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유중영(柳仲郢) -풍산인

야촌(1) 2011. 5. 26. 16:01

■ 유중영(柳仲郢)

 

   [생몰년] 1515년(중종 10) ~ 1573년(선조 6)

   [문과]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합격연령 :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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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입암(立巖). 아버지는 간성군수(江城郡守-從四品)공작(公綽)이며, 어머니는 증이조참의이형례(李亨禮-行 敎授)의 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선조(宣祖-조선 제14대왕) 때의 영의정(領議政-正一品) 유성룡(柳成龍)의 아버지이다.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성균교수(知成均敎授)가 되었다. 

이어 황주·상주·양주·안동의 훈도(訓導-正九品)를 역임하면서 지방교육에 큰 힘을 기울였다.


1546년(명종 1) 양현고직장(養賢庫直長-從七品)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박사(博士-正七品)가 되었으나 파직되었다. 1549년에 전적(典籍-正六品)· 감찰(監察-正六品)· 공조좌랑(工曹佐郞-正六品)을 거쳐, 1553년에는 장령(掌令-正四品)· 사복시정(司僕寺正-正三品)· 사간(司諫-從三品)· 장악원정(掌樂院正-正三品)이 되었다.


이듬해 의주목사((義州牧使-正三品)로 나가 국경지방의 밀수행위를 조절하고 생산을 권장하여 크게 치적이 있었다. 1564년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從二品)로 나아가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등 선정으로 알려졌다.  1560년에 정주목사(定州牧使-正三品)로 부임해서도 교육의 진흥과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1572년(선조 5)에 승지(承旨-正三品)를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正三品)· 경연관((經筵官)등을 역임하였다. 

천성이 충신(忠信) 서러우며 모든 일에 성의를 다하고 대소공사에는 힘을 다하며 명예와 지위에 뜻을 두지 않았다.
저서로는 《입암집》이 있다.

 

[참고문헌] 

◇謙庵文集   ◇西厓集   ◇國朝人物考   ◇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