백기만부위원장을 중심으로 움직인 ’경북문건‘은 문학, 미술, 연극, 영화, 음악, 무용동맹 외에, 대구만 유일하게 사회과학, 고고사학, 생활문화, 에스페란트동맹 등의 장르가 가세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조선문화단체총연맹’(약칭 ‘문련’)이 새롭게 결성 되자, 대구서도 그 산하조직으로 46년 6월 ‘문련경북도연맹’(위원장 李應壽. 부위원장 尹福鎭)으로 탈바꿈하며, 동맹조직 역시 개편된다. 개편된 동맹은 문학, 음악, 연극, 미술, 영화, 사진동맹 외에, 보건후생, 과학, 법학, 과학기술동맹 등 이색적인 동맹도 가담했다.
‘경북문련’은 결성 한 해 뒤인 47년 7월 하순 자축 ‘종합예술제’를 열었는데, 이 행사가 한동안 대구문화계의 소동꺼리가 되었다. 미군정의 좌익단체목조르기로 이 무렵 쫓기는 신세였던 중앙‘문련’은 세력만회의 방책으로 남조선 전역에 ‘문화공작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인민과 호흡하는 문화, 인민과 실천하는 문화”란 구호아래, 생활의 현장에서 예술행사를 폄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더 많이 확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예술제개최에 때맞춰 ‘문화공작대 제 4대’가 공연차 대구에 내려온 것도 그런 취지였다. 모더니스트 시인인 김기림(金起林)이 표면상 대표였으나, 실질적인 대장은 연극배우 심영(沈影)이었다. 심영은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였다. 여기에 향토의 ‘전위시인’인 이병철(李秉哲)과, 뒷날 인기배우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한은진(韓銀珍), 김승호(金勝鎬), 이향(李鄕)등이 참여한 40여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호화멤버였다.
이들은 고 이상화시인의 막내 동생이자 수렵가인 이상오(李相旿)가 당시 관리대표로 있던 키네마극장에서 7월22일, 23일 이틀간, <위대한 사랑>이란 제목의 연극을 공연했다. 공연은 초만원의 성공이었다. 그러자 돌연 대구경찰서가 공연중지명령을 내리고, 주연배우 심영을 출두하라고 명했다. “심영에 대한 사회여론이 나쁘고, 공연을 방해하려는 첩보가 있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였다.
24일 오전 10시쯤 심영과 김기림, 한은진 이병철 등이 대구경찰서에 항의 겸 출두하기 위해 만경관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괴한 5.6명이 나타나, “저놈 잡아라!”하며, 심영을 쓰러뜨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테러사건이 벌어졌다.
우익청년들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심영은 넉 달 전에도 한밤중 서울 종로에서 괴한의 권총저격을 받아 우측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바 있었다. 결국 이날의 테러는 그로썬 두 번째의 수난이었다. 공연은 절로 연기되었다. ‘경북문련’과 일부언론들은 극우단체와 경찰을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경북문련’의 간부들이 경찰서를 찾아가 “백주에 경찰서 80미터 앞에서 발생한 테러를 못 잡다니 이럴 수 있느냐”며 엄중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미 힘의 저울대는 우익의 절대우세였다.
공연재개는커녕 한 여름의 ‘소동극’만 남긴 채 문화공작대는 울분을 삼키며 상경했다. 심영과 김기림, 이병철, 윤복진은 이 일로 더욱 남한의 정치현실에 절망하며, 우여곡절 끝에 6.25를 전후로 결국 북행길에 오르고 만다.
[출처]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27)문화계 분열 |작성자 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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