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명길(崔鳴吉)
[생몰년] 1586 (선조 19) - 1647 (인조 25)
[문과]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2위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생원 1등(一等) 1[장원(壯元)]위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3위
[가족사항]
[부] 최기남(崔起南)
[조부] 최수준(崔秀俊)
[증조부] 최업(崔嶪)
[외조부] 유영입(柳永立)
[처부] 장만(張晩)
[처부2] 허린(許嶙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창랑(滄浪). 아버지는 영흥부사 기남(起南)이며, 어머니는 참판(參判)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正六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兵曹佐-正六品)으로 있다가 국내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간 복상(服喪)한 뒤 환로(宦路)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이어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이 되어 비변사(備邊司有司堂上-正一品衙門)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뒤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正三品)·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從二品)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함으로써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이로 인하여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 많은 지탄을 받았으며, 또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 인조의 생부, 뒤에 元宗으로 추존) 합부(合祔)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仁祖)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從二品)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右參贊-正二品)· 부제학(副提學-正三品)· 예조판서(禮曹判書-正二品)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에 양관(兩館)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였고, 이에 조선에서는 절화(絶和)의 의논이 높아진 바, 그는 당장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여 몇 년간은 무사할 수 있으나 종막(終幕)은 심히 우려된다고 하면서 또한 원망을 불러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1635년초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직을 면하고 몇 달 뒤에 호조판서(戶曹判書-正二品)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하여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싸워 지키거나 병화를 완화하는 어느 쪽도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江都)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면서 강력하게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가 되었는데, 12월에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仁祖)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는데,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해 정월에 인조(仁祖)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진행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 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右議政-(正一品))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아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左議政-正一品)이 되고 다음해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올랐는데, 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하였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領議政-正一品)이 되었다.
이때 임경업(林慶業) 등의 명나라와의 내통과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金尙憲)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고, 1645년에야 귀국하여 계속 인조(仁祖)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陽明學)을 독수(獨修)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 장유(張維)나, 계자(系子) 후량(後亮) 및 손자 석정(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는 《지천집(遲川集)》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연보]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
선조 | 19 | 1586 | 병술 | 萬曆 | 14 | 1 | 8월 25일, 태어나다. |
선조 | 35 | 1602 | 임인 | 萬曆 | 30 | 17 | 이즈음 白沙 李恒福, 玄軒 申欽 兩門에 나아가 수학하다. |
선조 | 38 | 1605 | 을사 | 萬曆 | 33 | 20 | 生員 進士試에 합격하다. ○ 4월, 文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승문원에 分館되다. |
광해군 | 1 | 1609 | 기유 | 萬曆 | 37 | 24 | 史局에 뽑혔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다. 곧 典籍으로 오르다. |
광해군 | 2 | 1610 | 경술 | 萬曆 | 38 | 25 | 감찰, 예조 좌랑이 되었으나 병으로 숙배하지 않다. |
광해군 | 3 | 1611 | 신해 | 萬曆 | 39 | 26 | 8월, 공조 좌랑이 되다. |
광해군 | 4 | 1612 | 임자 | 萬曆 | 40 | 27 | 2월, 병조 좌랑이 되다. |
광해군 | 6 | 1614 | 갑인 | 萬曆 | 42 | 29 | 1월, 廢母論에 반대해 삭탈관작, 문외출송되다. |
광해군 | 8 | 1616 | 병진 | 萬曆 | 44 | 31 | 모친상을 당하다. |
광해군 | 11 | 1619 | 기미 | 萬曆 | 47 | 34 | 부친상을 당하다. |
인조 | 1 | 1623 | 계해 | 天啓 | 3 | 38 | 3월, 反正에 참여, 이조 좌랑, 이조 참의를 역임하다. ○ 윤10월, 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고, 完城君에 봉해지다. ○ 11월, 이조 참판이 되다. |
인조 | 2 | 1624 | 갑자 | 天啓 | 4 | 39 | 李适의 난에 摠督副使가 되어 공을 세우다. |
인조 | 3 | 1625 | 을축 | 天啓 | 5 | 40 | 2월에 부제학, 3월에 대사헌, 5월에 다시 부제학이 되다. ○ 7월, 號牌廳 堂上이 되다. |
인조 | 4 | 1626 | 병인 | 天啓 | 6 | 41 | 1월, 啓運宮 喪에 上箚하여 降服과 立後의 잘못을 논하고 葬禮는 士禮, 祭祀는 諸侯禮로 하며 別廟를 세워 상이 主祭하기를 청하다. ○ 8월, 형조 참판이 되다. |
인조 | 5 | 1627 | 정묘 | 天啓 | 7 | 42 | 봄, 胡亂이 일어나자 和議를 주장, 적이 물러난 뒤 탄핵을 받고 추고당하다. ○ 啓運宮 神主의 私廟 合祔문제에, 따로 禰廟를 세우기를 청하다. 이 일로 옥당의 논척을 당하다. |
인조 | 6 | 1628 | 무진 | 崇禎 | 1 | 43 | 외관을 구하여 경기 관찰사가 되다. |
인조 | 7 | 1629 | 기사 | 崇禎 | 2 | 44 | 호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다. ○ 朴炡, 兪伯曾, 羅萬甲, 張維를 伸救하다. |
인조 | 8 | 1630 | 경오 | 崇禎 | 3 | 45 | 1월, 軍籍 정리의 공으로 加資되다. ○ 5월, 우참찬이 되다. 椵島의 劉興治를 토벌하자는 조정의 논의를 반대하다. |
인조 | 9 | 1631 | 신미 | 崇禎 | 4 | 46 | 상이 元宗 追崇의 일을 중국에 奏聞하려는 의도로 5월에 부제학으로 삼았으나, 上箚하여 반대하고 다시 別廟를 세우자고 청하다. ○ 11월, 예조 판서가 되다. |
인조 | 10 | 1632 | 임신 | 崇禎 | 5 | 47 | 상이 중국에 奏聞하고 定遠大院君을 元宗으로 추숭하다. 이 일로 追崇都監 堂上의 일을 맡고 후에 加資되다. ○ 12월, 이조 판서가 되다. |
인조 | 11 | 1633 | 계유 | 崇禎 | 6 | 48 | 양관 대제학과 體察副使를 겸하다. |
인조 | 13 | 1635 | 을해 | 崇禎 | 8 | 50 | 4월, 호조 판서가 되다. |
인조 | 14 | 1636 | 병자 | 崇禎 | 9 | 51 | 봄, 仁烈王后國葬都監 堂上이 되다. ○ 4월,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行公하지 못하다. ○ 9월, 한성부 판윤이 되다. 청 나라 사신을 거절한 일로 위기가 고조되자 斥和를 반대하는 논의를 계속하다. ○ 11월, 이조 판서가 되다. ○ 12월, 호란이 일어나자 李景稷과 함께 賊將을 만나 상이 南漢山城으로 도피할 여유를 만들다. 山城에서도 賊陣을 왕래하며 화의를 주장하다. |
인조 | 15 | 1637 | 정축 | 崇禎 | 10 | 52 | 1월, 城下之盟이 이루어지다. ○ 4월, 右議政이 되다. ○ 8월, 左議政이 되다. ○ 9월, 사신으로 瀋陽에 가서 청 나라의 徵兵 요청을 그치게 하고 포로 수천 명을 贖還하다. |
인조 | 16 | 1638 | 무인 | 崇禎 | 11 | 53 | 9월, 領議政이 되다. ○ 청 나라의 助兵 요청을 거절하고 직접 瀋陽에 가서 담판하고 돌아오다. |
인조 | 17 | 1639 | 기묘 | 崇禎 | 12 | 54 | 巫蠱의 獄事를 맡으려 하지 않은 일로 상의 진노를 사서 節使로 심양에 가다. 중도에 臺諫의 伸救로 돌아오게 되자 파직을 요청하다. |
인조 | 18 | 1640 | 경진 | 崇禎 | 13 | 55 | 2월, 衿川 村舍에서 우거하다. ○ 6월, 完城府院君에 봉해지다. ○ 7월, 李适의 잔당 金介가 동생 崔晚吉의 집에서 체포된 일로 파직되다. |
인조 | 20 | 1642 | 임오 | 崇禎 | 15 | 57 | 8월, 다시 領議政이 되다. ○ 明과의 연락을 도모한 일이 淸에 의해 포착되어 林慶業과 함께 직접 鳳城으로 가다. 심양의 北館에 억류되다. |
인조 | 21 | 1643 | 계미 | 崇禎 | 16 | 58 | 4월, 南館으로 옮겨지다. |
인조 | 23 | 1645 | 을유 | 順治 | 2 | 60 | 2월, 세자, 대군과 함께 돌아오다. ○ 淸州로 돌아와 鎭川庄에 머물다. ○ 10월, 完城府院君 兼 御營都提調가 되다. |
인조 | 24 | 1646 | 병술 | 順治 | 3 | 61 | 姜嬪의 옥사에 賜死를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 |
인조 | 25 | 1647 | 정해 | 順治 | 4 | 62 | 5월 17일, 졸하다. 상과 세자가 중관을 보내어 弔祭하다. ○ 8월, 淸州 大栗里 선영에 장사 지내다. |
현종 | 5 | 1664 | 갑진 | 康熙 | 3 | - | 이즈음 문인 李憫이 문집을 간행하다. (崔錫鼎의 跋) |
숙종 | 2 | 1676 | 병진 | 康熙 | 15 | - | 가을, 仁祖廟庭 追享의 명이 내렸으나 李沃 등의 반대로 무산되다. |
숙종 | 6 | 1680 | 경신 | 康熙 | 19 | - | 손자 崔錫鼎이 諡號를 청하기 위하여 行狀을 짓다. |
숙종 | 7 | 1681 | 신유 | 康熙 | 20 | - | 12월, ‘文忠’으로 시호를 내리다. ○ 南九萬이 神道碑銘을 짓다. |
기사전거 : 行狀(崔錫鼎 撰, 明谷集 卷29), 神道碑銘(南九萬 撰, 藥泉集 卷17),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
[가계도]
崔秀俊
∣
∟___崔起南/永興 府使
∥
全州柳氏
監司 柳永立의 女
∥ ㅣ
∥ ∟____崔夢吉/早夭
∥ ㅣ
∥ ∟____崔來吉/參判
∥ ㅣ ∥
∥ ㅣ 益城君 李享齡의 女
∥ ㅣ
∥ ∟____최명길(崔鳴吉)/領議政
∥ ㅣ ∥
∥ ㅣ 仁同張氏 贊成 張晚의 女
∥ ㅣ ∥ ㅣ
∥ ㅣ ∥ ∟____崔後亮(系子)/僉正 ※生父 : 崔惠吉
∥ ㅣ ∥ ∥
∥ ㅣ ∥ 安獻徵의 女
∥ ㅣ ∥
∥ ㅣ 陽川許氏 宗廟令 許嶙의 女
∥ ㅣ ㅣ
∥ ㅣ ∟____崔後尙/執義
∥ ㅣ ∥
∥ ㅣ 李澥의 女
∥ ㅣ
∥ ∟____崔惠吉/監司
∥ ㅣ ∥
∥ ㅣ 李春元의 女
∥ ㅣ ㅣ
∥ ㅣ ∟____崔後定/縣監
∥ ㅣ ㅣ
∥ ㅣ ∟____崔後亮 出系
∥ ㅣ
∥ ∟____崔敬吉(崔晚吉)/正郞
∥ ㅣ ∥
∥ ㅣ 趙珉의 女
∥ ㅣ
∥ ∟____여(女)
∥ ㅣ ∥
∥ ㅣ 韓必遠/承旨
∥ ㅣ
側室
ㅣ
∟____崔正吉
[기사전거]
◈行狀(崔錫鼎 撰, 明谷集 卷29), ◈崔秀俊墓誌(崔鳴吉 撰), ◈崔起南墓誌銘(申欽 撰, 象村稿 卷24) 등에 의함
'■ 인물 > 조선시대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중영(柳仲郢) -풍산인 (0) | 2011.05.26 |
---|---|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皮載吉) (0) | 2011.05.18 |
한음 이덕형(漢陰李德馨) (0) | 2011.03.08 |
박상(朴祥) (0) | 2011.02.28 |
중종(조선 제11대왕)의 자녀들 (0) | 2011.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