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제의례·제문

[펌글]제례참고글

야촌(1) 2010. 10. 2. 18:49

海東雜錄 本朝[一]

 

■趙浚

 

[原文]

平壤人。字子明。號松堂。版圖判書德裕之子。恭愍王末年。出按江原道。行到旌善郡。有滌蕩東溟知有日。居民拭眼待澄淸之句。識者知其有大志。佐我太祖爲開國功臣。官至領議政。謚文忠。○麗末權勢之家。競爲互市徵斂。民甚苦之。扶老携幼。渡江而西。願自今抑買者。一切禁止。痛繩以法。具抑買之貨。在民間未盡收者。宜令刷括以充官用。 時務書 舊制。下王牌于諸倉庫宮司。必印以行信寶。今內豎獨署其名。非所以防奸也。自今凡內用。令都評議使供之。毋下王牌。○請令士大夫庶人。當忌日必祭。不許騎馬出行。對賓客。如居喪禮。○自事元以來。昇平日久。文恬武嬉。宿衛無人。至設護軍等官以代禁衛之任。而祖宗入衛之制。皆爲虛設。○國法。州郡每歲計口籍民。故朝廷之徵兵調役。如指諸掌。近來此法一毀。守令不知其州之戶口。徵調之際。鄕吏欺蔽。富壯免而貧弱行。貧弱之戶不堪其苦而逃矣。貧弱逃則富壯之戶代受其役。不堪其苦。亦如貧弱逃矣。其任徵發者。憤吏之欺蔽。痛加酷刑。則吏亦不堪其苦而逃矣。鄕吏百姓流亡四散。州郡空虛者。此戶口不籍之流禍也。 上同 處九重則念吾民之不庇於風雨。御八珍則念吾民之不足於糟糠。服輕煖則念蠶婦之赤立。而法大禹之惡衣。臨宴享則念農夫之餓莩。而體隋文之一肉 上同 寢園署禮文。與祭者不飮酒不茹葷凡四日。謂之散齋。或居於本司。齋明端坐致其誠敬凡三日。謂之致齋。今則諸執事自散齋至致齋之日。各於其家與婦人狎處。甚不敬也。自今一遵禮文。違者罪之。 上書 請上墳之禮。許從風俗。以每年三令節。寒食爲定規。以成追遠之風。違者以不孝論。○當農驅民。旬月弋獵。農失其業。民不足食。若夫鷄豚之畜。取之罕則不擾於民。請築鷄豚場二所。一令典廏署主之。以奉祭祀之用。一令司宰寺主之。以供賓客之需。○國家自祖宗朝。衣冠禮樂。悉遵華制。迨至元朝。壓於時王之制。變華從戎。故上下不變。民志不定。○上書恭讓王。軍士與倭戰。而所得倭物。悉輸京都。以此軍士解軆。自今破賊者獻馘而已。軍士所得倭物。勿使推鞫。○京幾八縣。徭役甚煩。民不聊生。無所控告。上書請依各道置官。使開城府考績。以明黜陟。以革其弊。○按廉使秩卑。以五六品爲之。不能嚴於黜陟賞罰。請擇遣兩府。有廉明勤幹者。許令臺諫薦擧。爲都按廉黜陟大使。以田野闢。戶口增。詞訟簡。賦役均。學校興。巡察州郡。而黜陟之。以號令嚴。器械精。兵卒鍊。屯田修。海寇息。巡臨方鎭。而賞罰之。俟依貼出乃遣之。自元帥以下皆郊迎。呈參從之。後改稱都觀察黜陟使。○內外大小之官。除拜後不卽上官赴任。因致公事稽緩。奸吏容匿。浚上疏。遂定其赴任日限。○凡公私滋息。只一本一利。比來貨殖之徒。一本之利。或至十倍。貸假之徒。鬻妻賣子。終不能償。至於喪家失業。自今一本一利。毋得剩取。以爲恒式。○驛戶有知路指路之役。麗末驛戶凋廢。州郡代受其苦。浚上書以爲。欲使州郡復業。先當恤驛戶。請於每驛置丞。令監司薦補。如守令例。以致蘇復。○國家置成造都監。使管一國材鐵之用。一木之曳。至斃十牛。一爐之冶。至廢十農。○以爲學校風化之原。欲得經明行修之士。以勤敏博學者爲敎授。閑居儒業者爲敎導。令學者常讀四書五經。不許讀詞章。誘掖奬勸。有成效者。擢以不次。○今之學者。以雕篆之學。幸中科第。取榮一身。從仕之後。盡棄其業。昧於施措。使自今取各年及第四品以下。對策庭中者。使掌製敎。不中者左遷。○上書恭讓王。以爲近因兵興。學校廢弛。鄕愿之托儒名者。避軍役者。至五六月間。集童子讀唐宋絶句。至五十日乃罷。謂之夏課。雖欲經明行修之士。其可得乎。○敬之一字。帝王作聖之基。公之一字。帝王治政之本○麗季其人之役。法久弊生。分隷各處。役之如奴隷。不堪其苦。至於逋亡。主司督徵闕布。稱貸於人。不能償之。直趨州縣。乃謂京中貸借。倍數督徵。州縣之凋廢。職此之由。浚上書請革其弊。○古法。百官謝牒。堂後官署之。近來詐僞日滋。故上將軍以下。軍簿司印之。奉翊以下。典理司印之。乃防詐冒也。○司幕。卽古之尙舍。而今之司設也。今司設廢其職而食其祿。司幕勤其事而不食祿。請改其舊制。從之。○吾東方家廟之法廢弛。願自今一用朱子家禮。大夫以上祭三世。六品以上祭二世。七品以下至庶人。止祭其父母。擇凈室一間。各爲龕以藏其神主。以成追遠之風。○每一里。擇耆老有學者爲社長。依黨序之法。敎導子弟。毋使子弟群戲以長浮薄之風。○上書辛禑。以爲羅末田不均而賦稅重。一頃之租。收至▣▣民不聊生。太祖卽位。用什一之法。以田一負。出租三升。遂放民間三年租。○食爲民天。穀由牛出。設禁殺都監。所以重農事也。 同上 浚云。糾正職察百官。爲人主之耳目。凡祭祀朝會。至於錢穀出納。悉皆監檢。秩卑而任重。 麗史 辛禑時。禾尺等詐稱倭賊。相聚爲盜。焚掠公廨。浚上書云。禾尺之徒。不事耕種。坐食民租。相聚山谷。無恒產無恒心。其勢可畏。自今課其生口。授以曠地。與平民同其里。違者罪之。禾尺一號楊水尺。 同上 李仁任死。國人聞之皆喜曰。人不能誅。天乃殛之。浚曰。仁任罪盈惡積。幸天殛之。請削官爵。以懲爲惡之人。 同上 李子松見殺。浚上書以爲。子松廉謹守節。死非其罪。國人惜之。請賜誄謚。厚恤其家。 同上 恭靖初。臺省上疏。請罷私兵。門下府事李居易聽趙浚之言。不卽納牌字記。後浚被鞫。魄喪魂迷。不得一言。直視而已。 同上 上書以爲。軍政多門。則號令不肅。每一道只遣一節制。餘皆罷去。 同上 司僕。掌乘輿之馬。而別立內乘。內豎之徒。專擅其職。其收蒭藁也。劫奪萬端。轉輸入城。農牛瘡仆。破殘畿縣。毒流諸郡。自今畿內蒭藁。計馬定數。分月而供。以除民弊。 時務書 壬申七月。我太祖卽位。卽夕召趙浚曰。卿知漢文帝入自代邸。夜拜宋昌爲衛將軍。鎭撫南北軍之意乎。因賜都摠使銀印畫角彤弓。五道▣皆委摠之。 寶鑑 國初趙浚等。始置濟生院。裒集諸方。又聚東人經驗者。名曰鄕藥濟生集。頒諸中外。陽村有跋選。趙浚嘗於上前。乍泣乍哀。外示遷善之狀。內要寬罪之計。此乃僞悔也。 金陽震論浚書浚若不經意於詩。爲詩橫放傑出。爲大人之氣像。嘗題百祥樓詩。薩水湯湯漾碧虛。隋兵百萬化爲魚。至今留得漁樵話。未滿征夫一哂餘。蓋有譏隋唐之意造語奇特。 詩話 雪梅妓名。善唱樂詞。趙浚初入相。諸國老宴西郊以慰。酒未半。命召赴闕。諸老共進一爵。令雪梅唱歌詞。乃唱西園未罷看花會又被宣招宴上陽之句。一座嘉嘆。後河崙巡察西鄙。設帳都門外。簪纓滿座。雪梅又唱勸君更進一杯酒西出陽關無故人之句。一座稱嘆不已。 仝上 自幼有大志。一日母吳氏。見新及第人綴行呵喝。嘆曰。吾子雖多。未有登第者。何用哉。浚跪泣稱天誓曰。予所不第者。有如天。自是勤學遂登第。 列傳 自幼倜儻。▣▣▣▣在壽德宮。望見浚書過宮前。卽命屬寶馬。陪指諭。 列傳 浚嘗知製敎。撰祈禳疏云。疏正直忠信之人。狎諂佞讒邪之人。知申事金濤曰。正直忠信。而疏者何人。諂佞讒邪。而狎者何人。則何以對。卽令浚改撰。 仝上 平壤伯趙浚卒。我太宗聞訃慟哭。素饌輟朝。親臨殯次弔慰。 寶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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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樹雨(土民)ㅣ2010.09.28. 01:02

위의 해동잡록 제1본조 趙浚의 글에서 제례에 참고될 글을 발췌 하였습니다.

 

○趙浚의 본관은 평양(平壤)으로 자는 자명(子明)이며 호(號)는 송당(松堂)이요 판도판서(版圖判書 호조 판

    서) 덕유(德裕)의 아들이다......

 

1) 청컨대, 사대부와 서인들로 하여금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제사를 지내게 하되 말을 타고 출행하는

     것을 허락치 말 것이며, 손님을 대함에는 상중(喪中)에 있을 때와 같이 처신하게 하소서.

 

2) 우리 동방에 가묘(家廟)의 법이 해이하여 졌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가례(家

     禮)》를 준용하여,

     대부 벼슬 이상은 3세(증조모)를 제사하고,

     6품 이상은 2세(조부모)를 제사하며,

    7품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는 그 부모만을 제사하되 정결한 방 한 칸을 택하여, 각각 감실(龕室: 신주

    (神主)를 모시는 방)을 만들어 그 신주를 모시게 해서 조상을 추모하는 풍속을 이루게 하소서.

 

3) “침원서(寢園署 왕릉을 관리하는 관서)의 예문(禮文)에,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4일간 술을 마시지 않으

    며, 냄새 나는 채소를 먹지 않는데 이것을 산재(散齋)라 이르고, 혹은 본사(本司)에서 거처하며 몸을 깨끗

   이 하고 마음을 정히 하여 단정히 앉아 3일간을 정성껏 공경하는데 이것을 치재(致齋)라.’ 하였습니다.

 

   지금은 모든 집사(執事)들이 상재로부터 치재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집에서 부인과 더불어 친압하게 거처

   하니 심히 불경합니다.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예문을 준수하여 어긋난 자는 죄를 주옵소서.”하였다.

   《상서(上書)》

 

4) 우리 나라는 조종(祖宗) 때부터 의관과 예악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는데, 원조(元朝)에 이르러서, 당

    시 황제의 압박으로 중국의 제도를 변경시켜 오랑캐의 제도를 따르기 때문에 위아래가 교화가 되지 않고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못합니다.

 

[댓글보기]

樹雨(土民) 10.09.28. 01:20

이를 보면

1) 조선 초기에 벌써 사대부나 서인에 이르기 까지 기일에 대한 제례의 언급을 하였고,

2) 가묘에 대한 예법을 주자가례에 준하여 대부는 3대, 6품이상은 2대, 7품이하 서민들은 부모만 조상할것

    으로 한정 하였고,

3)에서는 왕릉을 관리하는 자들에게 제사에 참여하는 산재와 치재를 반드시 할것을 제시하고 있으며,

4)에서는 중국에 대한 예악의 제도가 교화되지 않음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민가에서 서민들

   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근세 개화기로 알고 있는 종친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이우 10.09.28. 10:10

우리나라의 제사는 고래로 부터 신명을 받들어 복을 빌고자 하는 의례로서 자연 숭배의 제사의식이 행하여 졌다. 삼국시대 이후 자연신에 대한 제사가 자신의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로 발전하고, 왕가에서 부터 점차 일반 서민에게로 확대보급되었다. 조선중엽 성리학의 수입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사대부 사이에서 가묘를 설치하려 했으나 사실상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불교의례의 전통이 남아 유교의례가 사회전반에 크게 보급되지 않았고 16세기 중엽부터 성리학이 심화 되면서 양반 사대부 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하게 되고 관직에 따라 1대조부터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이이우 10.09.28. 20:04

그러니까 제사는 천지신명께 올리는 제사에서 부터 시작되었으나 나의 조상에 대한 제사로 발전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천지신이든 조상신이든 간에 기대고 싶고, 이들에게 빌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럴 때 맨입으로 빌 수는 없고 약간의 제수를 차려서 성의를 표시하였겠지요.

찬물 한그릇도 좋고 진수성찬도 좋습니다. 음식차리는 것. 비는 형태. 제사 순서도 갖가지 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주자가 제사 형식을 구체화한 것일 뿐입니다. 중국 생활 양식에 맞추어 놓은 제례 순서를 우리의 생활 양식에 맟추어 제사를 모셔도 됩니다. 중국은 '다'를 올리지만 우리는 '술'로서 예를 표합니다

 

이이우 10.09.28. 10:22

가가례 마다 조금씩은 다릅니다. 성균관 초암선생은 강신 뇌주때 술잔의 술을 모사그릇(솔뭉치를 묶어)에 단번에 붓는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3번에 나누어 붓는다라고 하며 3좨(三祭. 다른 책애는 삼좨라 함)도 '3제'라고 읽어야 하는데 초암 선생은 초헌 때만 3제를 하고 아헌과 종헌 때는 3좨(3제)를 하지 않는다고 하나 다른 책에는 초헌. 아헌. 종헌 모두 3좨(3제)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분향시 3차례에 걸쳐 향이 1대로 되어 있으면 1대씩하여 3대를 꽂아 향을 피우고 조각으로 된 향은 손가락으로 3번을 집어 향로에 넣습니다. 각기 제사모시는 형식이 다릅니다.

 

이이우 10.09.28. 20:09

민가에서 서민들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근세 개화기...]- 이렇게 알고 계시면 이는 잘못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에 상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周書와 北史의 백제기록에'부모와 남편의 상에 3년동안 상복을 입고....唐書의 고구려편에는 부모상에 3년동안 상복을 입고 隋書에도 삼국의 풍습이 부모상에 3년동안 상복...운운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 삼국시대이전부터 제사를 모셔온 것입니다.

 

단지 갑오경장이후 신분철폐가 이루어짐에 따라 신분에 따라 1대. 2대. 3대. 4대봉사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4대봉사로 바뀐 것으로 압니다.

 

┗ 樹雨(土民) 10.09.29. 03:27

이 까페에서 어느 종친님이 제사는 개화기 부터 서민들이 지내기 시작했다는 글을 읽었는데..... 아무리 검색해도 그 내용을 찾을수가 없네요....

 

이민희 10.09.29. 06:27

모든국민이 제사를 지내게된 것은 개화기 이후입니다 신분사회에서 아래계급은 성씨도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이 호적법을 만들면서 그들에게도 성씨를 지니게되었습니다

 

┗ 樹雨(土民) 10.09.29. 09:56

종친님이 말하시는 끝에 의문을 걸자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제사를 다 지내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제사를 안 지내고 있는데.... 그리고 어느 국가든지 간에 신분제도 여하에 따라서는 당연히 그러했겠지요.....

 

그러나 문헌에 그렇게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기일 제사를 국가에서 독려하고 품위에 따라 강요하는 문헌이 버젓히 있는데도 그렇게 말씀하시니....이러한 문제는 개인의 의견으로 볼 것이 아니라 범 한민족의 고유 풍습으로 볼때 아주 중용한 사안이기 때문에 다시 댓글 올립니다.

 

이민희 10.09.29. 19:01

조선총독부 발행 호적법자료에 보면 신호적을 만들때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우리나라국민의 약20프로라는 자료가 나옵니다 즉 최하층민 노비나 천민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성씨를부여하면서 면서기 맘대로 성을붙이거나 상전의 성씨를 붙이거나 그들이 원하는데로 성씨를 기입했다는 자료는 많습니다 성씨가 없거나 또한 있어도 못쓴 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은것은 당연합니다

 

이이우 10.09.29. 21:44

구분하여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군요. 조상에 대한 제사는 삼국시대에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고 국민대다수가 제사를 모신 것은 개화기 이후라는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고려말 부터 조선초이전에는 왕족. 귀족. 관직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제사를 모신 것으로 나오고 조선 중엽이후에 사대부를 중심으로 일반인들도 제사를 모셨으나 천민 신분은 종살이 등 사정상 제사를 모실 수 없었다는 내용도 있긴 합니다.

 

인터넷에 올린 글마다 내용이 틀리는 것이 삼국시대에는 조상 제사가 없었다고 하는 글도 있습니다.

좀 더 알아봅시다.

 

이민희 10.09.30. 06:48

지금말하는 제사는 유교식 제사를 말하는것입니다 유교를 도입한게 고려말 이라는사실을 부정하는사람은 없을것입니다 유교가 없는데 유교식 제사를 삼국시대에 시행할수는 없습니다 다만 유교식이아니라 샤머님즘적인 천신.지신.나무.등에게 제사를 지내고숭배하였다는 기록은있습니다.

 

이이우 10.09.30. 08:46

유교식 제사에 한해서 말씀 하셨다면 어떤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옛날부터 중국문화를 받아들인 우리나라로서는 크게 성한 것은 아니나 일부 왕족과 귀족들이 중국식(유교식으로 보아도 되겠지요) 제사를 모시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周書와 北史의 백제기록에'부모와 남편의 상에 3년동안 상복을 입고....唐書의 고구려편에는 부모상에 3년동안 상복을 입고 隋書에도 삼국의 풍습이 부모상에 3년동안 상복...운운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