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유금강록(遊金剛錄) - 이원(李黿)

야촌(1) 2011. 1. 24. 16:30

■ 유금강록(遊金剛錄)

 

금강산 유람을 떠나기로 하다.

 

금강산(金剛山)은 강원도(江原道)의 진산(鎭山)으로, 북쪽으로는 안변(安邊)에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강릉(江陵)에 닿아 있으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춘천(春川)의 경계로 통한다.

 

흡곡(歙谷), 통천(通川), 고성(固城), 간성(杆城), 회양(淮陽), 금성(金城), 양구(楊口), 낭천(狼川)등 여러 군들이, 동쪽과 서쪽으로 땅을 나누어, 삼백여 리에 뻗쳐있는 내외의 금강산 산록에 들어 있다.

 

고개를 경계로 삼고, 내외 수참(水站)을 정하여 서쪽을 내산으로 삼고, 동쪽을 외산으로 삼는다. 금강산은 도가와 승려들이 모이는 곳이며, 시인과 문장가가 왕래하며 노닐며 감상하는 곳이다.

 

나의 먼 조상인 고려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濟賢) 선생 또한 그 사이에서 시(詩)를 짓고, 글을 지었으니, 장편, 단편의 시들이 이따금 《익재난고(益齋亂稿)》에 보인다. 나도 한 번 올라가 구경하여 나의 뜻을 통쾌하게 하고, 장차 선인의 발자취를 이어보려는 생각을 품은 지가 오래되었으나 공무에 얽매이고 생활고에 묶이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금년 봄에 태상(太常)의 관원이 되어 문사(文詞)로 죄를 얻게 되었는데, 저으기 기뻐하고 호연히 동쪽으로 여행할 마음을 가졌다.

 

유점사를 지나 장령을 넘다.

 

날을 정하고 행장을 꾸려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모월 모일에 고성군에 이르렀다.

태수(太守) 김지동(金智童)은 바로 문정공(文靖公) 상락(上洛) 김질(金礩)의 막내아들 이고,그 아들 김건(金<礻+建>)은 내가 어렸을 때 교유한 벗으로 나를 매우 정성스럽게 대접해 주었다. 다음 날 훈도인 김대용(金大用), 김건(金,礻+建)과 함께 강을 따라 올라갔다.


강은 산의 수참에서 발원하여 유점사(楡岾寺)를 지나 동쪽으로 흐르다가 비스듬히 남쪽으로 가고, 또 북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정오에 산의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였다.

 

강의 서쪽 기슭에 절이 하나 있는데, 누대는 높고 정돈되었으며 창고는 가득 차 있었다. 물으니 이것이 유점사의 곡식 창고인데, 세조 때 창건된 것으로 봄에 나눠주고 가을에 거둬들여 아침저녁으로 부처를 봉양하는 재물로 사용한다고 했다.


식량 창고로부터 남쪽을 향하여 점차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들어가니 시냇물이 콸콸 흘러가고 초목은 울창하였다. 십 리의 사이에 해를 보기 어렵고 다만 시원하고 서늘한 기운이 뼈에 사무칠 뿐이어서 여름 태양이 두려운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길옆에 돌을 쌓아 탑을 만들고 돌을 축조해서 대를 만들었는데, 평평해서 앉을 만하였다. 물으니 ‘문수평(文殊坪)’이라고 했다. 골짜기 서남쪽의 한 고개는 만 길 높이로 하늘을 가로질러 솟아 있는데, 이름은 "견현(犬峴)"이었다. 절벽에 매달린 거대한 돌이 떨어질 듯 말 듯하였고, 돌을 흔들며 세차게 흘러가는 물 소리는 지축을 흔들었다.

 

또 고개 위에는 돌로 된 비탈길이 있는데 용이 내달리고 말이 발굽을 차듯 구불구불 빙빙 도니 한 필의 베가 넓게 빙 두른 듯하였다.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면 구만 길의 위에서 돌을 굴려 떨어뜨리는 것처럼 몸과 물과 돌이 함께 문드러질 것 같았다. 승려가 "옛날 세조가 관동 지방을 순찰할 때 유점사에 향을 하사하고 연에서 내려 말을 탔던 곳"이라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임금의 행적이 있는 곳이므로) 조심스러워졌다가 갑자기 슬픈 감정이 생겨 시 한 수를 지었다. 고개 정상에 미치기 5리 쯤 전에 한 대가 있으니, "니대(尼臺)"이다. 땅을 깎아서 흙을 평평하게 하고 돌을 축조하여 대를 만들었으니, 왕래하는 승려와 세속 사람들이 노닐고 감상하며 쉬는 곳이다.

 

고개 위에는 노춘정(盧偆井)이라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는데, 다만 송진의 아래로만 물이 고여 겨우 4, 5사람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드디어 고개의 정상에 올라 지팡이를 세우고 잠시 쉬었다. 삼면이 모두 산이고, 한 면만 바다로 통했다. 좌우를 돌아보아도 사람의 자취는 전연 없고, 다만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알알거리는 새 소리 뿐이었다. 시를 지었다.


저물녘에 장령(獐嶺)을 넘었다. 시내를 따라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돌아 서쪽으로 들어가니 바로 유점동의 입구였다. 아름다움을 다투는 뭇 산들과 흐름을 다투는 만학, 가파른 봉우리와 절벽이 시내 옆에 빙 둘러 있어서, 앞뒤를 돌아 보다 들어갈 길을 잃어버렸다.


덕이 높은 선비가 옷깃을 여미고 서 있는 것 같아 매사의 동정과 형태, 모습들이 거의 사람 세상의 경치가 아닌 듯하였다. 시를 지었다. 시내의 북쪽에는 ‘환희령(歡喜嶺)’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걸어갈 수는 있으나 말을 타고 갈 수는 없었다. 날이 저물어 유점사에 도착하였다.

 

절 문에 도착하기 이십 보 쯤 전에 작은 각(閣)이 있는데, 돌을 깎아 섬돌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끊어 막고 그 가운데를 비워 왕래하게 하였다. 우러러 바라보니 많은 봉우리들이 다투어 눈에 들어오고, 굽어보니 여러 고기들을 헤아릴 수 있었다. 편액의 글씨는 ‘산영루(山暎樓)’라고 쓰여 있다. 시를 지었다.


승려 축잠(笁潛)과 계열(戒悅)이 나를 문으로 맞아들였다. 여러 누대와 각들은 우뚝 솟아 날아갈 듯 하며 무늬를 새긴 구불구불한 난간에는 구름과 노을이 비추고 있었다. 사방 이천여 보의 넓이에 사백여 칸의 건물이 이어져 있는데, 그 중 사방 여덟 개의 창이 달린 한 전(殿)이 가장 높았다.

 

전의 중앙에는 나무를 깎아 산을 만들고 나무를 뚫어 굴을 만들고는 사이에 금,은,구슬, 비취로 장식하여 53부처를 안치하였다. 그 편액에는 "흥인지전(興仁之殿)"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 웅장하고 화려함은 동방에서 제일이었다.

 

아아, 재물이 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백성의 힘은 다함이 있는데 한 번 돌을 굴리는 수고와 한 번 나무를 옮기는 노고가 모두 백성의 힘에서 나왔고 귀신이 운반하지 않았을 것이니, 우리 백성의 가난하고 곤궁함에 대해서 의심할 것이 없다. 시를 지었다.

전의 동쪽 회랑의 바깥에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작은 각을 세운 것이 있는데, 그 안에는 관을 쓰고 검은 적삼을 입고 띠를 묶고 홀을 꽂은 채색하지 않은 상(像)이 있었다. 봄과 가을, 초하루와 보름에 향화가 끊이지 않는다는데, 그 신주에는 ‘고성태수노춘지위(高城太守盧偆之位)’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옛날에 신하가 백성에게 공덕이 있으면 그가 다스리던 지역에 사당을 세워 그 공덕에 보답하는데, 지금 노춘은 무슨 공덕이 있어서 여기에 있는가?”

라고 하자, 승려가 한 책자를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그것은 산중의 사적을 적은 책이었는데, 대략 이렇다.
“처음에 주조된 동상 53부처가 금종을 타고 서역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와 고성포에 이르러 종을 끌고 이 골짜기로 들어왔는데, 태수 노춘이 좇아갔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문수평에 이르러 문수보살을 보고, 견령에 이르러 개를 보고, 니대에 이르러 여승을 보고, 장령에 이르러 노루를 보고서 부처가 간 곳을 물어보니 모두 그 길을 가리켜주었다. 이에 본 바대로 물건을 따라 그 지명을 명명하였다.

 

갈증이 심하여 지팡이로 땅을 파 솟아나는 차가운 샘물을 한 움큼 떠서 마시고, 절의 앞 고개에 이르니 종소리가 들려 기쁨에 뛰어올랐으므로 그 고개를 ‘환희령’이라고 하였다. 이윽고 도달하니 부처가 느릅나무 가지에 종을 걸어 놓고 가지 위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노춘이 이에 느릅나무로 절을 짓고 탑을 만들어서 그 부처들을 안치하였다. 그러므로 유점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아, 금석이 움직일 수 없고 짐승의 성품이 인간과 다른 것은 어리석은 보통의 남녀라도 아는 것으로 속일 수 없는데, 어찌 주조된 부처가 걸을 수 있으며 개와 노루가 말을 할 수 있는가? 일이 괴이하고 거짓되어 믿을 수 없다. 이윽고 그 책의 끝을 보니 고려의 사문인 묵헌(黙軒) 민지(閔漬)가 찬한 것이었다.

 

아, 공자를 오래 배운 사람이 부처를 배척하지 못한다면 그만 둘 것이지 더 나아가 책에다 기록하였으니, 어찌 다만 유교의 죄인에 그치겠는가? 세상을 속인 한 늙은이다.

 

정양사와 만폭동을 구경하고 오랜 친구와 발연에서 조우하다.

 

다음날 내산(內山)을 유람하려 하자, 승려 축잠과 계열이 시냇가에서 나를 전송하면서 시(詩)를 지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각각 한 수를 지어서 주었다. 이윽고 두 승려와 작별하고 시내를 따라 거꾸로 십 리쯤 올라가니, 시내의 남쪽에 한 골짜기가 있는데 경치가 그윽하고 바위와 돌은 매우 기이하였다.

 

물으니, ‘구룡동(九龍洞)’이라 했다. 원래 아홉 용이 살던 곳은 유점의 도량이었는데 오십 삼 부처에게 빼앗기고 이 골짜기로 옮겨왔으므로 골짜기를 구룡이라 명명한 것이다. 이 또한 묵헌 민지가 기록한 것이다.


정오에 수참에 이르렀다. 수참의 위는 넓고 평평하고 사방이 나무로 가려 있어, 비록 관망 할 수 없지만 놀면서 쉴 수는 있었다. 유점사로부터 여기까지 삼십 리 정도 되는데, 고개 정상에 이르기 전에 길이 끊어지려 하여 형세가 다하지 못하는 것이 셋이라 이름을 ‘삼수참(三水站)’이라 했다. 길은 비록 험난하나 마음은 기이한 것을 구경하려고 정성을 다하고 눈은 산수의 경치를 구경하느라 부지런하니 몸이 피곤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날이 저물어 마하연(摩訶衍)에 도달하였다. 가부좌하고 면벽하는 승려 8, 9명이 한 자의 나무를 머리에 얹고 조는 것을 시험하는데, 나무가 떨어지면 하얀 널빤지로 그 게으름을 경계하였다.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앉아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묻기를,
“무엇을 생각하는가?”
라고 하자, 앞에 앉은 승려가 말하기를,
“조주(趙州)의 무자(無字)를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응대하기를,
“석가의 성(性)을 보고 무(無)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 유가의 성이나 천도와 비슷하다. 성과 천도는 성인이 말하는 것이 적으니 어찌 평범한 사람들이 그것을 알겠는가? 대사는 어찌하여 알기 쉽고 행할 수 있는 일을 가르치지 않고 고원하고 알기 어려운 일로 사람을 권면하는가? 이것은 그를 불문에 들어오게 하여 문을 닫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자, 승려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나에게 묻기를,
“그대는 눈으로 만물을 보는가? 만물이 그대의 눈으로 들어오는가?”
라고 하자, 내가,
“눈 또한 만물을 보고, 만물 또한 나의 눈에 들어온다. 왜 그런가? 물건을 보고 이치를 궁구하며, 이치를 궁구하고 물건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유도가 말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 물격지지(物格知至)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승려가 또한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장차 정양사에 올라 산의 형세를 보려 하였다. 절이 산의 높은 곳에 있어서 사방을 바라보기 좋기 때문이었다. 중도에 곡식이 떨어져 시중을 드는 자가 자못 성내는 기색이 있기에, 내가 만류하며,

“궁핍하거나 현달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고, 배부르고 굶주리는 것은 명(命)에 달려 있다. 현달하면 배가 부르고, 궁핍하면 굶주리니 오늘 굶주리는 것이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정오에 사자암(獅子巖)을 경유하여 화룡연(火龍淵)에서 목욕하고, 만폭동(萬瀑洞)에서 바람을 쐬었다. 맑은 시내가 웅장한 소리를 내고 푸른 바위는 우뚝 솟았으며, 구름은 물에 비추고 새는 울지 않으니 참으로 산수의 경치 가운데 가장 기이하였다. 드디어 ‘산중사(山中辭) 한 장을 지었다.

有洞深深(유동심심) 골짜기는 깊고 깊으며
有巖磷磷(유암린린) 바위는 험하고 험한데
靑山如屛(청산여병) 청산은 병풍을 친 듯
澗草成茵(간초성인) 시내 풀은 자리를 펼쳤네.
露濕桂叢(로습계총) 이슬은 계수나무 적시고
風颺茶烟(풍양다연) 바람은 차 연기 날리네
花陰月樹(화음월수) 꽃그늘 달빛 어린 나무
鶴唳啼鵑(학려제견) 학과 두견새 우는구나.

白雲橫而不散(백운횡이불산) 흰 구름은 비껴 흩어지지 않고
松風颯而有聲(송풍삽이유성) 소나무 바람 솔솔 소리 나네.
目渺渺兮愁余(목묘묘혜수여) 눈은 아득하여 나를 근심스럽게 하니
心搖搖而若驚(심요요이약경) 마음은 근심으로 놀라는 것 같네
瞻高山而仰止(첨고산이앙지) 높은 산을 바라보고 우러르며
俯長流而敍情(부장류이서정) 긴 강물을 굽어보며 정을 펼치네.

골짜기 남쪽에는 암자가 하나 있는데, ‘보덕굴(普德窟)’이라 한다. 천 길 위에 걸려 있는데, 구리로 기둥과 기와를 만들었다. 허공에 의지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쇠 줄로 기둥과 용마루를 묶어 바위 위에 고정시켰다. 조금 기울었는데 누대와 같이 움직이며 돌면서 ‘지잉’하고 소리를 낸다. 또 돌을 깎아 길을 만들고 사이에 쇠사슬을 두어 왕래하게 하였다. 우리 익제 선생이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내가 그 운을 따라 시 한 수를 지었다.


드디어 승려와 더불어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승려가 말하기를,“시내 북쪽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금강대(金剛臺)라고 합니다. 한 쌍의 학이 푸른 절벽 사이에 둥지를 틀고 있는데,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면 나오고 들어가게 하면 들어가 나가고 들어가는 것과 움직이고 멈추는 것이 승려의 지휘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처음에는 그렇다고 여기지 않았는데, 가서 살펴보니 과연 승려의 말과 같았다.

 

그 날개의 깃털을 보니 등 위는 순청색이고 배 아래는 흰색이며, 긴 목과 붉은 부리를 지녔고 다리는 높으면서 붉었다. 정수리는 벗겨져서 붉은데, 형체가 들의 학과 같았으나 조금 작았다. 임 처사(林處士)의 《학보(鶴譜)》에 나오는 내용과 많이 달라 학과 비슷하나 학이 아니었다.

 

승려가,“과연 그 말과 같다면 이것은 보통 새인데, 어떻게 사람 말을 이처럼 잘 알아들을까?”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응대하여 말하기를, “닭과 개는 보잘 것 없는 동물이지만 부르면 오고 물리치면 가는 것이 사람의 지휘에 달려있다.

 

이 새는 이 산에서 오래 살면서 승려에게 훈련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 아침에 부르고 저녁에 손짓하니 어찌 나가고 들며 움직이고 멈추는 것이 민가의 닭이나 개만 못한 것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아, 승려가 학을 모르고 이 새를 학이라 여기고, 새는 승려의 부림을 믿고서 자신이 학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니 모두 웃기는 일이다. 저물녘에 표훈사(表訓寺)에 도착하였다. 주지인 의희(義熙)가 내가 온다는 것을 듣고 탁자를 준비하여 나와 맞이하였다. 먼저 다과를 베풀고 여행의 수고로움을 위로한 다음 성명을 묻고 뒷날 만날 때의 증거로 삼고자 하였다. 의희와 더불어 정양사에 올라갔는데, 주지인 조인(祖仁)은 또한 나와 서울에서 면식이 있던 승려이다.


두 승려가 절의 남쪽 대에 나를 앉혔는데, 산천은 맑게 개이고 바람도 상쾌하며 초목은 빛을 발하고 바위는 기이함을 드러내었다. 돌아보니 많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또렷한데 그 중에 웅장하고 깊으며 굳세게 우뚝 서서 가장 높은 것은 비로봉(毘盧峰)이며, 그 다음은 관음봉(觀音峰)이고, 망고대(望高臺)가 그 다음이다. 일출(日出), 월출봉(月出峰)과 지장(地藏), 달마봉(達摩峯)이 또 그 다음이다.


사면이 쇠를 깎은 듯 하고 천개의 봉우리가 옥처럼 서 있는데, 봄이 유령(庾嶺)에 들어가자 여러 매화들이 다투어 핀 것 같고, 한 고조(漢高祖)가 의리를 주창하며 거병하였을 때 6군이 상복을 입은 것 같았다.

 

또 여러 봉우리들이 시내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데, 높은 것, 우뚝 솟은 것, 날카로운 것, 사자가 우는 것, 호랑이가 성내는 것, 노여움을 담은 것, 팔뚝을 펼친 것, 항우(項羽)가 자결하면서 분한 기운이 사그러지지 않는 것, 번쾌(樊噲)가 방패를 잡고 거세게 돼지의 어깨를 씹어 먹는 것 등이 부견(符堅)과 사현(謝玄)이 비수(淝水)를 사이에 두고 진을 칠 때 수많은 창과 검들이 좌우에 우뚝 서 있으며 유격병의 철기가 종횡으로 달리는 것과 같았다. 참으로 천하의 장관이며, 조물주가 지혜를 써서 교묘함을 부린 것이다.


날이 저물어 표훈사로 돌아와서 잤다. 작은 사미승이 유점사로부터 왔는데, 인물이 청수하여 말하고 웃는 것이 낭랑하였다. 나이가 십육 세 정도 되었는데 글을 조금 알아 더불어 담소를 나눌 만한 자로, 비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이름을 물으니 법명은 행담(行淡)이며 박효종(朴孝終)은 속명이라 한다. 그 친족을 물으니 영의정 하연(河演)의 외손이며, 중추(中樞) 박거비(朴去非)가 그의 할아버지라고 했다. 내가 그 총명함을 가상히 여겨 침상을 같이하고 누워 그 승려된 이유를 묻자,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장안사로 향하려 하는데, 의희가 나에게 전대가 비었는지 묻고 쌀을 조금 주었다. 행담이 따라다니며 며칠 동안 모실 것을 원하니, 내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드디어 백천동(百川洞)의 입구를 유람하였다. 산수가 맑고 기이하며 초목은 고색창연하였다. 골짜기는 깊고 물은 멀리까지 흘러가니 대개 만폭동과 비슷하였으나 그윽하고 한정한 정취는 더 나았다.

 

승려가 ‘어떤 사람이 육십 년 전에 이 골짜기에 들어왔는데, 아침에는 꽃과 살고 저녁에는 달과 살면서 혹 만나는 사람이 있어도 안색을 고치지 않았고 수염과 머리는 옻과 같이 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가 은자였음을 알겠으나 혹 신선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장구의 시를 지어 절벽 사이에 썼다.


날이 저물어 장안사에 도달하여 내전에 들어갔다. 사면에 걸상을 마련하여 일만 이천의 부처를 안치하였으니, 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를 나타낸 것이다. 누대와 각, 탑과 사당의 기이함은 유점사와 같은데 시냇물과 암석의 운치는 더 뛰어났다. 시를 지었다.

다음날 왔던 길을 돌아 다시 마하연으로 갔다. 전대가 또 비어서 식량을 승려에게 빌었다. 승려가,
“금년에 어찌하여 식량이 떨어진 선비들이 많은가요?”라고 하자, 내가 웃으면서 묻기를,

“우리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는가?”

라고 하니, “어제 성은 양씨(梁氏)이고 이름은 표(彪)라는 자가 서울에서 왔는데 잠자리를 부탁하고 식량을 빌려 지금 발연(鉢淵)으로 향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승려의 말은 비록 장난에 가까웠으나 또한 이는 우리 유학의 궁한 상황이다.

다음날 양표의 자취를 좇아 안문령(雁門嶺)에 도달하였다. 고개의 북쪽에는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대단히 쭈뼛하여 그 형세가 하늘에 비빌 정도였다. 비로봉은 아버지와 같고, 망고대는 형제와 같고, 지장(地藏), 달마(達摩)는 아들과 같았다. 초목은 북풍을 받아 둘둘 말아 촘촘하며 남쪽 가지는 긴데 북쪽 가지는 짧았다.


정오에 대장암(大藏巖)에 올랐다. 백전(栢田)을 지나서 발연에 도달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마하연으로부터 이곳까지 팔십여 리인데, 그 도중의 산수와 초목의 기이함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다. 양표란 자를 찾았으니 바로 나의 십 년 친우인 양준(梁浚)이었다.

다음날은 양준과 더불어 절의 폭포에서 노닐었는데, 길이가 겨우 사십 보였다. 절의 승려가 물장난을 좋아하여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물의 흐름을 타고 내려가는데, 혹 머리를 앞으로 발을 뒤로 하기도 하고 혹 발을 앞으로 머리를 뒤로 하기도 하여 종횡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바닥에 이르면 그친다.

 

비록 바람 맞은 돛대나 늘어선 말이라도 그 속도를 헤아리기에 부족하나, 바위돌이 넓고 완만하여 그렇게 급하지 않으며 물의 돌이 마모되어 비게처럼 미끄러우므로 하루 종일 장난하여도 다치거나 부러진 사람은 없었다. 날이 저물어 고성에 도달하여 유숙하였다.

 

삼일포를 두루 살피고 집으로 돌아오다.

 

다음날 태수 김공(金公)이 삼일포(三日浦)에서 배를 마련하여 사선정(四仙亭)에서 나를 맞이하였다. 삼일포는 관청의 북쪽 5리 정도에 있는데, 둘레가 8, 9리로 서른여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좌우에 늘어 서 있다. 아침에는 이내가 끼고 저녁에는 비가 내리는데, 그 기상이 자주 변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이다.


정자는 삼일포의 가운데 있는데, 남쪽에는 사선봉이 있고 북쪽으로는 몽천사(夢泉寺)가 바라보이며 동쪽으로는 안상정(安祥汀), 영랑호(永郞湖)를 임해 있다. 정자에 못 미쳐 서남쪽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또한 삼일포의 가운데에 있다. 서쪽 면은 푸른 절벽으로 높이가 열 길 정도이며, 마른 소나무와 잎 떨어진 회나무는 바람과 안개 때문에 시들어 짧고 꾸부정하였다.

그 위에는 ‘매향갈(埋香碣)’이라는 비석이 있는데, 그 글에,“고성의 어떤 골짜기에 백 개의 향을 묻고, 간성의 어느 골짜기에 백 개의 향을 묻고, 강릉의 어떤 골짜기에 백 개의 향을 묻고, 양양(襄陽)의 어느 골짜기에 백 개의 향을 묻었다.

 

백 개의 향을 묻은 것은 미륵이 오는 시대에 향을 파서 부처에게 음식으로 드리기 위해서다.”라고 되어 있으니 그 황당무계하고 불경스러움이 심하였다. 그것을 세운 사람을 상고하니 고성 태수 아무개인데, 자가 없어 그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아마 노춘의 무리가 세운 것이며, 민지가 찬을 하였을 것이다.


비의 서쪽에는 절벽 같은 바위가 있는데, 절벽의 사이 입을 벌린 듯 오목하게 들어간 가운데에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붉은 글씨 여섯 자가 있었다. 그 아래에 또한 돌을 깎아 시문을 새겨 바위틈에 채우고 사면에 회칠을 하였는데, 우리 유가의 큰 학자인 홍귀달(洪貴達) 선생이 기록한 것이다.

 

정오가 되어 배를 타고 사선정에 갔다. 사면이 또한 푸른 절벽으로 노송 십여 그루가 그 위에 빽빽하게 줄 지어 있었다. 땅의 형세를 따라 대를 건축하고 그 높고 험한 곳은 깎고 이지러진 곳은 보충하였는데, 넓고 평평하여 열다섯 명은 앉을 수 있었다. 장후(張侯)가 술자리를 마련하여 술잔을 몇 번 돌리니 날이 저물었다. 홍 선생의 시를 읊고 그 운을 빌려 시를 지었다.

술기운이 올라와 닻을 풀어 배를 띠우고 가는대로 맡겼다. 맑은 바람이 잠깐 일어나 하얀 달빛을 받으며 동으로 흘러가니 잠깐 사이에 안상정(安祥汀)에 도달하였다. 마치 빈 허공에 기대고 바람에 의거하여 몸이 천지 밖에 노니는 듯하니 신선이 된 것인가 착각을 하였다.

다음날 태수와 작별하고, 양준은 양양(襄陽)으로 향하였다. 김건은 병이 나서 나와 김대용, 행담만이 출발하였다. 통천에 이르러 자고, 다음날 총석정(叢石亭)에 올랐다. 금강산의 한 줄기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다가 놀란 듯 달아난 듯 주먹처럼 굽어 봉우리를 이루니 총석정이 되었다.

 

정자의 북쪽에는 물 가운데 돌 사람이 서 있는데 여섯 면이 깎은 듯하고, 높이는 열 길 정도이다. 서로 의지하고 붙어 묶은 듯 함께 서 있는데, 그 수가 셋을 넘어 네 개이므로 사선봉(四仙峰)이라 한다.


남쪽에는 금란굴(金蘭窟)이 있고 동쪽에는 묘도(卯島)가 있다. 올라서 조망해보니 승경을 가히 다 기술할 수가 없었다. 태수(太守) 김윤신(金潤身)이 우리 뒤를 따라 와서는, 물에서 전복을 따고 산에서 꿩을 잡아 말술로 위로하였다. 술기운이 오르자 주인이 더불어 시 지을 것을 청하니 시 한 수를 지었다.


시 읊기를 마치고 주인과 작별하였다. 김대용과 행담은 흡곡까지 와서 나를 전송하였다. 내가 그 정의가 돈독한 것을 가상히 여겨 시를 지어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두 사람과 이별하고 안변의 별장으로 향하였으니, 산수간에 왕래한 날이 모두 이십여 일이다.
아,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높은 곳에 올라서는 ‘먼 곳을 갈 때는 낮은 곳부터 시작한다’라는 것을 알게 되고, 물을 보면서는 ‘가는 것이 이와 같다’라는 의미를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반절 정도 가서 스스로 그만두는 나약함’을 진작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구덩이를 채운 뒤에 나아간다’는 학문을 힘쓴다면 이러한 여행이 어찌 기이한 경치를 찾아다니고 유람에만 힘쓰는 것이겠는가? 인(仁)과 지(智)를 몸으로 깨닫고 사물을 궁구하는데 일조가 될 것이다.

홍치(弘治) 6년 계축년(1493년) 5월 16일에 계림(鷄林) 이원은 재사당(再思堂)에서 쓴다.

 

[문헌자료]

재사당일집(再思堂先生逸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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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인물소개]

 

이원(李黿) / 경주이씨 24世

 

[생졸년] 미상(1471년 추정)∼1504년(연산군 10). 향년 33세

[문과] 성종(成宗) 20년 (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

[생원진사시] 성종(成宗) 14년 (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1등(一等) 2위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낭옹(浪翁), 호(號)는 재사당(再思堂). 익재 제현(齊賢)의 7세손으로, 현령( 縣令) 공린(公麟)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이조판서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0년(성종 11)에 진사가 되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 : 正九品)이 되었으며 1495년(연산군 1)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호조좌랑(戶曹佐郞 : 正六品)을 거쳐 봉상시(奉常寺 : 正三品衙門) 에 재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諡號)를 줄 것을 제안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때 이로 인하여 곽산(郭山에 장류(杖流)되었다가 2년 만에 양이(量移 : 먼 지방으로 유배했던 사람을 죄를 경감해서 가까운 지방으로 옮기는 것)되어, 나주로 이배(移配) 되었는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서울로 불러 10월24일 참형을 당했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행의(行義)로 추앙받았다. 나주의 영강사(榮江祠),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제향되었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도승지(都承旨 : 正三品)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금강록(金剛錄)》·《재사당집(再思堂集)》등이 있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옮긴이 : 야촌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