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김육(金堉) - 청풍김씨(淸風金氏)

야촌(1) 2010. 10. 25. 15:39

■ 김육(金堉)

 

     [생졸년] 1580년(선조 13) - 1658년(효종 9)

    [문과] 인조(仁祖) 2년 (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1위/38명 [장원(壯元)]위/45歲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38년 (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3등(三等) 54위/26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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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적 성향을 지니고 제도개혁을 추진한 정치가. 본관은 청풍(淸風). 자(字)는 백후(伯厚), 호(號)는 잠곡(潛谷)· 회정당(晦靜堂).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식(湜)의 3대손으로, 참봉(參奉 : 從九品) 흥우(興宇)의 아들이다.

 

1. 성균관에 들어가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회시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으로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자, 성균관(成均館) 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청덕동에 머물며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2. 인조대의 관력과 활동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 從六品)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음성현감(陰城縣監 : 從六品)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해 10월에 정언(正言 : 正六品)에 임명되었으며, 1633년 9월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 : 從三品)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온 후 예조참의((禮曹參議 : 正三品)· 우부승지(右副承旨 : 正三品)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 從二品)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하여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 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구황촬요 救荒撮要》와 《벽온방 辟瘟方》 등을 편찬, 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으며, 이후 형조참의(刑曹參議 : 正三品)) 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 正三品) ·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正三品) · 대사간(大司諫 : 正三品) · 병조참의(兵曹參議 : 正三品) ·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 從二品) · 도승지(都承旨 : 正三品)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 병조참판((兵曹參判 : 從二品) · 이조참판(吏曹參判 : 從二品) 겸 비변사유사제조(備邊司有司提調)· 형조판서(刑曹判書 : 正二品) 겸 선혜청제조· 우참찬(右參贊 : 正二品) · 대사헌(大司憲 : 從二品) · 예조판서(禮曹判書 : 正二品) · 도총부도총관(都摠府 都摠管)·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 正二品) 등의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1643년과 이듬해 1645년 중국에 두 차례나 더 다녀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製造)· 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 《유원총보 類苑叢寶》·《황명기략 皇明紀略》·《종덕신편 種德新編》·《송도지 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3. 효종대의 관력과 활동

1649년 5월 효종(孝宗 : 조선의 제17대왕)) 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大司憲 : 從二品)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右議政 : 正一品)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 光山金氏)과의 불화로 인하여 이듬해 1월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領議政 : 正一品)에 임명되고, 겸하여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맡았다.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원임(原任) 정태화(鄭太和 : 東萊鄭氏)가 영의정(領議政 : 正一品)에 복귀함에 따라 좌의정(左議政 : 正一品)으로 물러앉아 지내면서도 대동법 시행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한편, 《해동명신록 海東名臣錄》을 저술하고 《인조실록》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領議政 : 正一品)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 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孝宗)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가 죽어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 : 본관>부여(扶餘)에 의하여 뒷날 성취되었다.

 

4. 저술의 업적

저술로는 그의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 潛谷遺稿》(11권 10책)·《잠곡별고 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 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 潛谷續稿》가 전하고,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 天聖日錄》·《청풍세고 淸風世稿》·《조천일기 朝天日記》·《기묘록 己卯錄》·《잠곡필담 潛谷筆談》·《당삼대가시집 唐三大家詩集》 등이 전하며, 〈자네집에 술닉거든〉이라는 시조 1수도 전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원총보》는 우리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하여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되는 것이며, 《구황촬요》·《벽온방》·《종덕신편》 등은 목민자(牧民者)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한 방책으로서, 그의 위민적(爲民的)생애의 편모를 보이는 저술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와같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몸소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니, 이러한 사업은 그의 자손들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나라 주자(鑄字)와 인쇄사업에 크게 기여하는 바 되었다.


무덤은 경기도 양주 금촌리에 있다.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과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고,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독향(獨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人物考

◇潛谷先生年譜(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潛谷全集, 1975)

◇李氏朝鮮의 後期活字의 改鑄와 潛谷金堉先生三代의 貢獻(金斗鍾, 白樂濬博士還甲紀念國學論叢, 1955)

◇역대종합인물정보시스템

 

 

 

 

↑잠곡선생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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