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이 고부 계헌(李古阜季獻)의 죽음을 애도하며
옥산 이우는 율곡의 아우로 형의 그늘에 가려진 당대의 천재였다.
나와 율곡 공의 교분으로 말한다면 / 余於栗谷公
그야말로 형제나 다름이 없었는데 / 交義實弟兄
계헌은 바로 공의 막내 동생이라 / 季獻其少弟
어린아이 때부터 돌보아 주었다오 / 撫視自孩嬰
수려한 그 용모 얼마나 멋있었던가 / 眉眼瑩可念
예에 노닐며 글씨로 이름 날렸나니/ 游藝以書鳴
장인 어르신은 바로 매학 노인장/ 作贅梅鶴翁
초성의 명성과 거의 비등하였다네/ 草聖幾齊名
우리 율곡 공이 세상을 등진 뒤론 / 一自公亡後
사학의 성취를 한참 보지 못했는데 / 阻觀仕學成
마침 내가 남쪽 고을 맡고 있던 날 / 適余南州日
계헌은 병산의 청렴한 원님이었다오 / 作縣屛山淸
시관(試官)으로 여유가 많았던 그때 / 試圍屬多暇
나를 대접하느라고 성의를 다했는데 / 爲余愜將迎
삼상처럼 몇 해 동안 떨어져 있던 중에 / 參商積幾霜
결국은 이승 저승 나뉘고 말았구려 / 竟爾判幽明
나이도 그런대로 칠십 세에 가까웠고 / 猶自近稀年
군수 벼슬이면 미미한 것도 아니오만 / 郡守官匪輕
돌아보면 추억 어린 구곡의 못가 / 回頭九曲潭
술잔 들며 노래할 날 영영 사라졌네 / 觴詠隔平生
어진 이는 수한다는 말씀도 안 맞나 봐 / 仁者未必壽
이런 생각 하노라면 왜 그리도 허전한지 / 念此獨銜惸
나는야 모진 목숨 아직 죽지 않았소만 / 余頑尙後死
이 세상 살아갈 날 얼마나 또 남았겠소 / 於世豈餘程
한평생 영고성쇠 골고루 겪고 나서 / 榮落汔相當
서경에다 몸 붙이고 밭 일구며 산다오 / 農圃寓西京
그대의 딸은 빼어난 자질의 규수로서 / 子有閨房秀
영광스럽게도 방백의 부실이 되었는데 / 藩維副室榮
재행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 每聆才行美
가문의 이름에 걸맞다고 새삼 느꼈지요 / 信其稱家聲
멀건 가깝건 경조(慶弔)가 있을 때면 / 近遠欣戚及
한집안 사람처럼 정을 나누곤 하였소만 / 有如通家情
이것이 웬 말이요 불과 순월 사이에 / 奈何旬月間
아비와 딸의 만사 잇따라 짓게 되다니 / 挽爲父子呈
지금 천리 밖까지 전해진 이 슬픔이여 / 傳哀千里外
끝까지 우리 우정 다 기울여 주셨구려 / 終是分義傾
◇남쪽의 부음(訃音)과 서쪽의 초상 소식이 불과 순월(旬月) 사이에 전해졌다.
◇옥산 이우 생졸년 : 1542년(중종 37) ~ 1609년(광해군 1)
간이집> 簡易文集卷之八> 休假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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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예(藝)에 …… 날렸나니 : 군자가 닦아야 할 육예(六藝) 중에서도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는 말이다.
[주2]장인 …… 비등하였다네 : 계헌, 즉 옥산(玉山) 이우(李瑀)의 장인은 호가 매학정(梅鶴亭)인 황기로(黃耆老)로서, 한(漢)나라의 장지(張芝)와 당(唐)나라의 장욱(張旭)과 같은 초성(草聖)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초서를 잘 썼다고 전해진다.
[주3]사학(仕學)의 성취 : 학문이 이루어져서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주4]삼상(參商) :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삼성(參星)은 동쪽 하늘에 있고 상성(商星)은 서쪽 하늘에 있어서, 각각 뜨고 지는 시각이 틀리는 관계로 영원히 서로 만날 수가 없는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주5]구곡(九曲)의 못가 : 율곡이 거처하던 해주(海州)의 고산 구곡담(高山九曲潭)을 말함.
[주6]어진 이는 수(壽)한다 : 지(知)자는 즐기고 인(仁)자는 수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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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인물소개]
● 최립(崔笠)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통천(通川). 자(字)는 입지(立之), 호(號)는 간이(簡易)· 동고(東皐). 진사 자양(自陽)의 아들로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여 1555년(명종 10) 17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어 여러 외직을 지낸 뒤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 재령군수(載寧郡守)로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데 힘써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그해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4년 호군(護軍)으로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 1592년 공주목사(公州牧使). , 이듬해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승문원제조를 지내고, 그해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 1594년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각각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판결사(判決事), 1606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듬해 강릉부사를 지내고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러 사직하고 평양에 은거하였다. 그는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관계가 빈번하여지자 문장으로 보국(保國)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갔을 때 중국문단에 군림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하였고,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초(草)·목(木)·화(花)·석(石)의 40여 종을 소재로 한 시부(詩賦)가 유명하며, 역학(易學)에도 심오하여 《주역본의구결부설 周易本義口訣附說》 등 2권의 저서가 있다. 그의 문(文)과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의 서(書)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시보다 문으로 이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도 소식(蘇軾)과 황산곡(黃山谷)을 배워 풍격이 호횡(豪橫)하며, 질치심후(質致深厚)하고 성향(聲響)이 굳세어 금석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는 평을 들었다. 문장은 일시를 풍미하였다.
당대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왕세정 일파의 문장에 경도하여 고아간결(古雅簡潔)하며, 법도에 맞는 글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났기 때문에 문장이 평이한 산문을 멀리하고 선진문(先秦文)을 모방하여 억지로 꾸미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송설체(宋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문집으로 《간이집》이 있고, 시학서(詩學書)로 《십가근체시 十家近體詩》와 《한사열전초 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野村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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