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동유록(東遊錄) -담헌 이하곤(澹軒李夏坤)

야촌(1) 2011. 1. 26. 11:43

동유록(東遊錄)

 

[지은이]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생졸년] 1677년(숙종 3) ~ 1724년(영조 즉위년)

 

금강산으로 향하다

갑오년(1714년, 숙종 40년) 3월 19일.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나서 풍악(楓嶽)으로 향했다.

이유발(李惟發)과 영수암(靈水庵)의 승려 삼임(三稔)과 청담(淸潭)의 승려 신숙(信淑)이 뒤따랐다.

도마치(倒馬峙)를 넘어서 삼승촌(三升村)을 지났는데, 이곳은 이동상(李東相)이 사는 곳이다.

 

이동상이 항상 산수의 아름다움이 금계(金溪)에 뒤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용정(龍亭)에 많이 미치지 못했다. 점심 때 음성(陰城)에 도착했다. 현감(縣監) 이세기(李世機)가 그 아들 이묵(李黙)을 데리고 찾아왔다. 저녁에 유곡(柳谷)의 별장(別將) 집에서 잤다.

 

금강산으로 가는 여정

3월 20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30 리를 갔다. 가흥(可興)에 사는 윤학보(尹學甫)를 방문했는데, 학보는 마침 나가고 없었다. 그 아들이 나와 맞이하고 밥을 먹고 가라 만류하니,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청룡진(靑龍津)을 건너 판교촌(板橋村)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백운산(白雲山) 아래에서 유숙하였다.

3월 21일. 새벽 안개를 무릅쓰고 원주(原州)로 향했는데, 50리를 가자 해가 나왔다. 말 위에서 치악산(雉岳山)을 바라보니, 형세가 매우 웅장하였다. 높은 담과 커다란 성가퀴가 하늘 끝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는데, 치악산이라는 이름이 혹 이 때문에 얻어진 것인가 했다.

 

병영(兵營) 아래 신씨의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고을 사람인 윤기하(尹起河)는 20년 전의 친구로 만나서 즐겁게 옛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상원암(上元庵)의 승경을 매우 칭찬하여 빠져들었다. 성화(聖和) 이덕순(李德淳)이 마침 여기에 들렀다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나를 찾아와 정담을 나누었다.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누대 문을 나서, 성화가 기와 굽는 곳에 도착하여 잠시 쉬었다. 성화와 이별하고 10여 리를 가니 길옆으로 산에 의지하고 시내에 맞닿아 있는 시골집이 보였다. 큰 숲의 고목 때문에 그림처럼 보였다 안보였다 했는데, 누가 사는 곳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저녁에 횡성읍(橫城邑)에서 묵었다. 일찍이 농촌에 정착한 신인방(申仁方)이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는데, 대접이 매우 융숭하였다.

3월 22일. 식사를 마친 뒤 10여 리를 가 벽옥정(碧玉亭)에서 잠시 쉬고, 다시 20여 리를 가 창봉역(蒼峰驛)에서 말을 먹였다. 산은 깊고 골짜기는 험했지만, 땅이 비옥하였고 맑은 물과 고목이 곳곳에 있어서 흔연히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홍천(洪川)에 도착하여, 집안 노비인 해생(海生)의 집에 유숙하였다. 변자립(卞自立) 등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들 변전도(卞顚倒)를 데리고 찾아왔기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이곳을 떠난 지가 20년인데 그 간에 세상 일이 거듭 변하였기에, 절로 한정없는 감회가 일어나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예전에 살던 곳을 찾다

3월 23일. 날이 밝자 길을 돌아 예전에 살던 곳을 찾아갔다. 큰 나무들은 없어지고 멀리 푸른 밭이 바라보이며, 당시의 이웃 마을 또한 모두 없어졌다.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 듯 참으로 순식간의 일이니, 서글픈 마음이 일었다. 40리를 가 원창역(原昌驛)에 도착하여 말을 먹였다. 송황(松皇)이란 고개를 넘었는데, 이곳부터는 춘천(春川) 지역이다.

 

종일 깊은 골짜기를 가고 고개를 넘어서야 비로소 광활하고 상쾌한 들이 보였다. 10리를 가서 부의 관사 근처에 도착하여, 초관(哨官) 황유하(黃有河)의 집에서 묵었다. 부사(府使) 민순(閔純)이 듣고 찾아와 식사를 대접하고, 입산의 비용을 조금 도와주었다. 그 서숙(庶叔)인 해도(海棹)도 또한 찾아 왔다.

3월 24일. 부사가 문소각(聞韶閣)에서 아침을 대접했다. 문소각은 고을 관아의 동쪽 담 밖에 있는데, 자못 화려하고 정돈되었다. 아래로 소양강(昭陽江)에 임하고 있는데, 시야가 멀리까지 트여 좋았다. 부사와 이별하고 5리를 가서 소양정(昭陽亭)에 올랐다. 강과 산이 맑고 아름다우며, 이내 낀 나무가 아득하여 참으로 그림 같았다.

 

선배들은 한벽루(寒碧樓)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했는데,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니 과연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문득 젊었을 때 재방(載方) 형과 걸어서 청평(淸平) 갔던 일이 생각났는데, 황홀하여 꿈만 같았다. 강을 건너 보통(普通)과 수정(水晶)의 두 천(遷)을 지났는데, 모두 매우 위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잔교를 천(遷)이라 부른다. 일엄역(一嚴驛)에 도착하여 말을 먹이고, 모진강(母津江)을 건너고 마령(馬嶺)을 넘었다. 10리를 가서 서북쪽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했는데, 이는 화음(華陰)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앞에 우뚝 솟은 고개를 넘었는데, 이름이 걸기(桀其)였다. 사탄창(史呑倉)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곡운 김수증의 유적을 보다

3월 25일. 호랑이가 무서워 일찍 출발하지 못하고, 해가 높이 떠서야 화음을 향했다.

10리를 가서 입천(笠遷)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사람들이 험하다고 일컫는데, 수정천보다는 훨씬 위험하지 않았다. 몇 리를 더 가니 물과 돌이 점점 아름다웠다. 만개한 철쭉이 시내를 따라 가득 피어, 붉은 비단과 보장(步障)속을 걸어가는 것 같았다.

 

또 5리를 가니 비탈진 흰 돌에 맑은 물이 흘러, 아래에 작은 못을 이루었다. 좌우 봉우리의 석벽이 천 길〔仞〕 높이로 깎은 듯 서 있는데, 고장 사람에게 물으니 소보삽(小洑揷)이라 했다.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말한 구곡 가운데 청옥협(靑玉峽)이다.]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여러 번 아름다운 곳을 만났다. 시냇물이 종종 큰 못을 이루는데, 연못의 물이 제법 넓어서 자못 강이나 호수 같았다.

 

조금 앞으로 1리 쯤 더 가 대보삽(大洑揷)에 도착했다. 큰 대자리를 깐 것처럼 평평한 돌이 펼쳐졌는데, 색이 엇 벤 비계 같았다. 돌 가운데로 흐르는 물은 급하게 내달려 아래로 떨어지고, 턱 모양의 돌이 그 물을 받는다.

 

성난 물살을 날리는 물은 만 곡〔斛〕의 눈꽃 같이 춤추듯 날다가 무너지듯 떨어졌는데, 매우 아름답고 장엄했다. 곁에 큰 돌 서너 개가 줄 지어 있는데, 거북과 용이 몸을 구부려 물을 마시는 것 같아 모양이 또한 기이했다.

 

다가가서 굽어보니 물속의 고기를 헤아릴 수 있었다. 다만 소나무 그늘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또 2리 정도를 가니 날개를 펼친 듯한 정자가 있는데, 곡운 김공의 농수정(籠水亭)이다.

정면으로 화악산(華岳山)을 마주하고 아래로는 지극히 맑고 조용한 와룡담(臥龍潭)에 맞닿아 있다.

<중략>

 

만폭동을 유람하다

4월 7일. 일찍 길을 나서 삼일암(三日庵)을 지났다. 『익사(益師)가 거처하는 곳이다.』 표훈사(表訓寺)의 해장전(海藏殿)에 들어가 경판(經板)을 구경했다. 만폭동(萬瀑洞)에 들어가 청룡(靑龍), 흑룡담(黑龍潭)으로부터 몇 리를 가서 진주담(眞珠潭)에 도달했다. 진주담은 보덕굴(普德窟) 아래에 있다.

 

 

층을 이룬 너럭바위가 가로로 걸쳐 있고 시냇물이 그것을 덮고 흘러가는데, 솟았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구슬 같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시내 왼쪽을 따라 지름길을 취하여 보덕굴에 올랐다.

 

돌 비탈을 돌아 몇 백 걸음을 지나갔다. 비탈이 끝나니 다시 돌층계가 나왔는데, 층계를 따라 몇 십 걸음을 내려가서야 비로소 보덕굴이 나왔다. 가운데에는 사대사상(沙大士像)을 안치하고, 위는 이층 지붕으로 덮었는데 마치 제비 집 같았다.

 

앞의 난간은 아래 허공을 임했는데, 수십 자〔척〕의 구리 기둥으로 받치고 다시 쇠줄을 써서 얽어맸다.

거주하는 승려 혜관(慧觀)이 마루의 판자를 거두고 나를 이끌어 굽어보게 하였는데, 어지럽고 두려워 오래 볼 수가 없었다.


서북쪽을 따라 비스듬히 내려와 다시 못의 상류에 도착하였다. 앉아서 오랫동안 구경하고, 또 앞으로 백여 보를 가 벽하담(碧霞潭)에 도달하였다. 여러 못에 견주어 더욱 크고 아름다웠다. 곁의 돌은 대자리를 깐 듯 평평하게 펼쳐졌고, 그 앞은 절벽으로 물이 위로부터 아래로 나는 폭포를 이루며 떨어졌다.

 

폭포의 길이는 7, 8길〔丈〕인데 곧추 서 있는 모습이 옥룡(玉龍)이 거꾸로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산에 바람이 때때로 불어주면 날리는 포말이 사방으로 흩날려 연기나 눈이 골짜기에 가득한 것 같았다.

 

[원문결락]또 앞으로 수십 보를 가니 귀담(龜潭)이 나왔다. 담에 있는 돌이 거북과 비슷하여 그렇게 이름 지었다. 또 선담(船潭)과 화룡담(火龍潭)이 있었다. 선담은 그 형태가 배와 비슷하기 때문이고, 화룡담은 물이 짙은 검은 색으로 신물(神物)이 숨어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 골짜기는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승경처인데, 직접 보니 들었던 것 보다는 조금 못했다. 못의 형태가 모두 기울고 치우쳐 거울처럼 둥글지 못하고 돌의 색깔도 그렇게 밝고 깨끗하지 않아, 용유(龍遊)와 선유(仙遊) 보다 훨씬 못하였다. 오직 벽하담의 한 굽이가 가장 기이하고 아름다웠으나 또한 파곶(巴串)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는 않았다.

 

마하연(摩訶衍)은 유상객이 가득하여 발을 들일 수 없다고 들었기 때문에, 백운대(白雲臺)에 올라 조용하고 깨끗한 암자를 가려 유숙하려 하였다. 남여를 타고 마하연과 만회암(萬灰庵)을 지나고, 남여에서 내려 작은 고개를 넘었다.

 

오른쪽으로 꺾어 1리를 가니 길이 우뚝 솟았다. 나무를 얽어 사다리를 만들고 양 옆을 각각 능라넝쿨로 얽어매어 아래로 드리웠는데, 능라를 잡고 발을 옆으로 디디고서 올라갔다. 하백운(下白雲)의 뒤쪽 산록이었다.

 

좌우의 석벽은 천 길 높이로 깎아지른 듯 서 있고, 칼등같은 한 줄기 길은 보기에도 두려워 올라갈 수가 없었다.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중백운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암자의 뒤를 따라 1리 쯤 가니 상백운이 나왔다. 암자는 중향성(衆香城) 아래 있다.

 

기이하고 빼어난 산들이 섞여 솟아 있으니 마치 많은 옥들로 장식한 관청에 들어온 듯 휘황찬란하여 형언할 수가 없었다. 정양사에서 본 것에 비해 더욱 기이하니, 멀리서 바라본 것과 가까이서 본 것은 그 색과 모양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이 산의 기이한 승경은 응당 이 암자로 제일을 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 날 비로봉에 오르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유숙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저녁에 중백운으로 돌아와 묵었다.

 

비로봉에 오르다

8일. 일찍 밥을 먹고 만회암(萬灰庵)에 도착하니, 남여를 매는 승려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떠나 마하연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이도일(李道一)은 여기서 작별하고 외금강을 향했다.

비로봉(毘盧峰)을 향해 만폭동의 상류를 거쳐 20리를 갔다.

 

곧추 서있는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매우 웅장하였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니 숲이 울창하고 비단 같은 철쭉이 활짝 피었으며, 산새의 울음소리가 황홀하게 들렸다. 녹음이 진 산길을 갈 때는 실로 일일이 다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북쪽으로 꺾어들어 지름길을 택해 깊은 계곡으로 몇 리를 들어갔다. 『원문 결락』

한줄기 시내를 여러 번 건너 원적암(圓寂庵)의 옛터에 이르렀다.

 

산기슭을 넘었는데, 여기서부터는 지세가 점점 높아져 원근의 봉우리들이 다 보였다.

몇 리를 가서 봉우리 밑에 도달했는데 혈망봉 등 여러 봉우리를 어린아이 어루만지듯 굽어보고 있었다.

 

시냇가에서 밥을 먹고 다시 100여 걸음을 갔다. 길은 점점 가파르고 급해져 넝쿨을 잡고 올라갔다.

산비탈에 이르렀는데, 돌이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마치 사다리처럼 층계를 이루고 있는데, 열 걸음에 아홉 번은 쉬면서 어렵게 부여잡고 2리 쯤 가니 돌 비탈이 끝났다.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서 구불구불 백여 걸음을 가니 중석 등이 나왔다.

 

하석등에 비해 조금 덜 험해서, 1리쯤 가니 돌 비탈이 끝났다. 측백나무 사이로 열 걸음 가서 상석등에 도달했는데, 하석등에 비해 열배나 가파르고 험했다. 한 걸음에 한 번 쉬는데, 가파르기가 곧바로 하늘에 오르는 것 같다. 이처럼 험한 길이 2리 정도 되었다.


봉우리 북쪽 조금 낮은 곳을 따라 남으로 향하여 봉우리의 정상에 도달하였다.

봉우리의 형세가 성 담의 성가퀴처럼 둘러 있어서 그 위를 걸을 때는 마치 성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초목은 모두 웅크린듯 땅에 붙어 있으니 또한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을 알 수 있다.

 

승려는 여기서 바다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마침 날이 어둡고 흐려 눈을 크게 떠도 하늘 저 멀리 바다가 아득하게만 보였다. 다만 서남쪽에 여러 겹으로 엎드린 산들이 보이는데, 파도가 치는 것 같아 어떤 산이 어떤 산인지 알 수가 없다. 날이 저물어 하산했다.

 

몇 리를 갔는데 배고픔이 심하여 시냇가에서 또 식사를 하였다. 가마를 타고 15리를 가서 마하연에 돌아와 유숙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회양(淮陽)으로부터 안부 묻는 편지와 얼마간의 여행 물자가 도착했다.

 

하루 쉬고 난 뒤 구룡연을 유람하다

9일. 종일 피곤하여 문을 닫고 어두울 때까지 잤다. 저녁을 먹은 뒤에 총야(聰也)와 함께 벽하담(碧霞潭)까지 걸어가서, 오랫동안 앉아서 구경하였다. 바람이 심해 돌아오다 선담(船潭)에 이르렀는데, 웅사(雄師)가 좇아왔다.

셋이서 마하연에 도달하였다.

종들이 구룡(九龍)에서 돌아와 길이 매우 험하다 하니, 겁이 나 지름길로 유점(楡岾)으로 가려하였다.

그런데 웅사가,
“내금강은 다 구경하고 남은 것은 이것뿐입니다. 어찌 험한 것을 꺼리겠습니까? 가서 보지 않는다면 이것은 후회로 남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내가 드디어 결정하고 다음날 가서 보기로 약속하였다.

표훈사의 승려 삼언(三彦)이 와서 인사했다. 이 사람은 아버지가 산을 구경할 때 모셨던 자로서 사람됨이 순박하고 조심스러워 좋아할 만하다. 효백(孝伯)이 시를 보내왔다.

10일. 일찍 밥을 먹고 구룡연으로 향하였다. 20리를 가 영랑점(永郞岾)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려 5리를 걸어가서 비로소 영랑점 밑에 도착하였다. 다시 5리를 가 사자항(獅子項)에 도달하였다. 만 길 높이의 절벽으로 이따금 길이 끊긴 곳은 나무를 얽어 사다리를 만들었는데 목숨을 걸고 건넜다.

 

시내를 따라 가니 기이한 봉우리가 번갈아 나오고, 흰 돌이 평평하게 펼쳐진 위로 물이 흘러갔다.

혹 흩어지는 물살이 주름 비단의 무늬 같고 혹 드리운 물살이 구슬의 발 같아서, 즐거움에 취해 위험한 줄도 몰랐다.


5리쯤 가니 비로소 첫 연(淵)이 나왔는데, 큰 돌이 솟아 절벽을 이루고 폭포가 거꾸로 쏟아졌다.

못의 모양은 괭이처럼 동그랗고 물빛은 짙은 녹색이었다. 곁에 있는 절벽은 모두 깎아질러 발을 붙일 수가 없었는데, 다만 못의 왼쪽으로는 잡고서 오를 만했다. 승려들로 하여금『원문결락』

 

수백 걸음을 가게 하니 나무가 똬리를 틀듯 서려 있는데, 헤치고 굽어 살펴보니 큰 옹기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 물이 위로부터 흘러 들어가는데 짙은 검은색으로 그 밑을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이 두 번째 연이다.

 

모양이 첫 번째 연과 비슷하면서 조금 작고, 색깔이 두 번째 연과 비슷하면서 조금 엷은 것이 세 번째 연이다.

 

이로부터 다른 연못까지는 길이 더욱 위험하여 갈 수가 없었다. 승려가 동쪽으로 사자봉(獅子峰)을 올라가면 아홉 번째 연을 굽어 볼 수가 있다고 했다. 다시 첫 번째 연으로 돌아와 그 꼭대기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큰 돌이 덮여 있었다. 돌에 의지하여 아래를 바라보았으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수백 길의 흰 명주가 공중을 가로질러 아래로 드리워진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날이 저물자 돌아와 영랑점에 올랐다.

흰 구름이 바다처럼 넓게 퍼져 있어, 원근의 봉우리들이 절반만 보이고 어떤 것은 섬처럼 꼭대기만 보였다.

 

유점사에 들다

11일. 일찍 일어나 유점으로 향했다. 이허대(李許臺)를 지나다 잠시 쉬고 20리를 가 내수점(內水岾)에 도착했는데, 유점사의 승려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수점의 동쪽으로는 산이 모두 완만하여 뾰쪽하게 솟은 자태들이 적었다. 이것으로 내외 금강산이 구별된다.


몇 리를 가니 칠보대(七寶臺)가 나왔다. 대의 아래에서 식사를 하고 또 몇 리를 가니 은선대(隱仙臺)가 나왔다. 비탈길이 자못 험준하여 승려들이 가마를 큰 줄로 매어 끌고서 마침내 정상에 도달하였다.

 

북쪽으로는 12폭포를 마주하고 있는데 모양이 큰 띠를 드리운 것 같았고, 동쪽으로는 바다가 보이는데 발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이 또한 장관이었다. 대에서 내려와 10리를 가니 대적암(大寂庵)이 나왔다. 암자는 매우 화려하고 정돈되었으나 승려가 살지 않은지가 오래되었다.


동쪽으로 수백 걸음에 쌍언(雙彦), 의심(義諶), 나백(懶白) 등 여러 이름난 승려의 비석이 있어서 지팡이에 기대고 한 번 읽어보았다. 다시 길을 나서 유점에 도착하여 곧바로 산영루(山暎樓)에 올랐다. 누대가 옛날에는 큰 시내에 걸쳐있어 굉장히 크고 아름다웠는데, 승려들이 풍수가의 말에 미혹되어 옮겨 세웠다고 한다.

 

조그만 물 줄기가 아래로 흐르고 누대도 기울어 옛날의 모습이 없었다.

절은 신사년에 화재를 입어 불전을 새로 창건하였다는데, 고운빛이 찬란하였다.


향나무로 가산(假山)을 만들어 영취산(靈鷲山)을 형상하고 53불상을 안치하였는데, 크기가 다 다른 불상의 형체와 얼굴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지극히 교묘하게 만들었는데,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왔다는 말은 참으로 허망하다. 아마 신라 시대의 재주 있는 기술자가 주조하였을 것이다.

 

절의 승려가 관음이 친히 쓴 패엽경(貝葉經)과 지공(指空)이 쓴 불경을 보여주었다.

또 은으로 쓴 미타경(彌陀經)이 있었는데, 이는 인목 왕비(仁穆王妃)가 서궁(西宮)에 있을 때 친히 베껴 부모에게 올린 것이다. 권의 끝에 작은 발문(跋文)이 있는데 내용이 매우 구슬펐다.

 

간성 수령 이숙겸을 만나다

12일. 오늘은 구연동(九淵洞) 안에 있는 내원(內院)을 가서 보려 했는데, 다리가 아파서 가지 못했다.

저녁에 간성(杆城) 수령인 이숙겸(李叔謙)이 그 아들을 데리고 산에 들어왔다. 타향에서 서로 만나니 매우 기뻤다.

13일. 이숙겸은 내금강으로 향했고 나는 선담으로 향했는데, 묘언(玅彦) [이 절의 승려이다.]이 따라왔다. 3리를 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는데, 물과 돌이 맑고 아름다우니 바로 선담의 하류였다. 수백 걸음 앞으로 나아가니 높이 솟은 큰 돌의 가운데가 파여 [원문 결락] 물이 쏟아내려 못을 이루었다.

 

물빛은 상당히 맑아 만폭동의 선담에 비해 몇 배나 좋았는데, 모양은 아주 닮았으면서도 그것에 미치지는 못했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기문에서 '물이 선담의 네 모퉁이에 찬 후에 밑으로 떨어진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또한 그렇지 않다.

 

이 못으로부터 위에는 아름다운 못과 폭포가 매우 많아서, 묘언의 말로는, '만폭동과 더불어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골짜기의 넓고 트인 것도 못하고 봉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것도 만폭동에 미치지 못하니, 다만 하인들만 수고스럽게 한다.”
라고 하자 묘언이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다리가 아파서 다 구경하지 못하고 잠시 후에 돌아왔다.

 

지안(智眼)이라는 자가 속리산(俗離山)으로부터 왔다. 그는 설제(雪霽)의 뛰어난 제자로 경전에 두로 통하여 남방의 대종장(大宗匠)이 되었다. 불러서 말을 나누었는데, 말하는 논의가 대단히 분명하고 박식하였으나 조금 과장하는 병이 있었다.

 

매제를 만나다

14일. 비바람이 크게 일었다. 홀로 앉아 있으니 무료하여 지안을 불러 선(禪)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날이 조금 개자 걸어서 묘언의 방을 찾아갔다.

15일. 비가 완전히 개지 않았는데 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절의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 15리를 가 불정대(佛頂臺)에 올랐다. 위태로운 바위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었는데, 서쪽으로 12폭포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넓은 바다가 보여 은선대와 우열을 가릴 만했다. 조금 있다 대에서 내려 1리쯤 가니 원통사(圓通寺)의 승려들이 남여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 리를 더 가서 박달곶(博達串)에 도착했는데, 험준한 돌 비탈길은 영랑점에 뒤지지 않았다.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7, 8리 정도에 시내가 있는데, 물으니 바로 성문동(聲聞洞)이라 했다.

비록 서려 있는 돌이나 맑은 담의 경치는 없지만, 옥이나 눈 같이 몹시 흰 돌이 또한 마음에 흡족하였다.


시내를 건너 남쪽으로 꺾어 1리 정도 가니 송림굴(松林窟)이 나왔다. 굴속에는 오백 나한을 안치하였다.

동쪽에는 송림암이 있는데, 매우 조용하고 깨끗하여 좋아할 만하였다. 외금강에서는 이 암자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참선하는 승려 7,8명 정도가 있는데, 향산(香山)에 거주하였다.

 

밀기(密機)는 마하연에 있을 때 처음 내게 인사한 승려로 백운대에 함께 갔었다.

내가 유점에 도착했을 때도 밀기가 나를 대접해 며칠을 머물렀는데 오늘 또 함께 송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하안거를 하려하는 것이다. 그 정성이 칭찬할 만하여 작별의 정표로 시를 지어 주었다.

 

점심 때 원통암에 도달하였다. 식사를 한 뒤에 가마를 놔두고 말을 타고 1리쯤 가니 길 오른쪽에 상당히 아름다운 징담(澄潭)이 나왔다. 말에서 내려 잠시 쉬었는데, 날이 저물어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10여리를 가 칠송정(七松亭)에 도달하여 곧장 쌍벽천(雙碧川) 위로 내달았다.

이곳은 남강(南江)의 상류로 물빛이 매우 맑고 푸르렀다. 강가에는 열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바위가 있는데, 큰 소나무가 덮고 있어 아주 맑고 시원하며 그윽했다. 강 주위 일대는 눈과 같은 흰 모래가 있고 해당화가 만개하여 또한 하나의 승경이었다. 주인 권구(權絿)가 나와서 맞이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거산(居山)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니, 또한 훌륭한 선비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이별하였다. 10리를 가서 고성(高城)의 동문을 경유하여 해산정(海山亭)에 도달하였다.

 

수령인 매제 중린(仲麟) 이성흥(李聖興)이 기생들을 데리고 정자 위에서 연회를 하고 있었다.

내가 희롱하여,
“그대는 부인과 같이 있어야 하거늘 감히 이런 풍류를 즐기고 있는가?”
라고 하자, 이성흥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원문결락』

 

해금강과 발연을 유람하다

16일. 아침에 대호정(帶湖亭)으로부터 배를 띄우고, 붉은 절벽으로 된 바다 입구를 구경하였다.

칠성암(七星巖)에 올랐으며 군옥대(群玉臺)를 들렀다. 해금강(海金剛)을 유람하다가 해질 무렵 돌아왔다.

날이 저물어 삼일포(三日浦)는 가지 못했다.

17일. 밤부터 비바람이 크게 일더니, 저물녘에 비로소 날이 개려 하였다. 발연(鉢淵)을 보려고 서문(西門)을 나섰는데, 강물이 크게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강을 따라 10여 리를 올라가 화전(花田)에 도착했는데, 여기도 시냇물이 불어 힘을 다해 간신히 건넜다.

 

10여 리를 더 가서 발연이 나왔는데, 폭포의 아름다움이 선담에 뒤지지 않았다. 불어난 물 때문에 여러 곳을 다 구경하지 못하고 폭포암(瀑布庵)에 들어가 자징(自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연사에서 점심을 먹었다. 절은 매우 허술하여 사람이 거처할 수 없었다.

절 뒤에는 작은 비석이 있는데 오랜 세월에 침식되어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10여 리를 가서 외구룡(外九龍)의 하류에 있는 신계사(新溪寺)에 도달하였다.

매우 드넓게 트인 곳에 자리 잡고, 울창하고 윤택한 봉우리 암벽을 마주하고 있어 좋았다.

 

정양사와 상당히 비슷하나 폐해진 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막 새로 짓고 있는데 방(房)과 요사(寮舍)는 띠풀로 만들었다.

 

총석을 유람하기 위해 통천으로 향하다

18일. 오늘은 외구룡을 보러 가려했으나 비 온 뒤라 돌이 미끄러워 가지 못하였다.

총석(叢石)을 먼저 보려고 통천(通川)으로 향했다. 20여 리를 가 옹천(甕遷)을 지났는데, 높이가 몇 백 길이나 되는 위험한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었다.

 

올라갈 때는 실 같은 길이 사람과 말이 겨우 지날 만하였고, 내려올 때는 수백 개 북이 울리는 듯한 거센 바람이 세차게 부딪혀 매우 두려웠다. 천(遷)을 지나 30리를 가 운암역(雲巖驛)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도일이 통천으로부터 고성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도중에 서로 만나니 매우 기뻤다. 저녁에 통천의 읍내에서 유숙하였다.

19일. 수령인 이시징(李蓍徵)이 사람을 보내 먼저 인사하고 조금 후에 찾아왔다.

그 아들 이관제(李寬齊)도 좇아왔다. 처음 만났는데 오랜 친구 같았다. 말하는 것이 겉으로 꾸미지 않아 즐겨할 만한 사람이었다.

 

총석정에 가기로 약속 하고 밥을 먹은 뒤에 함께 떠났다.

환선정(喚仙亭)에 올라 잠시 앉았다가 걸어서 총석정으로 갔는데, 바람이 거세게 불어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내려와 매향비(埋香碑)를 보고 산등성이의 조금 평온한 곳을 골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 물가의 암석 위에 앉아 점심을 먹고 왔다. 오늘 금강굴(金剛窟)과 천도(穿島)를 가서 보려고 했는데,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 배를 띠우지 못하니 아쉬웠다.

20일. 가늘게 비가 내렸다. 식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운암역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저녁에 신계사에 도착하였다. 나와 함께 용추(龍湫)를 구경하려고 이도일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옥류동으로 향하다

21일. 비가 아직 완전히 그치지 않았다. 용추로 향해 길을 나서려는데 승려들이 모두 힘들다고 말렸다.

나는 응하지 않고 이군과 승려 10여 명과 함께 기어이 길을 나섰다. 선담을 지나 고개를 넘어 견여를 타고 10여 리를 갔다.

 

옥류동(玉溜洞)에 못 미쳐 길이 험한 까닭에 가마를 버려두고 지팡이를 짚고 갔다.

잠시 길 옆 돌집에서 쉬었는데, 평평하고 넓고 깨끗한 너럭바위가 벽하담의 열 배였다.

 

다만 물이 발처럼 쏟아지는데 벽하담처럼 곧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앉아서 구경했다.

냇가 가운데로 난 길을 택하여 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절벽 위로 몇 리를 갔다.

 

길이 급하게 솟구치다 끊어져 밧줄을 타고 내려오기를 세 번하고서야 마침내 용추에 도달하였다.

그 웅장하고 장엄함은 사자봉(獅子峰)에서 볼 때와 비교해서 백 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참으로 천하의 장관이었다. 향로와 안암(鴈巖)의 폭포가 이것과 비교해서 어떠할지 모르겠다.

나는 백운의 봉우리와 외구룡의 수석이 이 산의 제일 기이한 구경거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만 우리 동방 다른 곳에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비록 중국이라도 상대하기 어렵다.

『 원문결락』

22일. 고성읍으로 돌아와서 해산정에서 잤다. [원문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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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東遊記。

 

蓋是未結撰者。如龍淵叢石諸記。未免草草。想是行時略述顚末。以備日錄。而未及十分修潤。十分摸寫者。恐不必傳後。如以盡刪爲歉。則百塔須彌萬瀑。三記可取。而百塔重在攀陟艱難之狀。具些塔劇向月。終不如全刪之爲精耳。

 

甲午三月十九日。早飰發行。向楓岳李惟發及靈水庵僧三稔淸潭僧信淑從焉。踰倒馬峙歷三升村。是李東相所居。李常稱溪山之勝。無减金溪。以余所見。不及龍亭遠矣。午刻到陰城。縣監李世機率其子默來見。夕宿于柳谷別將叔家。

 

二十日。早發行三十里。訪尹學甫于可興。學甫適出不在。其子出待留飰。飰罷別去。渡靑龍津。午飰板橋村。夕宿白雲山下。
二十一日。冒曉霧向原州。行五十里日始出。馬上見 雉岳山。勢甚䧺偉。如崇墉巨堞。屹立天畔。雉之爲名。或由此得之歟。朝飰于營下申姓人家。州人尹起河卽二十年前舊知也。邀與相見。道故歡然。仍盛稱上元庵之勝。令人馳神。李聖和德淳方來此。聞余至。亦來見穩話。並轡出樓門。至聖和陶瓦所又少坐。別聖和行十餘里。見路傍有村舍。依山臨溪。長林古木。晻映如畫。不知何人居也。夕宿橫城邑底。主人姓名申仁方。曾住農村云。待之甚欵。


二十二日。飯後行十餘里。少憇碧玉亭。又行二十餘里。秣馬蒼峰驛。山深谷阻。壤地肥沃。淸流古木。在在 有之。令人欣然有卜㞐之意。夕到洪川。留宿于家奴海生家。卞自立輩聞余至。率其子顚倒來見。至於握手墮淚。余去此已二十年。中間人事嬗變。自有無竆之感焉。亦不覺潸然出涕。


二十三日。平明迂路過故居。喬木無存。綠疇弥望。當時隣曲。亦皆散亡。滄桑互易。眞朝暮間事耳。使人愴然。四十里至原昌驛秣馬。踰一嶺。名松星。是春川界。終日行深峽。過領始見野色。曠然可喜。十里到府下。舘于哨官黃有河家。府使閔純聞而來見饋飰。略助入山之資。其庶叔海棹亦來見。


二十四日。府伯邀飰于聞韶閣。閣在州衙東垣外。頗華整。下臨昭陽江。平遠可喜。別府伯行五里。登昭陽亭。江山淸麗。烟樹微茫。眞如畫啚。前輩以爲遠勝寒碧樓云。是足跡所未到處。未知其果然也。忽憶少時與載方兄步往淸平時事。恍然如夢。渡江歷普通,水晶二遷。俱極危險。盖東俗謂棧爲遷也。到一嚴驛秣馬。渡母津江踰馬嶺。十里取支徑西北行。是入華陰路也。前得一嶺陡峻名桀其。到史呑倉下宿。


二十五日。畏乕不得早發。日高行向華陰。十里到笠遷。此地人盛稱其險。而遠遜於水晶遷。行數里水石 漸佳。躑躅方爛開。與溪終始。如行紅錦步障。又五里有白石陂陀。淸流注之。下成小泓。左右峰壁。皆削立千仞。詢諸土人。稱爲小洑揷。谷雲金九曲是靑玉峽云 泝溪而行。累得佳處。溪流往往成長潭。淵淪滉漾。頗有江湖意。稍前里許。到大洑揷。石平鋪如大筵席。色若截肪。水由石中行。爲激湍下墜。有石承之如頦頷。水拗怒噴薄。如萬斛雪花。飛舞崩騰。甚奇壯。旁有巨石數四離刊。狀亦殊詭。類龜龍俛飮于水。距而俯之。溪中魚可數。但無松樹蔭翳可恨。又前二里許。有亭翼然。卽谷雲金公籠水亭也。正對華岳山。下臨卧龍潭極淸幽。 亭前又有老松數十株。蒼翠森蔚。尤爲可喜。壁有尤翁詩及公詩與記。庭中竪小石碑。上刻尤翁記朱夫子卧龍潭詩。公以漢隷書之。嘗見公所著華陰洞志。公宰平康時。始得此地。栖息往來者殆四十秊餘。晩後又築不知菴松風亭于白雲溪。而其㙜榭樓觀之勝。視此尤倍蓰。農岩亦嘗稱之曰粧點如仙家。可一玩。噫。公之名位雖遜于其弟兩相公。而能超然塵垢之外。得保淸凈之樂者。又非兩相公所及。其輕重取捨。世必有辨之者矣。士人方道昌來見。此人是谷雲祠宇齋任也。略道山中故事。問淸寒子遺址。在於內 倉云。偕方君瞻謁公畫像。還飰亭中。日已昳。要方君爲噵向不知庵。行未數里。忽見綠欞朱檻。縹緲林表。問之卽松風亭。據大石爲址。僅安三楹。其一參以石柱。製度極奇巧。下有盤石如布白玉。泉聲潺湲可聽。楓栝檜栢。晻映左右。幽森淸絶。令人忘歸。但上下絶無潭泓可欠。水東又有人文石。刻太極啚,河洛圖,書先後天卦象。舊聞三一亭,有知堂俱在其上。前年山水暴至。未免崩壓。閒來往橋又以碎礫。改築殊不雅。粧點如仙家者。意亦減半矣。不知庵在亭西數十步。公常燕居于此云。庄奴五十同延坐室中。開淸夢樓。 請觀藏書及畫廚。其中有諸葛武侯梅月堂畫像。是曾奉于有知堂者也。伴睡庵僧勝天一性來謁。庵在華岳北麓。由亭後取路。南行五里爲庵。庵東有㙜。正好觀華岳。此山雖乏秀峭之態。穹林巨木。上干雲霄。烟霏雲嵐。朝暮萬狀。亦一勝也。夜與方君同宿于庵。勝天自言曾住白雲山。出入農岩門下。農岩往槽溪時。渠亦陪往。又道君山少時事。聞之愴然。


二十六日。今日欲作七仙之游。又請方君噵焉。早飰離庵一里。所有水石頗佳。下馬少坐。歷路再登松風亭。勝天隨至此告別。出洞循溪而東。數里田疇交錯。 桑麻翳然。殊無深峽氣象。折而北二十里。踰小嶺。又折而東三里。有村負山帶溪曲。有幽致。是爲孟男村。昔有孟男者居此。故因以名云。溪水有二支。一出鶴嶺下南流。一出七仙洞東流。至村西合流。行盤石上。下爲小潭。石有紋蜿蜒如龍。爪角悉具。名曰卧龍。跂石觀魚。臨流濯足。意甚適。少頃方君招村民使之噵。盖方君嘗一至而未能窮源。路徑亦不熟云。稍前數百步。忽見靑林中雪色皓然奪目。急趍視之。石色鮮潔。一川俱明。已令人魄動。余卽箕距其上。無意前行。方君强余曰此上八九里有三直。峽人謂瀑爲直 是洞中 勝處。盍先往觀。下流諸勝。來時細加搜訪。如此小小水石。便尒留連。恐日力不足矣。余猶不應。累廹而後行。溪右石磴甚危。往往路絶。以獨木接之。乍步乍騎。二里許有村家。臨水新刱。茅屋松籬。亦極幽寂。由村後北行三里。得癈寺址。舍馬杖策。並溪而行。古木壽籐蒙密交絡。迷不知所入。下有溪水濺濺悲鳴。似與人訴。左右靑峰。見客迎送。皆劍立千尋。望之凜然。又行五里。始抵所謂三直。以全石爲底。淸流被之。隨勢爲水簾者三。長各六七丈。輒承以小泓。綠凈可鑑鬚麋。旁有老松數四。大皆十圍。偃蹇蔚跂。布影委潭。時 有山風漻然。與潭光搖漾。亦一奇也。俯仰賞玩。不覺山日已昳。始尋歸路。回頭戀戀。如別意中人。從溪中行亂石間。每遇會心處。輒植杖凝睇不去。同行往往窃笑。余不恤。如是者屢。到寺址始騎馬行。日晩飢甚。入村家。主嫗供粟飰當敀菜。味極佳。又行一里。到玉簾泉少坐。盖一洞石皆瑩膩。如玉琢成。又多潭瀨。綠色澄澈。巖壁奇峭。金碧交輝。壤地肥衍。可耕可屋。農岩嘗品題置諸華陰之右。信然。洞舊號妙峰。谷雲改以今名云。別方君北行十餘里。抵鶴嶺。險危殆平生刱目。登顚歇馬。下嶺行古木中十里。路旁有村舍。奴 輩已先到。具食略啜。又東行十里。抵蚕谷村。星已滿天矣。


二十七日。曉行四十里。到金化舘驛吏家。通于本倅李秉淵一源。一源來見曰始吾來時。人皆曰迎接游客。是此邑之一弊也。莅邑已五年。親舊過此者。只是金景明與吾君耳。以此知入山者絶少。又言山中固多遺勝。如九歧潭亦其一也。在圓通庵西數十里。其勝無减於九龍淵。山僧諱甚。人鮮到之。仍苦留要往七松亭觀魚。飰已偕行。歷登二樂亭。是銀溪驛舘也。眼界頗通闊。察訪適赴京不在。庭宇閴然。梨花如飄 雪。約行二里。到溪邊柳林。一源忽下馬。余謂一源曰所謂七松亭者何在。一源曰此卽是耳。余笑曰何濫冒至是。此固一世風習。渠亦不免耶。一源亦笑。是日風日姸和。柳陰中新鸎淸嫰可聽。席地而坐。亟呼一觴。次杜律韵各賦數詩。官人網得數百溪鮮。斫膾佐酒。又設魚羹飯。風味殊不惡。歡飮至夕而罷。座客龍仁人姓李字士謙者及邑人尹進士,謫客鄭姓人而皆忘其名。士謙是月山大君遠裔。方爲一源衙客云。縣南一里所。有柳琳破虜處。地名柏田。行遽未及往。近民堂在衙內。前有小池。中設五石峰。周遭植花木 頗幽潔。園後有茆亭。顔以學圃。亦佳。


二十八日。一源出示所藏畫卷。其中有鄭㪨山水。筆法摹唐人。乏骨氣。用墨又枯燥。遠遜於尹孝彦矣。飰罷別一源行。風日甚惡。氣頗不平。四十里到直木驛秣馬。歷憇披襟亭。淸川翠樾。亦自可意。又四十里宿昌道驛。主人朱貴英者是驛吏。年將七十。爲道楓岳之勝。此心飄飄然已在香城萬瀑之間也。是日微雨。入夜始止。


二十九日。自昌道行二十餘里。至麥阪。兩山束起。大川貫之。色沉黑。俯視戄然。上有浮橋以濟人。土人云 夏秋間潦水漲則行旅多淹滯。尤以是其險名於國中云。至新安驛。聞淮陽府使李公徵夏往雪岳未還。欲自此直趍山中。得村人前噵。十里踰蘆谷領。山■谷深邃。古木參天。又行十餘里踰馬齕占方二嶺。僧俗自山中來者絡繹布路。表訓僧秋藏爲人可愛。仍偕至泥橋村同宿。問九歧潭之勝。爲余道之頗詳。盖一源亦聞於藏矣。此地人雖帶索擔糞者。亦能談山之勝。可知去山邇也。

 

三十日。犂明作行。十餘里到墨喜領。土人云領上望楓岳諸峰。甚了了。其勝無媿於正陽寺云。是日適昏 靄不能夬覩。但見數三峯影。隱隱雲氣中。如水墨畫爲烟煤所薰。依微略卞耳。有牽牛而蔭樹下者。意思甚閒。余亦歇馬其旁。少頃下領。樹陰蔽日。泉聲夾路。心樂之。殊不覺其險峻也。十里踰鐵伊領。洞壑寬敞。南有蒼壁削立。溪水滑滑流其下。上有雜花斑駁可愛。一僧出林中。見客如驚鹿。問其名雙勳。住表訓。使之噵。約行十餘里。有飛橋跨溪。卽萬川橋。高可三百尺。俯視怖懍。長安寺在其西。過橋登山暎樓。先有人坐樓上。見余起迎。問其名姓。是保閒齋八世孫申軾敬夫也。寺再燬於火。今方改刱。農岩記所謂金碧宏 麗者。無復舊觀。洞口之杉檜挺立者。寺僧亦剪伐殆盡。東北諸峰。果聳001秀峭。亦非純骨。其尊者爲長慶峰。餘爲觀音地藏。無普賢。亦與記文少異矣。夕後僧輩運入大木。邪許之聲。震動山谷。亦一壯觀。是夜與申君同宿。僧載會來謁。卽金景明記中所稱住持載會也。爲人頗淳謹。


四月一日。約載會將游百塔洞。洞在大藏峰下靈源洞北。自長安相去僅四十里。山僧憚藍輿勞諱甚。人無知者。近時或有告朗善君侃。侃嘗一至。自是稍稍有知者。亦以其深險。往者絶罕。僧徒聞余行。多沮撓。 余不聽。早飰偕申君步過萬川橋。登輿泝溪而上。溪中石往往有可坐處。色皆靑。間有白暈。歷地藏庵。東北行入百川洞。岩壁奇秀。溪流澄澈。已覺神思勃勃。行三四里。有大石嶐然。上平廣可容數十百人老樹蔭之。是爲明鏡臺。去臺數十步。有潭廣可數畒。形正圓如展大鏡。色澄綠見底。旁刻玉鏡潭三字。潭東一峰拔地卓立。狀若植劍。甚奇偉。申君至此告別向表訓。余坐玩良久。乃從潭右行。有癈城門甚庳。僂而可入。世傳新羅亡後。有王子恥之。逃隱築城以居。卽此城也。南折數里。更迤而東。磴路■險甚。崎崟側塞。幾 不可足。垂蘿巨木。干霄蔽日。奇花異卉。遍地羅生。境界幽邃。氣象森沉。逈與城外不侔。夾溪石峰。攢爲劍戟。橫爲屛障。皆飛舞生動。其端皓然雪白。或有脩纖獨秀。旁石附麗。亭亭如塔者。會指而謂余曰此洞之所由名。余笑曰造物小兒。求何福田利益。作此伎倆。以媚黃面老子耶。會瞠目不喩所謂。又數里有溪南來入之。是十王川。自此路益巇。舍輿杖策。驀澗躡石。若拾級而進。澗深石齾。乃緣崕旁攀木側行如猿狖。至崕陡絶。復取澗道。如是行十數里。耳化爲水。眼化爲石。毛髮呼吸。俱欲化爲艸木雲嵐矣。行已半洞。得 峰以百計。塔半之。簾泉又半之。塔奇於峰。泉奇於塔。泉之奇者。石壁側立幾數十仞。瀑從其顚直瀉下。有巨石仰而障之。如人吐舌。若欲折其橫騖之氣。瀑與之鬪。久而乃遜。從兩旁噴出如舞雪。余始見駭甚。徐而玩之。又未001。終乃叫呼跳躍不去。從僧多窃笑。泉舊無號。其亦不幸而未遇名賢也。肇錫以噴玉。由瀑左行。谷中一里所。又右轉行崕腹數百步。踰一麓崕。忽峻削無可爲徑者。綴小木如彴半已朽。下臨絶谷。深昧不見底。余目眩足心酸不敢度。令載會它從者先之。去上衣冠屨置崕广中。卽屬耳於壁。寄足於 木。曲腰而寸進。石髮又在手心。搖搖然猶未定。忽念袁中郞死在冷石語。膽始凝。乃得度。又詰曲行古木中數里。忽見大玉石嵌空唅呀。瓊簾百尺。從中下垂。不覺驚叫。疾趍至前。盖積氷中空。瀑流瀉出。眞天下奇觀也。洞口見杜鵑花已落盡。至是絶無開者。可測山之高寒也。循傍壁躋顚。前行百餘步。有朗善君題名處。距石箕坐。南面而視。有峰三四。離立縹緲。玲瓏如玉琢浮屠。奇麗不可狀。會曰洞之勝盡是。東南間尙有隱隱數峰。巉秀可愛。意其下有佳處。會日晩憊甚未能窮。少選循舊路至十王川。又登輿南行。入靈 源洞。五里登沃焦臺。十王峰羅列于前。見客若將拱揖。又有牛頭馬面二峯。厥狀極肖。從東南迤下一里。有靈源庵極幽絶。一僧守之。名凈心。䫉古心靜。階下有草。莖葉與蓮相類。僧謂之剛蓮。極欲留宿。從人多。且無糧。未果遂行。又少坐玉鏡潭。至百川洞。長安僧持火來迎。到寺已二皷矣。夜宿靈光殿。枕席之下。水聲激激不絶。益覺嘉州夜宿水聲中之語。高妙矣。


二日。夜睡美。不知有雨。朝起開戶視之。前峰濃綠欲滴。宿雲助其姿媚。尤可愛。庭際潔凈如洗。樹木蒼蒨。流泉㶁㶁於古松之間。境旣幽寂。心和氣恬。便覺登 峯度壑之爲太勞也。終日與僧輩。焚香聞話。僧祝坦宜寧人。略解文字。爲人淳實。其師覺元。是楓潭義諶弟子。精於經律。與自澄輩齊名。去夏示寂云。朴高城泰遠入山。遣人相問。且餽魚鰒。


三日。飰已離長安向表訓。夾路皆蒼杉老檜。躑躅方盛開。照爛山谷。雨後泉聲。益琮琤可聽。歷彌陀庵。居僧方闔戶晝寢。見客出迎。巾屨白凈。意象安閒。使人翛然有遺世之想。少憇從庵西取路。北折行一里。有磴路頗艱險。卽農岩記所稱線路懸崕。過者掉慓者也。視百塔若康莊。其下爲鳴韵潭。內山諸洞之水。至 是合流。鍵以潭。形橢如槽。色沉黑若有神獸閟焉。時新雨雪噴雷吼。尤可壯也。左有石壁削立亦壯偉。僧傳昔有金同者習外道禪。與普濟鬪法不勝。濟仍擠之潭中。自是水常幽咽。如人哀號。稱爲鳴韵潭。又名金同淵。盖濟是如來現化。而同之前身爲波旬。故如是受報云。其言極荒誕。循溪行數里。過三佛岩。岩有刻佛三頗精巧。又前數百步有白華庵。庵據平地極寬敞。有海松萬株。森立環圍。反覺幽趣媚人。三淵金丈愛其勝。前冬來栖。至春乃去云。居僧致䧺是自澄弟子。儀象魁然。博通經典。能詩可與語。出示十地 論。卽天親所著。遽甚未及閱。朴使君觀玉鏡潭還表訓。歷見少話而去。其子弼履,女婿李聖興木川人李道一從焉。申君敬夫自正陽向長安。聞余在此。亦來見。午飰已。步至庵後。觀休靜諸名僧舍利塔及碑。靜觀齋所撰義諶碑頗可觀。穿松林迤至表訓寺。有樓跨溪。■扁以山暎。聞楡岾寺亦有山暎樓。未知山暎二字有何妙義。而三寺共之。僧輩之陋至此。且山之峰巒岩洞。俱以佛書佛號名亦可厭。壁有栗谷先生五言長篇詩。兒時讀是詩。頗得山之勝槩。此非先生手筆。盖後人追書以揭者也。此寺不經兵燹。制度精 緻。金碧爛然。又有懶翁袈裟古銅鉢盂。但所供曇無竭像西向立。此與它寺有異。與朴使君穩話。至夜分乃罷。座客有張震明者。出入尼山門下。而方爲使君衙客云。


四日。朝微雨作。晩而開霽。朴使君向外山。余向松蘿歷白華東。行二里所。山益深路益險。怪石犬牙錯出。夾以巨圍之木。藤蘿蒙頂。陰厚如幄。其下澗聲甚悲。籃輿僧十步一遆。膚汗如雨。喉間作拽鉅聲。忽念彼亦人哉。心甚憐愍。遂下輿挾策以進。余則五步一休。隨泉聲輒止掬飮之。洒然若甘露。又上數里。當途有 老樹根逬出石罅。蟠屈若伏虬。踞而四顧。遠近峯巒。如翔如舞。如騰如躍。如拱如揖。雨後碧鮮尤媚人。稍前有癈城。亦新羅王子所築也。由城上折北而行。徑忽絶。編木架空。下俯幽壑。履之窸窣有聲。使人眩悸。攀援旁壁。側足僅得度。少北爲松蘿庵。室空無僧。梨花滿庭。筧泉淙淙。幽敻寥閴。殆不似人間矣。自此去望高臺不遠。新雨石滑不得往。復從舊路至癈城。又南行五里。有一庵極瀟洒。背負大石壁。壁上又出一石峰。聳立數千丈。若俯壓人。僧曰此爲三日庵。昔有高僧居庵中。三日能訂道。故仍以名云。又行未一里。有安養庵。前對一峰。峭秀可愛。名曰天官庵。以此有少致。壁有先君子題名。辛未八月。同崔孝伯來游。其明年春又來游。此則初游時所題也。覽之愴然。東有佛殿。刻岩石爲佛像極精細。仍覆瓦椽。亦可觀。登輿自庵前迤下。忽聞水聲如雷。飛沫濺輿中。驚顧視之。已抵鳴韵潭。而所見比潭右尤覺奇壯。又坐玩揭而西趨一里。入神琳庵。亦無僧。荒落殊甚。庭中有小塔。石色黑潤。類藍浦硯石。塔面有刻記。是皇統二年僧懷正所撰。文頗可觀。僧言塔中曾藏世尊舍利。有行脚僧毁塔偸去。寺亦因是癈云。少憇遂還白華。夜宿 䧺師房。忽見新月娟娟松表。欣然起行。至浮屠臺。於栝翳然。碑塔相向。如人儼立。亦一奇也。羅州僧載聡前年從三淵來庵。師䧺不去。爲人頗開敏。盛稱船庵須彌臺之勝。且慫惥約以明日往訪。
五日。僧告日出。急就輿。使載聡前噵。至表訓㕠勳。又從沿溪北行。溪中巨石。磊砢相依。水行其間。奔騰激射。轉爲輪曳爲練拂爲雪。聲如轟雷。震撼山谷。心目爲之俱駭。稍進數十步。兩旁壁立積鐵可萬仞。沉昧杳窕。如行甬路。仰頭惟見天光。狹靑如一綿。聡指壁下小泓曰此卽靑龍潭也。余戱曰所謂萬瀑洞者。果 止是邪。聡答曰待明日至碧霞潭上試看。郞君亦作此語否。相視大噱。折而西入圓通洞。洞口有大石盤陀。可坐數百人。上刻楊士彦蓬萊楓岳元化洞天八大字。幾欲化龍飛去。左爲金剛臺。峭銳揷天。舊有靑鶴巢顚。鶴去巢空。僧指點誇人。溪流循其趾。遇陡崖橫瀉爲瀑。下有大石受之。中陷爲潭如槽。右有磴路頗艱。過此地漸坦夷。茂樹夾澗如簇。籃輿徐行綠陰中。花氣醉人。鶯聲砭耳。詠子瞻空山無人水流花開語。宛然實際。無何到圓通庵。曾經光陵御幸。朱甍畫檻。尙存舊制。又東北行二里。渡一略彴。舍輿緩步。遇 石則坐。逢泉則漱。從僧戱摘山花。散擲溪流。至泓處旋舞不去。以爲笑樂。約行三四里。又繞山脇。曲折蛇行。愈上愈嶬。回顧來路。只是一道蒼嵐。崕徑忽斷。一木橫空。心慣險無怖。賈勇而度。望崕广間有小屋如懸磬。問諸僧。乃船庵也。稍前有僧具袈裟出迎。䫉類有守。是主僧神普。噵至庵。出松荼沃喉。與之語。語皆閒澹。頓滌人浮想。出前楹。下皆千丈巨檜。但見頭抄如稚笋始萌。由庵西行一里所。危壁當面。孤搴直上。攀援路絶。同行皆作退轉。心勳僅緣壁罅先躋。懸絙垂下挽以登。從者亦皆魚貫而上。至顚始咋指相戒。右轉一里。抵須彌庵。茅屋新搆。草草可愛。翠壁四環。間有幽花點綴。面前一峯。形如覆鍾。尤亭亭峭秀。其奇勝足可眉宇一山。居僧適出不在。庭戶蕭然。更覺有趣。泚筆題名姓。又書曰天下第一名山。山中第一庵子。題畢聡供湯飰。食已登須彌臺。臺正對永郞岾。萬石叢立。霜鋩雪鍔。不减景延廣十萬橫磨劍。其下又有天然石塔四五。皆揷地而生。如以銀環累成。晶熒璀璨。光氣四燭。如百塔者堪拜下風。石之奇幻如此。天公亦太狡獪。目飽乃下。小疲卧室中。有人在洞下呼僧。聲與谷應。反繞出庵後。若從峰頂來。亟啓牗視之。乃李君道一也。余笑曰此中乏桃花流水。何得引漁郞來。答曰摩訶老僧。作迷津慈航。爲此兩隻眼孔。幾折殺老脚耳。李君年六十。自南海匹馬入山。不憚深險。皆步往。其老勇可尙也。李君問塔所在于聡。聡戱指前峰曰此卽是也。李君有不信色。余指示路徑。李君偕聡往。少選還。遂偕行。自庵前迤邐而下。行垂藤古木中。渡溪而西。入眞佛庵。腐瓦斷椽。縱橫亂草間。殊敗人意。獨庭際三石。峙立如人竪指。差可破顔。又南折行。得一泉一石。輒坐玩。抵暮還圓通庵。此以下缺 此以下文未脫藁。從亂草中謄出。文多脫略。


002
六日。飰後與僧輩步行。行五里。由天德庵舊基。一里踰普賢岾。自圓通至此。皆行老楓古杉中。不見天日。氣候淸凉。無異深秋。右折得支徑二里許。到安心少憇。登開心臺。望衆香城。掩暎嵐氣中。如隔靑羅帳見玉博山。亦一奇也。歷開心凈心二庵。三里到正陽寺。直抵所謂八角殿。制作極工巧。壁上皆佛畫。世傳爲吳道子筆非是。要之亦非新羅以後筆也。秊前僧輩憫其剝落。邀庸工改加丹彩。無復舊觀。其無識至此。良可痛也。佛殿天板上藏大藏經。令僧輩取來。皆曾所未聞者。麗文宗時設局鏤板。各印一本。藏諸名山。 此其一也。此等經文。皆是六朝間文士名僧輩。僞托佛名。造作異說。以亂吾道。以惑衆心。而人君世主迷而不悟。寶之若拱璧大貝。至於糜費財用。剞劂梨棗。以啚不朽。豈不慨哉。午飰已步出歇惺樓。遂至天逸臺。昏嵐始褰。夕陽照映。香城一帶。如銀城玉壁。熀耀奪目。令人不覺心醉。若季札之觀樂。雖有復進於此者。亦不欲觀矣。請開益上人略說禪理致。䧺自白華來。是夜同宿。


七日。早行歷三日庵。卽益師所居也 入表訓海藏殿觀經板。入萬瀑洞。由靑龍黑龍兩潭行數里。到眞珠潭。潭在 普德窟下。盤石橫亘有層級。溪水被之。逬落。如珠璣故名。從溪左取徑。上普德窟。石磴縈紆幾數百步。磴盡復有石級。循級下又數十步。始得窟。中安沙大士像。上覆以二層屋。如燕巢。前楹下臨虗空。承以數十尺銅柱。復用鐵鎖維絡之。居僧慧觀去廳板。引余俯瞰。眩慄不能久視。從西北迤下。復到潭上。坐玩久之。又前百餘步。至碧霞潭。比諸潭益偉麗。旁石平鋪。如張筵席。其前爲斷厓。水自上墜下爲飛瀑。長可七八丈。矯如玉龍倒掛。山風時來吹之。飛沫四濺。烟雪滿壑。缺 又前數十步爲龜潭。潭有石類龜故名。又有船 潭火龍潭。船取其形似。火龍水色沉黑。似閟神物。故亦以是得名。盖此洞爲一山之勝處。而所見稍不如所聞。潭形皆偏側。不能圓滿如鏡。石色不甚明潔。大遜於龍游仙游諸處。獨碧霞一曲。㝡爲奇麗。亦不能遠超巴串而過之也。聞摩訶衍游客塡滿。無可着足。欲往登白雲臺。擇一幽潔庵子留宿。遂輿行歷摩訶萬灰二庵。始舍輿。踰小領。右折行一里。有路陡峻。編木爲梯。兩旁各繫蘿蔓下垂。扳蘿側足而上。卽下白雲後麓也。左右石壁。削立皆千仞。其中線路如劍脊。視之懍慄不果登。北折行到中白雲少憇。從庵後一 里到上白雲。庵在衆香城下。奇峰秀巒。錯羅互峙。如入羣玉之府。璀璨晶熒。不可名狀。比之正陽所見尤奇。盖遠眺與襯觀。色態不同故也。此山之奇勝。當以此庵爲第一。明日欲上毗盧。不能留宿可恨。夕還宿中白雲。


八日。早飰至萬灰庵。籃輿僧已來待。遂行至摩訶衍少憇。李君道一自此向外山。仍作別。向毘盧。由萬瀑上流行二里。有岩矗立。刻佛極壯偉。並溪而行。樹陰翳然。躑躅方爛開如錦。山鳥鳴聲。怳可入耳。如行山陰道上。令人實有應接不暇之意矣。北折得支徑。入深谷中幾 缺 里。累涉一溪。至圓寂庵舊址。踰一麓。自此地勢漸高。遠近峰巒。了了可見。數里到峰趾。猶俯視穴望諸峰。如撫嬰兒。臨溪而飰。行百餘步。路漸峻急。捫蘿而上。至下石磴。亂石堆積。層疊如梯級然。十步九息。艱難扳拊二里許磴始盡。南折蛇行百餘步。爲中石磴。視下其險少遜。又一里許磴盡。行側栢中數十步。至上石磴。峻急十倍於下。一步一息。直若登天。如是者幾二里。從峰北稍低處南行。始至峰頂。盖峰形繚如雉堞。行其上如從城上行。草木皆拳曲着地而生。亦可見其風氣之高凜也。僧云可以望海。而 是日適昏霾。天海相接。極目微茫。但見西南諸山。纍纍日撲地。如波濤起伏。亦不知爲某某山也。晩後始下。行數里飢甚。臨溪又飰。肩輿行十五里。還摩訶衍留宿。夕後淮陽有書相問。略助行資。


九日。終日困憊。閉門昏睡。夕後與聡也步至碧霞潭。坐玩久之。風甚乃還至船潭。䧺師追到。遂偕至摩訶。奴輩自九龍歸。甚言其艱險狀。心㥘欲徑趨楡岾。䧺師曰內山已盡搜討。所餘者獨此耳。豈可憚險。未了此一段淸債耶。余意遂决。約以明日往觀。表訓僧三彦者來謁。是先人入山時陪行者。爲人淳謹可喜。 孝伯有贈詩。


十日。早飰向九龍淵。行二十里到永郞岾。舍輿而徒。五里始下岾趾。又五里至獅子項。懸厓萬仞。往往路絶。編木爲梯。拚命得度。循溪而行。奇峰迭出。白石平鋪。水行其上。或散爲縠文。或垂爲瓊簾。令人可喜。殆忘其危險也。五里始到初淵。大石陡爲斷厓。瀑泉懸焉下而注。潭形正圓如钁。水色深綠。旁壁皆峭削不可着足。獨潭左稍可扳援而上。令僧輩 以下缺 行數百步。有樹盤屈。據而俯視。如剖大甕。水自上汩汩入之。色黝黑不見其底者。第二淵也。形類初淵而稍殺。色 類二淵而稍澹者。第三淵也。自此至諸淵。路尤危絶不果往。僧言上東獅子峰。可俯觀第九淵。遂還自初淵行登其巓。巓有大石冠焉。靠石下瞰。雲氣蓬003。不能了了。但見數百丈素練橫空下垂。眞壯觀也。晩後乃還。登永郞岾。白雲浩瀰如大海。遠近峰巒。只呈半軆。或露數尖如島嶼然。


十一日。早起向楡岾。過李許臺少憇。二十里到內水岾。楡岾僧已來待矣。自岾以東。山皆舒緩紆餘。少無峭削秀聳之態。此內外山之別也。行數里抵七寶臺。飰于臺下。又數里到隱仙臺。磴路頗峻。僧輩以大索 繫輿曳之。遂到顚。北對十二瀑。狀若垂紳。東望大海。如在履底。亦偉觀也。下臺行十里爲大寂庵。庵極華整。無僧久矣。東折數百步。有雙彦,義諶,懶白諸名僧碑。倚杖一讀。遂行至楡岾。直登山暎樓。樓舊跨大溪極宏麗。僧輩惑地家言。移建。只有涓流出其下。樓亦傾圮。無復舊觀矣。辛巳年間。寺被燬。佛殿新刱。金碧爛然。以香木爲假山。象靈鷲。安五十三佛。佛像大小長短不同。形䫉儼若生動。製作極巧。浮海東來之說固妄矣。似是新羅時良工所鑄也。寺僧出示觀音親筆貝葉經,指空所書佛經。又有銀字彌陀經。是仁 穆王妃在西宮時。親寫此經。追薦父母。卷端有小跋。辭旨極悲惋。


十二日。今日欲往觀九淵洞中內院。以脚疲未果。晩後杆城倅李叔謙卛其子入山。客中相見。殊可驚喜。


十三日。叔謙向內山。余向船潭。玅彦從焉。卽本寺僧也 行三里。南折入深谷。已覺水石淸佳。此是船潭下流也。稍前數百步。大石窿然中陷。缺 泉注焉成潭。色頗澄。比萬瀑之船潭。縱幾倍之。其狀之酷肖。殆不及焉。農巖記中謂水與船之四隅等然後下墜云者。亦不然矣。自潭以上爲潭爲瀑者甚多。亦有佳處。玅彦云可 與萬瀑相伯仲。余曰洞壑之開張不及。峰巒之映帶不及。只堪作奴儓耳。彦也頗以爲不然。以脚疲不能窮探。少頃卽還。有智眼者自俗離來。是雪霽高足。博通經典。爲南方大宗匠。招與之語。言論頗辨博。少有夸誕之病矣。


十四日。風雨大作。獨坐無聊。招智眼談禪。夕後稍霽。步過彦上人房。


十五日。雨未夬霽。遂冒雨作行。由寺北踰一嶺。行十五里。登佛頂臺。危岩斗起作㙜。西望十二瀑。東望大海。可與隱仙相伯仲矣。少頃下㙜一里許。圓通僧持 輿來待。遂行數里到博達串。石磴峻險。無减於永郞岾。舍輿而徒。七八里得一溪。問之乃聲聞洞也。雖無盤石澄潭之勝。石色皓白如珂雪。亦自可意。渡溪南折一里。爲松林窟。窟中安五百羅漢。東有松林庵。極瀟洒可愛。外山唯此庵爲㝡勝云。有參禪僧七八人。方居住香山。僧密機在摩訶時始謁余。同往白雲臺。余到楡岾。機待余留數日。今日又與余偕到松林。盖欲結夏于此也。其情有可嘉者。留詩以別。午時至圓通庵。飰後舍輿而騎。一里許路右有澄潭頗佳。下馬少憇。以日晩不能久留也。行十餘里到七松亭。直趨 雙碧川上。此是南江上流。水色極澄綠。上有石磯。可坐數十人。長松被之。極瀟洒幽敻。沿江一帶。白沙如雪。海棠方爛開。亦一勝也。主人權絿出見。自少出入尼山門下。亦佳士也。少話作別而行十里。由高城東門抵海山亭。主倅女婿李聖興仲麟方與妓輩作樂於亭上。余戱謂曰君處甥館。乃敢作此風流事耶。李笑而不答。以下缺.


十六日。朝自帶湖亭放舟。觀赤壁出海口。登七星岩。歷群玉㙜。游海金剛。晡時還。以日晩不能作三日浦之游。


十七日。自夜風雨大作。晩後始有開霽之意。欲往觀鉢淵。出西門。江水大漲不得渡。沿江而上十餘里。至花田。溪水亦漲。厲而僅渡。又十餘里到鉢淵。瀑布之勝。無减船潭。以水深不能歷觀諸處。入瀑布庵。與自澄少話。午飰于鉢淵寺。寺甚朴陋不堪處。寺後有短碣。歲久漫漶。亦不可讀。行十餘里。到新溪寺。寺在外九龍下流。處地極寬敞。面前峰壁。蒼潤可愛。頗與正陽相類。但癈久。今方新刱。房寮皆盖茅矣。


十八日。今日往觀外九龍。以雨後石滑未果。欲先觀叢石。發向通川。行二十餘里。歷甕遷。危厓削立。幾百 餘丈。上有線路。僅通人馬。下則風濤舂撞澎湃。如數百雷皷轟震。令人甚覺怖懍。過遷三十里。午炊于雲岩驛。李君道一自通川還高城。路中相逢。殊覺驚喜。夕宿通川邑內。


十九日。主倅李蓍徵送人先訊。遂卽來見。其子李寬齊亦踵至。一見如舊。言語無表襮。極可喜人也。約往叢石。飰後偕行。登喚仙亭少坐。步至叢石亭。以風甚不能久留。下觀埋香碑。擇岡頭稍穩處。對話良久。還坐于浦邊岩石上。討午飰遂還。今日欲往游金爛窟穿島。風濤大作。不能放舟可恨。


二十日。微雨。飰後發行。還到雲岩驛午飰。夕抵新溪寺。李道一又來待。盖欲偕我訪龍湫也。


二十一日。雨色尙未夬霽。欲發向龍湫。僧輩皆苦口阻搪。余不應。偕李君及僧輩十餘人遂行。歷船潭踰一領。椉肩輿十餘里。未至玉溜洞。以路險始舍輿。杖策而行。少憇路旁石屋。其盤石之平廣瑩潔。十倍于碧霞潭。但水從簾泉。不能直瀉如霞潭矣。坐玩良久。取道澗中。西折行危厓上數里。路急陡斷。懸絙而下。如是者三。到龍湫。其䧺偉奇壯。比自獅子峰觀時。不翅百倍。眞天下之壯觀。未知香爐鴈宕之瀑。與此果 何如也。余則以上白雲之峰巒。外九龍之水石。爲此山第一奇勝。非但我東所無。雖中國似難爲儷。以下缺


二十二日。還高城邑內。宿海山亭。以下缺


[편-001]扷 : 拔
[난-001]甚 : 甚字下有奇字
[편-002]荼 : 茶
[난-002] : 自此以下勿謄次
[편-003]葧 : 勃

 

두타초(頭陀草)十四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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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인물소개]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字)는 재대(載大), 호(號)는 담헌(澹軒), 또는 계림(鷄林), 좌의정 경억(慶億)의 손자이며, 당시 문형(文衡)이었던 인엽(寅燁)의 맏아들로서 조선후기의 화가이다.

 

1숙종 34년(1708)에 진사가 되고 세마부율(洗馬副率)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인 진천에 내려가 학문과 서화에 힘썼으며 장서가 1만권을 헤아렸다.

 

성격이 곧았고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을 두루 다녔다.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윤순(尹淳), 정선(鄭敾), 윤두서(尹斗緖)와도 교유했다. 문집중 윤두서의「자화상」과『공재화첩』 에 대한 기록, 겸재 정선(謙齋 鄭歚)의 여러 그림에 대한 화평, 당대 및 중국의 화가들에 대한 평(評) 등이 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춘경산수도」는 복사꽃이 핀 봄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남종문인서풍(南宗文人書風)을 보인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산수도」가 전하며 문집『두타초(頭陀草)』18권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