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
[생졸년] 1561년(명종 16)~1613년(광해군 5).
[문과] 선조(宣祖) 13년(1580) 경진(庚辰) 별시(別試) 을과(乙科)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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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지중추부사 (知中樞府事-正二品) 이민성(李民聖)의 아들로, 경기도 포천 외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문학에 통달했었다.
특히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는 죽마고우(竹馬故友)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다.
대제학 이이(李珥)가 호당(湖堂)을 뽑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뽑혀 1583년(선조 1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다음해 서총대[瑞蔥臺-조선시대 창경궁(昌慶宮) 후원(後苑)에 쌓았던 석대(石臺)]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에 선발되었다.
그뒤 부수찬(副修撰-從六品)· 정언(正言-正六品)· 부교리(副校理-從五品)를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이 되었고, 1588년(선조 21) 이조정랑(吏曹正郞-正五品)으로서 일본의 사신 겐소[玄蘇]·다이라[平義智]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正三品)· 우부승지(右副承旨-正三品)· 부제학(副提學-正三品)· 대사간大司諫-正三品)· 대사성(大司成-正三品) 등을 역임하고, 1591년(선조 24) 예조참판(禮曹參判-從二品)이 되어 대제학(大提學-正二品)을 겸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으로 피난했는데, 일본군이 대동강까지 이르자 단독으로 일본의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을 공박했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扈從)하고, 구원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파병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명의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대사헌(大司憲-從二品)으로서 이들을 맞아들였으며, 이어 한성판윤(漢城判尹-正二品)에 올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593년(선조 26) 병조판서(兵曹判書-正二品), 이듬해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로 훈련도감당상((訓鍊都監堂上)을 겸했다. 1595년(선조 28) 경기도·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4도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御史)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 방어를 강화하게 했다.
이해에 우의정(右議政-正一品)에 오른 뒤 다시 좌의정(左議政-正一品)으로 승진했고, 우의정(右議政) 이항복(李恒福)의 진언으로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합동으로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1601년(선조 34)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從一品)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4도체찰사(體察使)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에 힘썼고, 다음해 영의정(領議政-正一品)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正一品)의 한직으로 밀려났으나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명나라가 왕의 책봉을 허락하지 않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領議政-正一品)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박응서(朴應犀)의 상변(上變)으로 삼사(三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고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이에 적극 반대했다.
그 뒤 광해군이 그의 주청에 따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로 보내자 삼사가 모두 그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함으로써 이를 수습했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돌아가 병으로 죽자 광해군이 애도하여 복관을 명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白沙集
↑한음 이덕형선생 영정(漢陰 李德馨先生影幀)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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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한음 이덕형 선생은 조선조 역사상 31세란 최연소 나이로 문형(文衡 :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과 대제학)에 오르고 영의정을 세 차례나 지냈으며, 학문과 덕망으로 선조, 광해군 양 대에 걸쳐 내외적으로 명망을 떨쳤다.
임진왜란때는 왜군의 적장 앞에 나아가 얼굴빛 변함없이 준엄하게 적장을 꾸짖어 수행한 우리 군사들은 물론 서슬이 퍼렇던 왜군들까지 탄복하여 칭송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러나 말년에 간신들의 모함으로 삭탈관직 되어 용진(龍津)의 강가 은거지에서 나라걱정하다 작고하였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상(上)이 몹시 슬퍼하면서 명하여 관작을 복구시켰다.
그러자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말하기를,“나라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하였고, 심지어 이서(吏胥), 군민(軍民), 상려(商旅), 노유(老幼)들까지도 외롭고 아득하여 의지할 곳이 없게 여기면서 각각 화재(貨財)를 내어 수의(襚衣)를 받들고 문에 찾아오는 자가 서로 줄을 이었다.
이를 바라본 죽마고우 백사 이항복(나이는 한음보다 다섯살 위임)선생은 “성인은 살아서는 그 뜻을 빼앗지 못하고 죽어서도 그 이름을 빼앗지 못 하는구나”고 탄식하였다.
한음은 어릴적 그의 외가가 있던 경기도 포천과 진외가가 있던 경상도 상주에 가끔 부모를 따라 머문 적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범상치 않은 언행으로 그 지방의 유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포천의 용연서원과 문경의 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는 18세에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20세에 경진(庚辰) 부묘별시(附廟別試)에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관계에 첫발을 들여놓았 는데, 뛰어난 문장과 비범한 언행으로 선조(宣祖)와 당대의 대신들에게 많은 총애를 받았다.
그의 죽마고우 오성 이항복(鰲城 李 恒福)은 한음보다 3년 앞서 20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25세 때인 1580년 알성과에 급제하여 같은 해 함께 승문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모든 요직을 두루 거치고 한음이 타계 할 때까지 30여 년간을 나라의 대소사에 뜻을 같이하면서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가 32세 때인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원군을 요청하는 청원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접반사가 되어 그를 따라 일선에서 종군하게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역시 명나라 장수 양호의 접반사로 종군하면서 명의 군사작전을 도와주게 되었다.
또 그가 이조 정랑으로 있던 28세 때 일본의 장수 현소와 평의지가 부산 동래에 이르러 조선과 대화하기를 청하니 선조는 한음을 선위사로 임명하여 이들과 회담하게 하였다. 이때 한음의 학문과 인품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임진, 정유 양 왜란 때에는 왜적들이 조선과 회담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한음을 지목하여 협상코자 하였다.
1592년 광해군이 세자가 되면서부터 여러 사람이 고명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허락 받으려 했으나 이후 16년 동안이나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1603년 광해군이 왕권을 계승하자 1608년 명나라에서는 부당한 왕권계승을 조사한다며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난처한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명망이 높던 한음을 명나라 조사단의 접반사로 임명하여 그들을 접대하면서 자신의 왕위 계승이 불가피하였음을 설명하고 그대로 명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명나라 사신들이 돌아가자 광해군은 한음을 고명사신으로 임명하여 사신들이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한시바삐 명나라에 먼저 가서 자신의 왕위계승을 허락 받고 오기를 간청하였다.
왕명을 받은 한음은 북경으로 출발하여 6개월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천신만고 끝에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오게 되었고 광해군은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와 왕권을 확실하게 해준 한음의 공로를 못 잊어 그를 영의정으로 삼아 대북인들의 끊임없는 탄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를 감싸주면서 자신의 옆에 있게 하려고 애썼다.
광해군은 1612년에 한음을 익사, 형난공신(翼社 亨難功臣)에 훈록 하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책봉하기도 하였으나 그 후 정쟁의 와중에서 득세한 반대세력들에 의해 폐지되었다.
선조 말년에 이르러 붕당정치가 심화되고 삼사(三司 : 홍문관,사헌부, 사간원을 이르며 왕이나 대신의 잘못을 지적하여 임금에게 바로잡기를 주청하는 기관)의 관헌들이 파당의 이해에 따라 탄핵 상소문을 올리는 일이 잦았다.
이때 한음도 여러 차례의 무고한 탄핵을 받았고 선조의 큰아들 임해군의 비리를 비판하였다 하여 선조의 눈 밖에 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도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자 당파간의 정쟁이 극심해 지면서 삼사의 상소문과 이에 따른 국문으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게 되고 이런 와중에 영창대군 죽이는 것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한음도 삭탈관직을 당하여 낙향하게 되었으며 한 달간 침식을 잃고 나라 걱정만 하다가 1613년 10월 향년 53세를 일기로 용진(龍津 :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송촌리)의 강가에서 운명했다.
○ 출생지
한음은 조선 제13대왕 명종17년(1561) 2월12일 서울의 성명방(誠明坊: 지금의 중구 순화동)에서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典)의 동생인 문화유씨(文化 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용산구 동자동과 후암동의 경계가 되는 고개를 송경재 또는 쇠경재, 한자로 송경현(誦經峴)이라 하는데 그것은 선생이 이 고개 부근에 살면서 경전(經典)을 낭송하던 소리가 들렸다는 말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 각동조(各洞條)에 ‘송경현(誦經峴)이 남대문 밖에 있는데, 그 곳에 한음 이덕형이 살던 집이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선생의 장남(如圭)이 양근(양평) 군수로 몇 년 지내는 동안 선생과 부친 지사공(民聖)이 가끔 들리셨는데 당시에 한음 부자 분께서 자주 다니시던 중은사(中隱寺) 또는 우계사(叉溪寺)라는 절과 선생의 조부 항렬인 동고 이준경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 목왕리의 산수를 좋아해 이곳에 부모님 묘소자리를 친히 잡았다.
선생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고 토정선생의 한음의 처 숙부이다. 하여 처가 어른들에게 풍수지리를 배워서 다른이들의 산소 자리를 잡아주시기도 하였는데 특히 예산 대솔면에 있는 선생의 장인 이산해선생의 묘소도 선생이 직접 잡았고 지금도 전국 최고 명당자리로 손꼽힌다.
임진왜란 때 피난 중 강원도 안협의 백암산에서 왜병을 피하여 28세의 젊은 나이로 절벽에 뛰어내려 자결한 선생의 배위 한산이씨(韓山李氏-영의정 이산해 딸)를 현지에 안장했었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김포 통진에 모셨던 선생의 어머니 묘소와 함께 이곳으로 이장했다.
1603년 이장을 위하여 영의정을 사직하고 내려왔으나 선조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달간의 휴가를 주며, 경기관찰사에게 호상(護喪)이되어 주관하기를 명하고 200명의 일꾼들을 내려 보내 도와주도록 했다. 그후 1613년 한음이 돌아가시자 후손들이 이곳의 부인 묘소와 합장으로 모셨다.
그리고 그의 영정은 1590년경에 당시의 궁중화가 이신흠(李信欽)에 의해 처음 그려졌고. 문헌에 따르면 선생의 영정은 1777년에 포천의 용연서원에, 1830년에는 상주의 근암서원과 백운동의 소수서원에 모셨고 근암서원의 영정은 1869년에 도남서원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종가에 모신 영정 이외에는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한음의 9대 종손 이의익은 1860년대에 당시의 궁중화가 이한철(李漢喆)에게 부탁하여 여러 본의 전신 및 반신 이모본을 그리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원본과 함께 그 일부가 종가에 보존되어 있다.
또 일제시대에 종가의 영정 일부가 당진 일가들에 의해 모셔져 현재 충남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고, 일부는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되어 일본 대학박물관등에도 보존되고있다.
현재의 영정각은 1986년 후손들이 건립하여 처음에는 이한철 영정을 모셨으나 보존이 어려워 경기도 박물관에 위탁하고 지금은 사진으로 대체하였다.
○ 대아당(大雅堂)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송촌리(옛지명 : 용진(龍津)
한음선생은 1603년 부인과 모친의 묘소를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로 이장한뒤, 묘소가 잘 보이는 운길산 수종사 언덕에 대아당이라는 별서(別墅)를 마련하여 1605년에 부친을 그곳에서 살게 하시고 선생께서도 자주 내려와 부친을 봉양하고 북한강 건너 모친의 산소를 돌보면서 사셨다.
대아당에는 사저 이외에 애일(愛日)이라는 서실(書室)과 진일(眞佚)이라는 헌함(軒檻), 그리고 이로(怡老)와 읍수라는 정자등이 별도로 있었으며 한음 종가로 유지되어 오다가 일제때인 1914년 선생의 12대 종손 때 주위의 종토와 함께 타인에게 넘어가 현재는 집터만 남아있고 모두 유실되었다.선생이 말을 타고 내리셨던 하마석과 손수 심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지금도 남아있다.
한음이 이곳에 머물 때면 그와 절친했던 백사 이항복, 노계 박인로, 사명대사 등이 가끔 들러서 함께 지내기도 하였는데, 특히 노계의 유명한 사제곡과 누항사, 조홍시가 등은 노계가 이곳 대아당에서 한음에게 지어올린 글이다.
1613년 선생은 이 곳에서 부친보다 5년 먼저 운명했다.
○ 한음문고(漢陰文庫)와 연보(年譜)
1634년 선생의 장자(如圭)가 경상도 상주군수로 있을때 선생의 유고를 모아 목판(四冊,八券)을 새겨서 하양현(河陽縣(오늘날의 경북 경산시)에서 초판을 간행한 뒤 가까운 근암서원에 보관시켰고 1668년 선생의 손자 상정(象鼎)과 그의 사촌 상진(象震)이 유고를 추가 판각(五冊, 十二券)하여 두 번째 판을 간행하였다.
1869년 선생의 9대 종손 의익(宜翼 : 이조판서, 판중추부사)은 이기양(李基讓 : 한음 7대손 예조참판)이 작성한 연보와 행장(行狀), 시장(諡狀)등을 추가하여 세 번째 판을 간행하였고 1930년 선생의 13대 종손이 부여에서 네 번째 판을 간행하였다.
현존하는 목판은 모두 410 여매(30X20cm)로 이루어져 있으나 간행할 때마다 분실된 부분을 새로 판각한 것이 수 십매 이르고 현재십여매가 분실된 채로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위탁 보존되고있는데 일제에 의해 삭제된 부분이 많다.
1989년 한학자 이경영(李京泳)에 의해 한글 번역판이 간행되었는데 호침(胡琛)이 지은 대아당별서(大雅堂別墅) 감상문이 추가되었다.
○ 한음의 산소 목왕리의 유래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는 본래 양근군 서중면 지역으로서 산골이 되어 나무가 많으므로 무왕골 또는 목왕(木旺)동이라 하였는데 융희 2년(1908)에 양평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막리, 사촌리 일부와 서시면의 신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목왕리라 해서 양서면에 편입되었다.
목왕리는 아홉분의 정승묘가 있다하여 옛날부터 구정승골이라 불린다. 이곳에 유택이 있는 분은 영의정 문익공 이덕형, 증 영의정 지사공 이민성(이덕형 부친), 영의정 충정공 이준경, 증 영의정 이수정(이준경 부친), 증 영의정 이종억(이의익 부친)등 광주이씨 다섯분과 좌의정 익원공 김사형, 증 좌의정 제청공 신효창, 좌의정 문충공 민희, 우의정 민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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