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조익 선생(趙翼先生)

야촌(1) 2010. 10. 18. 21:19

■ 조익(趙翼)

    [생졸년] 1579년(선조 12)∼1655년(효종 6)./壽77歲

    [문과] 선조(宣祖) 35년 (1602) 임인(壬寅)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합격연령 24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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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字)는 비경(飛卿), 호(號)는 포저(浦渚)· 존재(存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 안국(安國)의 증손으로, 현령(縣令) 간(侃)의 손자이고, 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 영중(瑩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찬성 윤근수(尹根壽)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중 음보로 정포만호(井浦萬戶 : 從四品 무관직)가 되어 1598년(선조 31) 군량미 23만석을 운반하는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뒤 다시 수학하여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삼사의 관직을 두루 지내던 중, 1611년(광해군 3)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정여창(鄭汝昌)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 : 從六品)으로 좌천되고, 이어 웅천현감(熊川縣監 : 從六品)을 역임하였다.

 

뒤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는 사태가 빚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광주(廣州)로 은거하였다가 충청도 신창(新昌: 오늘날 충남 아산시 신창면)으로 옮겨 살았다. 1623년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이조좌랑(吏曹佐郞 : 正六品)에 임용되어 신창 도고산(道高山) 아래 모옥(茅屋)을 떠나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의정부 검상·사인(舍人 : 正四品)에 임명되고, 이어 응교(應敎 : 正四品) · 직제학(直提學 : 從三品) 등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 : 正三品) 에 올랐다.

 

1631년 어머니가 죽자 잠시 벼슬을 떠났으나, 3년상을 마친 뒤 곧 관직에 복귀하였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 從二品)·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 正二品)· 대사간(大司諫 正三品) · 이조참판(吏曹參判 : 從二品) · 대사성(大司成 : 正三品) · 예조판서(禮曹判書 : 正二品 ) · 대사헌(大司憲 : 從二品) · 공조판서(工曹判書 : 正二品) ·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 正二品)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대동법(大同法)을 확대하고 관리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636년 예조판서(禮曹判書 : 正二品)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자 종묘를 강화도로 옮기고 뒤이어 인조(仁祖)를 호종하려다가, 아들 진양(進陽)으로 하여금 강화로 모시게 하였던 80세의 아버지가 도중에 실종되어 며칠 동안 아버지를 찾느라고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호란이 끝난 뒤 그 죄가 거론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지만, 그 까닭이 효성을 다하고자 한 데 있었고, 또 아버지를 무사히 강화로 도피시킨 뒤에는 윤계(尹棨)· 심지원(沈之源) 등과 함께 경기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한 사실이 참작되어 그해 12월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조정에 들라는 하명을 받았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뒤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 : 正二品)· 이조판서(吏曹判書 : 正二品)· 대사헌(大司憲 : 從二品)의 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사양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그 상복을 벗게 되자 1648년 좌참찬(左參贊 : 正二品) 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이후 1655년 3월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기까지 우의정(右議政 正一品) · 좌의정(左議政 : 正一品) 과 중추부 판사· 영사(領事 正一品)) 의 자리를 거듭 역임하였다.

 

그러면서 윤방(尹昉)의 시장(諡狀)사건에 관련되어 몇 개월 동안 삭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무난하게 벼슬생활을 하면서 김육(金堉)과 함께 대동법을 확장, 시행하는 데 기여하였고, 각종 폐막(弊瘼)을 개혁하는 데에도 전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학문에도 정진하여 《곤지록 困知錄》·《중용주해 中庸註解》·《대학주해 大學註解》·《서경천설 書經淺說》 등을 지어 효종(孝宗) 에게 바쳤다. 이 저술들은 주자(朱子)의 장구(章句)를 크게 고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감히 이를 헐뜯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향 광주에서 77세로 죽으니 효종(孝宗)은 시호를 내리고, 6월에 대흥(大興) 동화산(東華山)아래에 장례하기까지 관원을 보내어 치조(致弔)하였다. 뒷날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신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위의 논술 외에 문집으로 《포저집》 35권 18책이 전하고, 《역상개략 易象槪略》은 이름만이 전한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경학·병법·복술에도 뛰어났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온 그와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이시백(李時白)을 가리켜 ‘사우정(四友情)’이라 불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人物考 淸選考 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