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붕당론(朋黨論) - 구양수(歐陽脩)

야촌(1) 2010. 9. 27. 00:14

 ■ 붕당론(朋黨論)

 

 ◇구양수(歐陽脩 : 1007~1072)  -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 겸 문인.

 

↑구양수 화상(歐陽脩 畵像)

 

신(臣)은 듣기에, 붕당(朋黨)이라는 말이 옛 부터 있다고 들었는데, 오직 임금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따름입니다.  큰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함께 함으로서 붕(朋)을 만들고,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를 함께 함으로서 붕(朋)을 만들고 하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나 신(臣)은 생각건대 소인은 붕(朋)이 없고, 오직 군자라야 그것이 있다고 여기오니 그 까닭은? 소인은 좋아하는 것이 이익과 녹봉(祿俸)이고, 탐내는 것은 재물과 돈(화폐)입니다. 그 이로움이 같을 때를 당해서 잠시 서로 끌어들여 당(黨)을 만들어 붕(朋)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 이로움을 보고 앞을 다투는데 이르러서는 간혹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멀어지고 심한 자는 도리어 서로 해쳐서, 비록 그 형제친척이지만 능히 서로 보전하지 못하니, 신(臣)이 말하기를「소인(小人)은 붕(朋)이 없고, 그 잠시 붕(朋)이 된 것은 거짓이다.」하는 것입니다.

 

군자는 그렇지 아니하여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요, 행(行)하는 것이 충신(忠信)이며, 아끼는 것이 명절(名節)이니, 그것으로서 몸을 닦으면 도(道)를 함께 하여 서로 이롭고, 이(理)로써 나라를 섬기면 같은 마음으로 함께 다스려 끝과 시작이 한결 같으니, 이는 군자의 붕(朋)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된 자는 다만 마땅히 소인의 그릇된 붕(朋)을 물리치고 군자의 진정한 붕(朋)을 쓴다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요(堯)임금 시절에 소인배인 공공(共工), 환두(驩兜)등의 네 명이 하나의 붕(朋)을 만들었고, 군자인 팔원(八元), 팔개(八愷)등 16명이 하나의 붕(朋)을 만들었었는데, 순(舜)은 요(堯)임금을 도와서 네 사람의 흉악한 소인의 무리를 물리치고, 팔원(八元), 팔개(八愷)등의 무리를 나아가게 하였으니, 요(堯)임금의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으며, 순(舜)이 스스로 천자(天子)가 됨에 이르러서는 고(皐), 기(夔), 직(稷), 계(契)등 22인이 조정에 나란히 늘어서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일컬으며 밀어주고 사양했으니, 무릇 22명이 한 붕(朋)이 되었는데, 순(舜)은 모두 등용을 해서 천하를 또한 크게 다스렸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주(紂)왕에게 신하가 억만명이 있었는데 오직 억만명 각자의 마음이었거니와, 주(周)나라의 신하는 삼천명이 있었는데 오직 한 마음이었다."하였다. 주(紂)왕의 시절에 억만명의 마음이 각각 달랐기 때문에 붕(朋)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紂)왕은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신하 3천명은 하나의 큰 붕(朋)이 되어 주(周)나라가 그들을 등용하여 흥(興)하게 되었다. 후한(後漢)의 헌제(獻帝) 때에 천하의 명사들을 다 모아서 가두어 구금하여 당인(黨人)이라 지목하니,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한(漢)나라 황실이 크게 어지러우니, 뒤에 바야흐로 후회하고 깨달아 다 풀어서 당인(黨人)을 석방하였으나 그러나 이미 구제할 수 없었다.

 

당(唐)나라 말년에 이르러 붕당(朋黨)의 론(論)이 점점 일어났는데 소종(昭宗) 때에 이르러 조정의 명사를 다 죽여서 간혹 황하(黃河)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들은 맑은 무리들이다. 혼탁한 물에 던질만하다." 라고 하니, 이에 당(唐)나라는 드디어 멸망하게 되었다.

 

대저 앞 시대의 군주 중에 능히 사람마다 마음을 다르게 해서 붕(朋)을 하지 못하게 함은 주(紂)왕과 같은 자가 없었고, 선인(善人)이 붕(朋)을 함을 금한 것은 후한(後漢)의 헌제(獻帝)만한 이가 없었고, 맑은 무리들의 붕(朋)을 베고 죽인 것은 당(唐)나라 소종(昭宗)의 시대만한 적이 없다.

 

그러나 대개 그 나라를 혼란시키고 멸망하였으며, 서로의 아름다움을 일컬어 밀어주고 사양하여 의심하지 않음은 순(舜)의 22명 만한 이가 없었고, 순(舜) 또한 의심하지 않고 모두 썼지만, 그러나 후세에 순(舜)이 22명의 붕당(朋黨)에게 속임을 당하였다고 꾸짖지 않고, 순(舜)을 총명한 성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였기 때문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시대에는 그 나라의 신하 3천명이 모두 하나의 붕(朋)이 되었으니, 예로부터 붕(朋)을 함에 많고 또한 큰 것은 주(周)나라 만한 나라가 없었으나, 주(周)나라가 이들을 등용하여 흥(興)한 것은 선인(善人)이 비록 많더라도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저 흥망(興亡)과 치란(治亂)의 자취를 임금이 된 자가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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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朋黨論 /歐陽脩

 

臣聞朋黨之說。自古有之。惟幸人君。辨其君子小人而已。大凡君子與君子。以同道爲朋。小人與小人。以同利爲朋。

신문붕당지설。자고유지。유행인군。변기군자소인이이。대범군자여군자。이동도위붕。소인여소인。이동리위붕。

 

此自然之理也。然 臣謂小人無朋。惟君子則有之。其故何哉。小人所好者祿利也。所貪者財貨也。當其同利之時。暫

차자연지리야。연 신위소인무붕。유군자칙유지。기고하재。소인소호자녹리야。소탐자재화야。당기동리지시。잠

 

相黨引以爲朋者。爲也。及其見利而爭先。或利盡而交疎。甚者反相賊害。雖其兄弟親戚。不能相保故臣謂小人無朋。

상당인이위붕자。위야。급기견리이쟁선。혹리진이교소。심자반상적해。수기형제친척。불능상보。고신위소인무붕。

 

其暫爲朋者。僞也。君子則不然。所守者道義。所行者忠信。所惜者名節。以之修身。則同道而相益。以之事國。則

기잠위붕자。위야。군자칙불연。소수자도의。소행자충신。소석자명절。이지수신。즉동도이상익。이지사국。즉

 

同心而共濟。終始如一。此君子之朋也。故 爲人君者。但當退小人之爲朋。用君子之眞朋。則天下治矣。堯之時。小

동심이공제。종시여일。차군자지붕야。고 위인군자。단당퇴소인지위붕。용군자지진붕。즉천하치의。요지시。소

 

人 共工驩兜等四人。爲一朋。君子八元八愷十六人。爲一朋。舜佐堯。退四凶小人之朋。而進元愷君子之朋。堯之天 

인공공환두등사인。위일붕。군자팔원팔개십육인。위일붕。순좌요。퇴사흉소인지붕。이진원개군자지붕。요지천

 

下大治。及舜自爲天子。而 皐蘷稷契等二十二人。幷列于朝。更相稱美。更相推讓。凡二十二人。爲一朋而舜皆用之。

하대치。급순자위천자。이 고기직계등이십이인。병열우조。갱상칭미。갱상추양。범이십이인。위일붕이순개용지。

 

天下亦大治。書曰。紂有臣億萬。惟億萬心。周有臣三千。惟一心。紂之時。億萬人各異心。可謂不爲朋矣。然紂 

천하역대치。서왈。주유신억만。유억만심。주유신삼천。유일심。주지시。억만인각이심。가위불위붕의。연주

 

以此亡國。周武王之臣。三千人爲一大朋。而周用以興。後漢獻帝時。盡取天下名士。囚禁之。目爲黨人及黃巾賊起。

이차망국。주무왕지신。삼천인위일대붕。이주용이흥。후한헌제시。진취천하명사。수금지。목위당인급황건적기。

 

漢室大亂。後方悔悟。盡解黨人而釋之。然已無救矣。唐之晩年。漸起朋黨之論。及昭宗時。盡殺朝之名士。或投之 

한실대란。후방회오。진해당인이석지。연이무구의。당지만년。참기붕당지론。급소종시。진살조지명사。혹투지 

 

黃河曰。此輩淸流。可投濁流。而唐遂亡矣。夫前世之主。能使人人異心。不爲朋莫如紂。能禁絶善人爲朋。莫如漢獻

황하왈。차배청류。가투탁류。이당수망의。부전세지주。능사인인이심。불위붕막여주。능금절선인위붕。막여한헌

 

帝。能誅戮淸流之朋。莫如唐昭宗之世。然皆亂亡其國。更相稱美推而不自疑。莫如舜之二十二인。舜亦不疑而皆用

제。능주륙청류지붕。막여당소종지세。연개난망기국。갱상칭미추이불자의。막여순지이십이인。순역불의이개용 

 

之。然而後世。不誚舜爲二十二人朋黨所欺。而稱舜爲聰明之聖者。以其能辨君子與小人也。周武之世。擧其國之臣 

지。연이후세。불초순위이십이인붕당소기。이칭순위총명지성자。이기능변군자여소인야。주무지세。거기국지신 

 

三千人。共爲一朋。自古爲朋之多且大。莫如周。然周用此以興者。善人雖多而不厭也。夫興亡治亂之迹。爲人君子。

삼천인。공위일붕。자고위붕지다차대。막여주。연주용차이흥자。선인수다이불염야。부흥망치란지적。위인군자。

 

可以鑒矣。

가이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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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당과 당쟁

 

당쟁하면 조선의 사색당쟁을 떠올리곤 한다. 허나 당쟁이 조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젠 진부하기조차 하지만, 사람은 본시 짝짓고 무리지음으로써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음은 분명하다. 

어쩌면 ‘자연적’ 사람이 ‘사회적’ 사람으로 거듭나는 그 시점부터 당쟁이 함께 있었다는 진술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중국의 역사에도 굵직굵직한 당쟁이 여러 차례 보인다. 

그중 비교적 이른 것으로 당말(唐末)에 있었던 ‘우이당쟁(牛李黨爭)’을 들 수 있다. 

 

우승유(牛僧儒), 이종민(李宗閔) 등을 영수로 하는 ‘우당(牛黨)’과 이덕유(李德裕), 정담(鄭覃) 등을 영수로 하는 ‘이당(李黨)’ 사이에 약 40여 년 간 벌어졌던 당쟁으로, 붕당정치와 당쟁의 대명사처럼 인용되곤 한다.

 

물론 그 훨씬 이전에도 붕당 짓기와 붕당간의 다툼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공자와 그의 제자 삼천 명이 하나의 붕당으로 규정된 적도 있을 만큼, 역사 기록이 본격화된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수많은 당파와 당쟁이 있어왔다. 

 

그럼에도 우이당쟁이 주목받는 것은 아무래도 그것이 과거제라는 새로운 관료임용제도가 정착되는 시점에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인 듯싶다. 이후 중국 사회가 과거제를 기축으로 운영됐음을 감안해보건대, 우이당쟁은 이후 전개된 관료집단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던 듯하다.

 

구양수의 <붕당론> 역시 이런 역사적 경험을 배경에 깔고 있다. 약 40여 년 간 지속된 당쟁으로 관료집단 전체가 받은 타격은 작지 않았다. 더군다나 안사(安史)의 난으로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당 조정으로서는 관료집단 내부의 대대적인 당쟁을 제압할 능력도 조정할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붕당을 짓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붕당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관료들에게 일종의 금기가 되었다. 급기야 당말에 들어서는 절도사 주전충(朱全忠)은 청렴과 절개의 상징이었던 ‘청류파’ 선비들을 학살하고 나서는 ‘붕당을 지었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이제 누가 어떤 동기로 무엇을 위해 붕당을 지었는지는 도무지 중요치 않게 되었다. 그저 붕당을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아침에 불귀의 객이 될 수 있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벗은 선하기 마련

 

구양수(歐陽脩)가 간관(諫官)이었던 시절, 그는 강직한 선비 범중엄(范仲淹)이 귀양가게 되자 서슴치 않고 간언을 올려 범중엄을 변호한다. 이에 반대파들은 구양수(歐陽脩)와 범중엄(范仲淹) 등이 작당하였다며 구양수를 몰아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구양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붕당 짓는 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선다.

 

그 방식은 이러했다. 우선 그는 붕당에 관련된 논의가 태고적부터 있어왔음을 지적한다. 

이는 사람이 사회를 이루는 순간부터 ‘무리짓기’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동반자임에 대한 환기이다. 

사람인 이상 무리지을 수밖에 없는 만큼, 우리가 살펴야 할 대목은 어떤 유형의 인간들이 무엇을 위해 지은 무리인가라는 것이다. 

 

곧 선한 이들로 구성된 붕당이 있는가 하면 모리배들로 이뤄진 붕당도 있음이니, 모름지기 임금된 자가 이를 잘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라고 한다. 일단 상대의 아픈 곳을 모르는 듯 건드린 다음에 조리를 갖춰 얘기하면 상대는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구양수 역시 은근히 그러나 드러내놓고 임금을 한 차례 압박한 다음 이치를 갖춰 자신의 논지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붕당은 그 본질이 선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소인배들이 이익을 매개로 잠시 뭉쳤다 흩어지는 것은 붕당이 아니지만, 본인들이 붕당이라 우기고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는 바람에 소인배들의 모임도 붕당이라 칭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여 그는 어쩔 수 없이「거짓된 붕당[위붕(僞朋)]」「참된 붕당[眞朋]」이란 표현으로 소인배들의 붕당과 군자의 붕당을 구분한다.

 

다음으로 그는 ‘거짓된 붕당’ 곧 소인배들의 붕당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붕당이 아니라 ‘소인배’임을 주장한다.  보다 산뜻한 이해를 위해 그는 역사에서 유사한 사례를 끌어온다. 위로는 요(堯), 순(舜)부터 아래로는 직전 황조(皇朝)인 당 소종(昭宗)의 예까지 온 역사가 통째로 구양수(歐陽脩)의 논거로 활용된다.

 

그는 요(堯)와 순(舜)이 태평성대를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소인배들을 내치고 선한 이들을 중용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주나라 역시 무왕이 한 마음을 지녔던 선한 이들을 대거 등용하였기에 천자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堯)나 순(舜) 그리고 주 무왕이 등용한 선한 이들은 당시의 통념으로 보건대 붕당임이 분명하다. 붕당정치를 했는데 태평성대를 일구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진술이었다. 또 폭정을 일삼았던 은의 주왕은 온 나라 사람의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놓아 어떠한 붕당도 있을 수 없게 했지만, 은은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붕당정치를 타파했는데도 결국 망했다?  역시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진술이었다. 

 

붕당정치를 한 요와 순, 주 무왕은 태평성대를 일구었고, 그것을 타파한 은 주왕은 폭군이 됐다는 역설의 제시. 구양수는 성군의 대명사인 요, 순, 무왕과 붕당에 대한 당시의 통념을 한 지평에 나란히 놓음으로써, 붕당에 대한 세인들의 통념이 잘못됐음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장자(莊子)가 잘 썼던 역설의 변증방식으로 기존 통념의 근거 없음을 통렬하게 설파한 것이다.

 

이로써 붕당의 결성 그 자체에는 아무런 죄가 없음이 증명된다. 태생이 선한지라 붕당을 지었다는 것이 오히려 그 구성원들의 선을 입증해줄 수 있게까지 된다. 문제는 붕당의 외피를 쓴 소인배들의 작당(作黨)과의 구별이다. 차라리 어리석은 자와 달리 소인배는 간특함을 꾀하고 실행에 옮길 만한 재주와 용기를 지니고 있기에, 자신들을 선한 이들로 충분히 위장할 수 있다.

 

역사는 이렇게 말해준다. 소인배들이 현실적인 권력을 장악할 경우, 이들은 선한 이들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통해 자신들의 결점을 가리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고. 따라서 문제의 관건은 위선과 선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의 구비에 있게 된다. 구양수가 임금된 자는 모름지기 흥망성쇠의 자취를 역사에서 찾아 귀감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고 재차 임금을 압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붕당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근거 없음에서 탈피하여, 누가 왜 붕당을 조성하였는가를 살피는 쪽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조정은 선한 이로 채워질 것이요 그 당연한 귀결로 천하가 태평케 된다는 것이다. 

 

“정명(正名)”의 험난함

 

구양수(歐陽脩)는 협상의 달인이었을 듯하다. 

그는 붕(朋자에 대한 개념 분석을 통해 거짓된 붕당이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소인배들의 작당(作黨)조차 붕당이라 이름하는 현실을 수용한다. 물론 그것을 ‘거짓된 붕당’이라 부름으로써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효과를 자아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대신 그는 학리(學理) 면에서 한 발 양보한다. 모리배들에게 애초부터 벗이 있을 수 없다면, 그들의 모임은 응당 붕(朋)자가 아닌 다른 글자로 지칭했어야 논리적으로 맞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붕(朋)자를 사용한다. 

 

소인배들의 개전의 가능성을 믿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들이 지닌 현실적인 정치경제적 역량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였을까? 어느 경우든 그는 소인들의 작당(作黨)에 대해 학술적인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았다.

 

공자(孔子)는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재상을 시켜주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겠냐는 제자 자로(子路)의 물음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명분을 바로잡는 것. 정명(正名)이라고 답한다. 솔직 단순한 자로(子路) 역시 지체치 않고 “선생님도 참 현실에 너무 어두우십니다 그려.”라고 응수한다.

 

그러고는 바로 혼난다. “자로야! 넌 너무 다듬어지지 않았구나! 

명분이 바로서야 예측 가능한 사회가 되고, 그럴 때만이 백성들은 생업에 편안히 종사할 수 있게 된다.

 

” 예측 가능한 사회의 창출이라, 공자는 이를 위해 학인들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을 명분으로 세우며,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군자명지필가언야(君子名之必可言也), 언지필가행야(言之必可行也)」고 말한다.

 

학인(學人)이 권력의 중추를 이루던 시절, 학인들의 하는 말과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이 명료하고 투명할 때 사회는 비로소 예측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인(學人)들이 자신의 말에 대하여 구차하게 변명해서는 안 되는 것「군자어기언(君子於其言), 무소구기소의(無所苟已矣)」도 권력을 쥔 자들의 한 마디가 백성의 실존을 처참하게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자였다면 소인배들의 작당을 붕당이라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를 예측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요 백성들을 혼란케 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는 대상이 된다. 하나 구양수는 ‘거짓된 붕당’이라 지칭하는 선에서 멈춘다. 그것만으로도 소기했던 바의 정치적 효과를 분명하게 얻을 수 있었음이다.

 

자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의 하나는 적극적으로 타인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이다. 자기 안에 자기 정당화의 합리적인 근거가 없을 때 주로 쓰이는 이 방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쓰여왔다.

 

저 옛날 사방의 소수민족을 오랑캐라 이름함으로써 자신들을 우월한 문명이라 주장했던 중화주의가 그러하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패권주의가 그러하다.

 

선거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네거티브 방식’의 선거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인배들도 주로 이 방식을 사용한다. 특히 상대방에게서 자기 안의 부정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를 집요하게 몰아붙인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에는 미처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구양수를 몰아붙인 자들 역시 그러했다.

 

자신들이 작당하여 선한 이를 내쳤음에도 그들은 구양수더러 작당했다고 몰아붙인다. 선한 이름이 악한 세력에게 도용된 것이다. 붕당은 애초부터 선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악한 이에 의해 선점 당하자 도리어 선한 이를 옥죄는 무기가 된다. 

 

이름을 장악한 자, 명분을 쥔 자. 그 획득의 과정이 정당했는가는 잘 드러나지도 않고 또 쉬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늘 그랬듯이 현실은 드러난 결과가 보다 결정적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도둑맞은 이름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자로의 말처럼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그래서 결코 이룰 수 없는 바램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구양수의 태도가 현실적이면서도 도덕적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방식일 수 있다. 붕당이라는 이름이 소인배에 의해 도둑맞은 현실을 고발하는 선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마는 것. 상대에 대한 학리적인 사형선고는 자제하는 것. 설사 “정명”이 이상이라 할지라도, 이름이 도둑맞았음을 그래서 명분이 오염됐음을 떳떳하게 고발하는 것이 그것의 첫 걸음이 될 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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